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깜
영단이라니, 무엇이 지혜롭고 용기 있는 결단이란 말인가. 내 결혼식을 부정 타게 하고 피를 보고 정치를 끌어들이고 암살을 도모하는 것이?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각했다.
내 삼촌은 나에게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그리고 삼촌이 왕위에 올라 있는 한 실리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녀는 계약자로서 언제나 왕에게 혹사당해야 한다. 왕뿐이 아니라 세상이 그녀를 계속 갉아먹는 꼴을 계속 봐야 한다. 게다가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왕실의 홀에서 습격을 당했을 때 그녀가 나를 두고 왕에게 달려가던 장면을.
나를 구하는 것도 싫지만 다른 사람을 구하는 건 더 싫다.
나는 실리가 자신을 구하고 자신을 위하고 자신을 사랑하면 좋겠다. 왜 그녀가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계속 희생하고 위험에 처하게 해야 하는가. 아직도 마물에게 내팽개쳐진 실리가 공중에 붕 날아가던 그 모습이 생생한데.
나는 그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그 모습을 안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내가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면 나는….
“암살이 실패하면 하스트레드가 쫓아올 수도 있어.”
누군가가 마물을 왕실의 홀에 들여보내는 데 성공했었고 그 결과 그 사람은 지금 하스트레드의 추적을 받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가 붙잡히는 게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스트레드는 추적에 있어서는 일가견이 있는 집단이니까. 특히 실리는 ‘왕의 사냥개’라는 빈정거림이 섞인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내 지적에 라스나티프가 어두운 밤하늘의 초승달처럼 고요하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실패하지 않을 테지만 설사 실패한다고 해도 누군지는 알아내지 못할 겁니다.”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라스나티프를 바라보다 그녀의 책상에 있는 성냥개비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내 책상에도 성냥개비가 있다. 나는 그 성냥개비를 사용하여 대체로 곰방대에 불을 붙인다. 하지만 라스나티프가 곰방대를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신관. 금욕을 중시하는 신관이니 그녀가 이 성냥개비를 사용하는 건 아마 신께 바치는 초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토록 모든 물건은 사용하기에 따라 그 쓰임이 다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을 붙인다는 성냥의 본질이 달라지는가?
내 결혼식에 약간의 옵션을 더한다고 해도 그 결혼식의 본질이 달라지는가?
나도 이게 자기 합리화라는 건 알지만 실리의 나신을 얽고 있는 제어 각인의 문신을 생각하면 이런 합리화 따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결혼식을 피로 물들이는 짓 따위 얼마든지 해 주지. 실리를 자유롭게 할 수만 있다면.
“왕을 죽이면 그 자리엔 누가 오르지?”
나는 모르는 체하며 순진하게 물었다. 그러자 라스나티프가 웃음을 터뜨렸다.
“즉위에 관하여는 부디 이 미천한 자에게 맡겨 두십시오, 전하.”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과연 라스나티프를 믿어야 할까?
“그러지.”
환하게 웃으면서 생각했다. 라스나티프를 믿는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지.
***
결혼식, 날이 참 화창했다. 찬란한 빛이 쏟아지는 하늘과 그 아래 모여서 우리를 축복하는 인파를 마차 창밖으로 보면서 잠시 어린 시절 생각에 빠졌다. 처음 실리를 만났던 때, 그리고 실리를 처음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때.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세실리아 사리안이라는 여자의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다. 어쩌다가 모든 걸 가진 사람이 이토록 힘겹게 살게 되었을까. 고달프다 못해 자신이 그런 상태에 빠진 걸 인지할 수 없을 정도의 삶을 살게 된 이유가 뭘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곧 각오를 다지게 된다.
내 품 안에서 그녀는 언제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더는 아무것도 그녀를 옭아매는 게 없도록 그렇게 만들 것이다. 나는 그것을 위해 살아갈 것이다.
실리, 나는 너를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야.
나는 나를 위해 너를 자유롭게, 너를 행복하게, 네가 원하는 걸 모두 다 할 수 있게 만들 거야. 그게 내 인생의 목표야. 그리고….
히이이잉, 말이 갑자기 발작하듯이 난리를 쳤다. 마차가 뒤집어질 것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꺄아악. 나와 동석했던 로즈메리가 비명을 질렀고 테인이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내 호위로 붙었던 하스트레드의 기사가 나를 강하게 보호하듯 붙잡았다. 히이이이잉. 말이 비명을 질렀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꺄아아악, 아아아악. 밖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구경하는 사람들의 비명이었다. 무슨 일인지, 마차의 조그만 창으로는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가까스로 마차가 서자마자 하스트레드의 기사가 마차의 문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로즈, 뒤에 있어.”
내 말에 테인이 로즈를 자신의 뒤로 보냈다. 테인은 검을 뽑아 들었고 나는 마력을 손에 응집시켰다. 마력은 충분했지만 마력의 운용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집중력은 여러 가지 요소에 의해 기복이 심해지기 때문에 마탑에서는 늘 이 부분을 보강하려고 노력한다. 덕분에 마탑에서 자란 마법사들은 성격이 조금 메마르고 괴팍한 것으로 이름이 높다.
나처럼 왕립 학교를 다닌 경우에도 어느 정도 마법을 운용할 때는 냉정해지는 버릇을 들이게 된다. 테인의 경우는 원래 성격이 조금 냉철한 편이어서 괜찮았지만 로즈는 아니었다. 평소 성격이 활발하고 열정적인 로즈는 그만큼 겁도 많아서 지금도 테인의 뒤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딘가에서 찾아낸 단검을 한 손에 움켜쥔 채였다. 도움이 되겠다는 의지가 가상했다. 하지만 테인은 가차 없이 그녀의 손에서 단검을 빼앗았다.
“괜히 다치기나 하니까 잘 피하기만 해.”
테인의 말에 로즈가 눈물이 차오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테인은 드레스를 입어 노출된 로즈의 어깨를 가볍게 쓸어 주고는 천천히 마차 밖으로 나갔다. 나는 팔을 내밀어 로즈를 불렀다. 로즈가 내 품 안에서 내 옷자락을 잡은 채 떨면서 물었다.
“다, 다치는 사람은 없겠죠?”
그녀의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없을 거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거짓말을 하긴 싫어서 말하기 어려워졌다.
새삼 나의 어리석음에 비웃음이 났다. 이 결혼식을 기회로 암살을 진행하겠다고? 다른 사람은 가만히 있을 거라고 여긴 내가 얼마나 우스운가.
누가 나를 죽이려 한 걸까?
왕일 수도 왕세제일 수도 아니면 다른 인물일 수도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내게 살의를 가지고 있었다. 정치적 입지로 얻은 살의도 있었고 내가 살아온 행보로 덕은 살의도 있었다. 나는 도박으로 많은 재산을 일궜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잃었다. 나의 회계사 리살은 내게 경고했었다. 도박으로 재산을 일구면 많은 원한을 사게 된다고. 알고 있었지만 내게 오롯한 나의 것은 돈밖에 없었고 내게는 도박에 재능이 있었고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힘을 더 강하게 키워야 했다. 그러니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었다.
“이 나라의 악이 될 존재!”
누군가가 소리치는 게 들렸다. 아, 나의 행보로 인한 살의는 아니군. 나는 잠시 도박을 해 왔던 지난날을 반성할 뻔했던 걸 재빨리 그만두었다. 이 나라의 악이 된다고 운운하는 걸로 보건대 정치적인 문제인 것 같았다.
“여기 있어.”
아무래도 이쯤에서 나가 봐야겠다. 나는 로즈에게 보호막을 걸면서 그녀에게 속삭였다. 자신을 파랗게 감싸는 빛을 본 로즈가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인 얼굴로 물었다.
“다치지 않으실 거죠?”
오늘 로즈메리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만 해 댄다. 난처한 일이다. “노력할게.”라고 대답하면 그녀의 울음이 터져 버릴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웃는 것으로 대답을 때웠다.
마차 밖으로 나와서 보호막을 마차로 확대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싸움이 한참이었다. 테인도 하스트레드의 기사도 누군가와 검을 맞대고 있었다.
[바람이여, 깃들어라.]
두 사람에게 각각 더 빠르고 가볍게 움직일 수 있는 바람의 마법을 부여했다.
[갑옷이여, 감싸라.]
보이지 않는 갑옷을 두 사람에게 덧씌웠다.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지만 투명한 갑옷은 그들을 보호할 것이다. 움직이기가 더 편해지고 공격에 덜 피해를 입게 되자 싸움의 양상은 확실하게 달라졌다.
왕실의 홀은 석벽으로 이루어진 곳이었고 귀족들은 그런 경우에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훈련이 되어 있는 집단이라 피해가 적었지만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여기는 길거리였다. 주변은 평범한 가게들이었고 당연히 목조 건물이었다. 가게들이 내놓은 상품들과 가판대가 우수수 무너졌다. 마구잡이로 도망치던 인파 중 몇몇 사람들은 싸움에 휘말려 등에, 얼굴에, 팔에 칼을 맞았다. 비명이 속출했다.
솔루조웨 가문의 빅토리아처럼 수준 높은 회복술을 걸 수는 없지만 기본적인 회복술은 나도 걸어 줄 수 있는데 문제는 그 근처로 갈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사실 내가 인질이 될 위험을 생각한다면 로즈메리와 함께 보호막 안에 있는 게 가장 안전했다. 하지만 테인과 하스트레드의 기사가 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마법을 펼칠 수도 없는 보호막 안에서 그저 시간만 죽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갑자기 한쪽에서 비명이 커졌다. 그리고 메케한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고개를 들자 여관으로 보이는 삼층 건물의 지붕을 덮은 짚에 불화살이 꽂힌 게 보였다. 순식간에 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고 군중과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지침도 머릿속에서 까맣게 타들어 갔다.
[구름은 비를 몰고 올지어다.]
내 언령에 여관 건물 위로 먹구름이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비가 쏴아아 소리를 내며 내렸다. 폭우는 동그랗게, 여관과 그 근처로만 내렸다. 사람들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천천히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 게 느껴졌다. 내 몸에서 푸른색 빛이 흘러 나가고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나는 곧 타깃이 될 것이다. 알지만 그래도 내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무고하게 죽일 수는 없었다. 그럴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