<☆61>깜
아까의 찬란한 하늘과 사람들의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 마차에 던져 주던 소박한 부케들도. 그러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이다. 군중을 군중으로, 발판은 발판으로, 고귀한 자와 비천한 자를 나누는 선은 엄격하여야만 그 사회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왕립 학교에서 내내 귀에 못이 박이도록 가르쳤다. 나는 고귀함에 있어 약간의 흠집이 있었다. 몇 년간 비천하게 굴러먹었다는 흠집. 내 몸에 나 있는 채찍 자국의 개수만큼이나 그 흠집은 아프진 않지만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누구보다 고귀하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사실은 그럴 수 없는 자일지도 모른다. 애당초 고귀하긴 글렀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냉혹한 화살이 너의 심장을 꿰뚫으리라!]
먼 곳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언령을 외치고 얼음 화살이 날아들어 내 앞을 스쳐 가는 순간.
그리고 그 얼음 화살이 테인과 대립하던 이의 심장을 꿰뚫어 그를 얼음 조각으로 화하게 하는 순간.
나는 내가 고귀하지 않은 걸 후회하거나 아쉽게 생각하진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나의 연인이자 오늘 나의 배우자가 될 여자가 말 위에 서서 성스러운 빛으로 빛나는 활을 이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새하얀 웨딩드레스가 바람에 휘날렸다.
그녀의 뒤에서 하스트레드 기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마치 파도가 바위를 쓸고 육지로 달려드는 것처럼 그녀를 스쳐 수많은 기사가 달려 나왔다. 그들은 나를 보호하고 적들을 쫓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중 안에서 몇 명을 붙잡기도 했다. 무슨 일이지? 내가 의아함에 눈을 키웠을 때 군중 안의 몇 명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여기 모인 군중 모두가 나를 축복하러 온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 여러 목적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라는 걸 깨달았다. 당연한 일인데도 나는 그들이 나를 축복하러 온 엑스트라라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얼마나 안일한가.
“전하, 무사하십니까?”
실리는 말을 타고 달려와 내 앞에 뛰어내렸다. 전통이고 나발이고 모두 발로 차 버리고 나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을 그녀는 부케와 면사포가 없는 웨딩드레스 차림에, 평소보다 공들인 화장을 하고 있었다. 온 세상에 내 배우자가 된다는 선포를 하는 의식을 위해 한껏 차려입은 그녀를 보고 있자니 심장이 뻐근해졌다.
아름다워.
손을 뻗어 그녀의 새빨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녀의 머리는 생화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내 손이 닿자 그녀는 버릇처럼 고개를 기울여 내게 응했다. 길들인 동물 같은 태도에 마음에 환하게 불이 켜졌다. 그녀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겐 결코 이런 태도를 보여 주지 않는다. 그녀는 생각보다 선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이니까.
“눈부셔.”
내 속삭임에 그녀가 나의 이마 위로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우직한 사람. 나는 그런 그녀의 손을 내리고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늘 품에 안을 때마다 생각하는 건 그녀가 자그마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존재감과 달리 실리는 사실 작은 몸을 가진 평범한 여성이다.
그 순간.
갑자기 박수가 터져 나왔다.
“……?”
내 품 안에서 의아해하는 실리의 움직임이 느껴졌고 나 또한 당혹감을 감추기 급급했다. 무슨 박수지. 왜 박수를 받는 거지? 결혼할 두 사람이 끌어안고 있기 때문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누군가가 외쳤다.
“진정한 계승자!”
뭐?
내 품 안에서 실리가 고개를 확 쳐들었다. 뭐라고? 그녀는 이렇게 말한 사람을 잡아내려 했지만 군중이 더 빨리 반응했다. ‘진정한 계승자! 왕위 계승자!’ 그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 ‘왕위의 주인!’ 이제 나와서는 안 될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째서?
“바람잡이가 있습니다.”
실리의 말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건 마치 예지와 같은 예감이었다. 라스나티프는 왕의 호위가 적어질 거라고는 했지만 왕을 습격할 거라고 딱 잘라 이야기하진 않았었다. 그녀는 누구를 습격할 생각이었던가. 무엇을 꾸밀 생각이었던 건가.
“‘이든’을 왕으로!”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제 이렇게 소리 지르는 사람이 바람잡이인지 아니면 바람잡이에게 휘말린 보통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르고 나를 찬양하고 외쳤다. 세상이 사람들의 외침으로 가득 찼다. 비이성적인 판단들이 세상 속을 너울거렸다.
그때 실리가 오른손을 뻗었다.
[와라.]
실리의 언령에 반응해 하늘이 우르릉, 나지막이 으르렁댔다. 그리고 구름 사이로 빛이 한 줄기 내려와 그대로 칼이 되어 실리의 손에 당도했다. 사람들이 넋을 놓고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실리는 그 검을 그대로 땅에 내리꽂았다. 검 모양의 빛이 땅에 그대로 내리박혔다. 콰앙, 소리가 위협적으로 온 세상에 울려 퍼졌다.
“무엄한 말을 하는 자들을 수색해라.”
실리의 명에 하스트레드 기사들이 빠르게 반응했다. 그들이 군중 사이로 파고들자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 왕의 사냥개 같으니라고!” 나를 칭송하던 이들이 실리를 욕한다.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오늘은 우리의 결혼식이었다.
축복만 받아도 모자랄, 우리의 결혼식이었는데.
실리는 내 팔을 몇 번 도닥이고는 자신의 말로 걸어가 버렸다. 그녀는 바로 돌아갈 생각인 듯했다. 나는 하스트레드의 기사들이 나를 마차로 안내하는 걸 아연한 얼굴로 따라야 했다. 내 결혼식에 피를 뿌린 건, 오욕의 장으로 만든 건 누구인가.
나인가?
라스나티프인가?
…아니면 운명인가? 운명이 내게 행복을, 화합을, 안온을 허락하지 않는 것인가.
마차에 올라타서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 때 로즈메리가 내 품에 파고들었다. 그녀는 나의 얼굴과 모습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내 안위를 확인했고, 그다음에는 내 매무새를 고쳐 나갔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오기가 가득 담긴 얼굴로 “지지 마세요, 전하.”라고 중얼거렸다. “결코 지시면 안 됩니다, 전하. 무엄한 놈들에게 지셔서는 안 됩니다.” 그녀가 하는 말이 내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테인은 크라이스와 같이 들어왔다. 크라이스가 마차 창을 탕탕, 치자 마차가 출발했다. 마차 창을 흘끗 보자 마부가 바뀐 걸 알 수 있었다. 눈에 익은 마부가 아니라 기사단의 옷을 입은 자가 말을 모는 중이었다. 경계가 삼엄해졌다.
내 얼굴을 본 크라이스가 혀를 찼다. 그는 잠시 입을 달싹이다 내게 말을 걸었다.
“주군께서는 수색을 하라고 했지 체포를 하라고는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
“그저 그 분위기를 와해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입니다. 그 분위기가 더 무르익으면 정말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요. 대공 전하께도 그렇지만 거기 있는 아무것도 모른 채 휘둘린 시민들에게도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아, 그래서 실리는 수색하라고 했구나. 군중을 흩어지게 하고 최면에서 깨어나게 하려고 한 것이다. 나를 안전한 곳으로 빼내고… 그리고 자신이 욕먹는 길을 선택했다. 또.
그녀는 자신을 희생했다.
하늘은 여전히 파랗기만 하다. 나는 그 찬란한 빛을 보며 아까 실리의 검이 빛으로 화해 땅에 내리꽂히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가 왕의 사냥개라고 매도당하던 걸 생각하면 가슴이 지끈거렸다. 그녀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했던 걸까. 한참을 생각했다.
마차가 라스나티프의 신전에 도착했다. 그 꽃으로 화려하고 순결하게 장식된 신전을 보면서도 내 마음은 그저 사막처럼 메말라 있었다. 도대체 그녀는 왜 계속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걸까. 이 생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답이 나온 건 신전의 대기도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그녀와 내가 같이 입장하여 신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으로 혼례 의식이 시작되었다. 그녀와 같이 서서 무시무시하게 큰 신상을 바라보다가, 그 앞에 서 있는 왕, 내 모든 불행의 원인인 나의 삼촌을 보고 깨달았다.
그래, 그 자리다.
내가 그 자리에 있지 못하여, 내가 그녀의 왕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이런 꼴을 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혼례 의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내 멋대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의식의 절차대로 양손을 모으고 있던 그녀가 면사포 안에서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 손을 놓지 않은 채 그녀와 함께 꽃과 빛의 길을 걸었다. 신과 왕에게로 향하는 그 길은 우리의 길이며 그녀의 자유로 향하는 길이다.
나는 왕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여자를 모든 운명과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하겠다.
사랑의 형태가 여럿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이것이다.
리, 나는 이 자리에서 너에게 맹세해. 신도 왕도 아닌 너에게 맹세해.
나는 너만의 것이 될게. 그러기 위해서 나는 너를 완전히, 자유롭게 할게.
고개를 들면 보이는 천장에 난 동그란 창으로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 빛이 신성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
짝, 하는 메마른 타격음이 집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라스나티프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는 걸 보면서도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보다 나이가 마흔 살이 많은 여자의 뺨을 나는 몇 대 더 후려쳤다. 나를 농락한 여자는 자신의 죄를 아는 듯 묵묵히 뺨을 맞았다.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신관들이 당장이라도 내게 신성 마법을 쓰고 싶은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러나 라스나티프 본인이 한 손을 들어 그들을 강하게 제재했기 때문에 그들은 차마 내게 공격을 하지 못했다. 나 또한 마력을 응집시킨 상태이긴 했다. 나는 언제든지 반격으로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많이 노하셨습니까.”
라스나티프가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내보인 상태로 나를 흘끗 보며 물었다.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 있는 그녀의 눈은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었는데 그 눈이 더 이상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 눈에서 보이는 건 비정상적인, 수단을 가리지 않은 목적의식이었다.
나는 한쪽 입술을 올려 비웃었다.
“노한다? 너 따위가 내가 화낼 만한 가치가 있나?”
“…….”
“너는 나에게 허가받지 않은 행동을 감히 저질렀고 그 꾸지람을 듣고 있을 뿐이다. 안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