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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58화 (57/94)

<☆58>깜

그런 상황에서 지금 배신자가 있다는 건.

곰방대를 입에 물며 생각했다. 아주 나쁜 건 아닐 수도 있다고.

이번에야말로 삼촌들을 확실히 치워 버릴 명분이 생기는 거라면 이쪽도 환영이다. 누군지 찾아낼 수만 있다면 거기서부터 타고 올라가 완전히 이 상속권 분쟁을 끝내 버리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하스트레드라는 이름은 하나밖에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만천하에 보여 주겠다.

단지, 걱정되는 건.

“왜?”

저기서 눈부신 금발을 하고 그보다 더 찬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저 남자다.

그는 나의 남편이자 나의 하나뿐인 가족이 될 것이고 나의 약점이 될 것이다. 그가 스스로를 잘 보호하면 좋겠지만 그는 조금 무모한 기질이 있다. 그게 무척 걱정스러웠다. 테인과 로즈메리를 붙여 놔도 그는 종종 이런 일탈을 일으키는데 누구를 옆에 두어야 안심할 수 있을까.

[  “실리.”  ]

문득 어느 어린 날이 떠올랐다.

[  “다시는 저딴 걸 갖고 싶다는 소리를 하지 마라. 알았니?”  ]

아버지의 싸늘한 목소리. 내 발치를 뒹굴던 인형. 아직도 눈에 선한 광경.

나는 어릴 때 인형을 갖고 싶어 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아버지께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었다. ‘인형이 갖고 싶어요.’ 그리고 나는 뺨을 맞았다. 짝, 소리와 함께 돌아가던 내 뺨. 눈에 불이 튀는 것 같던 아픔. 그 무엇보다도 어안이 벙벙한 그 기분.

아버지는 내게 실망하다 못해 배신감을 느낀 표정이셨다. 나는 내가 인형을 좀 가지고 싶다고 한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나는 또래 여자애들이 가지고 있는 인형 중 하나가 예뻐 보였다. 그게 가지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가질 수 없는 물건이 아니었고 그래서 당연히 가지고 싶다고 했는데 그 대가는 어린 시절의 내게 참혹하고 의아한 경험으로 돌아왔다.

저딴 것.

나는 그때 내 발치를 뒹굴던 인형을 계속 보고 있었다. 내가 저 인형을 가지고 싶어 했던 게 그리 잘못된 일이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때 나는 내가 가질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리? 왜 그래?”

저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는 약간 그 인형을 닮았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내 손에 닿으면 안 될 것처럼 보인다.

“아닙니다.”

나는 그냥 픽 웃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그의 손을 잡았고 이제는 우린 함께니까 과거 같은 건 생각할 필요가 없다.

♡  열 번째 뒷장. 결혼식  ♡

결혼식을 두 달 앞두고 실리는 무척 바빠졌다.

한가로운 나와는 다르게 그녀의 삶은 정신없이 흘러가서 나는 그녀의 얼굴 한 번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그녀는 신부였고 하스트레드의 주인이었고 왕의 계약자였다. 그녀에겐 많은 역할이 주어져 있었고 그녀는 평소의 그 메마른 웃음과 함께 모든 역할을 성실하게 해 나가는 중이었다. 나는 거기에 차마 나의 연인이라는 역할까지 부여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녀가 쓰러질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어느 날 어지럽다… 고 느낀 순간 완전히 눈앞이 새까매졌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바쁘게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어야 할 실리였다. 평소와는 달리 조금 엄격한 얼굴을 한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잔소리를 하려는 사람처럼 엄하게 눈매를 찌푸렸다가 결국은 다정하게 웃어 버렸다.

“괜찮으십니까?”

그녀의 손이 내 이마에 얹어져 있었다.

“괜… 찮냐니.”

내 목소리가 형편없이 쉬어 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바로잡았다. 그녀의 앞에서는 가능하면 건강하고 보기 좋은, 남자다운 모습만 보이고 싶었는데 지금 몰골이 엉망이었다. 잠옷 차림이었고 침대에 누워 있는 꼴. 그녀는 하스트레드의 단복을 입고 있어 반짝반짝 빛나고 위엄이 가득했다.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쓰러지, 아니야. 그냥 조금….”

“스트레스라고 하더군요.”

스트레스?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릴 뻔했다. 최근 나는 식사를 제대로 못 했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실리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와 만나고 싶었는데 만나면 그대로 키스해 버리고 침대로 끌고 가 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그녀에게 푹 빠져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나를 새기고 싶었다. 그녀가 나를 기억하는지 궁금했다. 그녀의 몸이 나를 또 받아들여 줄지 걱정스러웠다. 애가 닳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나를 만나 줄 수 없고 나는 두 달만 기다리면 되는 거였는데 그 두 달은 정말 끔찍하게 길었다. 결혼식을 보름 남겨 두자 잠이 안 오기 시작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너무 많았다. 눈 밑이 까매졌다고 로즈메리가 잔소리를 해 댔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기절하듯이 잠이 들면 꿈속에서 실리를 찾아 헤맸다. 그녀는 내 꿈에조차 나와 주지 않았다.

의사는 내 상태가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사혈을 하고 싶어 했지만 스틸라드에서 사혈이란 내가 죽어 갈 때가 아니면 못 하는 처치였다. 열세 살 때 사혈로 문제가 있었던 이후 로즈메리도 테인도 사혈이라면 이를 갈아서 감히 내게 사혈을 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약초사가 내게 잠을 위한 약을 보내 줬지만 이 약을 먹으면 아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여 아무 볼일도 보지 못한다는 게 더 문제였다. 낮에는 깨어 있어야 하는데 낮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꾸벅꾸벅 졸아야 했다. 공작으로서 그런 꼴을 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결국 약을 먹지 않은 채로 버티게 되었다.

그리고 약을 먹고 싶진 않았다. 나도 내가 어린애 같다는 건 알지만 이 모든 걸 오롯하게 느끼고 싶었다. 이 모든 건 실리로 인한 것이니까. 선물도 행운도 불행도 아픔도 그녀가 준 것이라고 생각하면 다 품고 싶었다. 아무것도 약 따위로 흐리고 싶지 않았다.

스트레스, 라.

나는 그런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나약한 것 같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겪고 있는지, 감당하고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여자 옆에 서야 하는데 내내 나약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음 주가 결혼식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실리가 걱정스러워했다. 그녀에게 걱정을 끼친 나 자신이 싫으면서도 그녀를 보게 된 지금 이 순간은 행복했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당당했다. 늘씬한 몸을 감싼 기사단복. 나는 그 안에 얌전히 잠겨 있을 몸을 떠올렸다. 제어 문신이 새겨져 있는 새하얀 몸이 내게 얽혀 오던 순간이 떠올라 아래가 지끈했다. 서진 않았지만 머릿속은 이미 뜨겁다 못해 김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전하?”

내 이마에 있던 그녀의 손이 내 뺨으로 내려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조금 뒤로 뺄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그녀를 그대로 끌어당겨 내 침대에 눕힐 것 같았다. 왜 하필 나는 지금 침대에 있는지.

고작 일주일이다. 일주일인데, 사실은 참기가 어렵다. 한순간 한순간이 고비처럼 어렵고, 그녀를 원한다는 말을 삼키는 게 너무나 힘겹다. 목에 뜨거운 걸린 뜨거운 고백이 내 장기를 모조리 태워 버릴 것 같아서.

그럼에도 내가 참는 건 당신이 곤란하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당신이 바쁘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일주일 뒤엔 나는 당신의 것이, 당신은 나의 것이 된다. 우리는 이 생을 완전히 함께하는 거야. 아무도 감히 내 앞에서 당신에게 나보다 더 중요한 존재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된다. 고작 일주일만 참으면.

내가 그녀의 손을 피하자 그녀가 나를 의아한 듯 내려다보았다. 왜 피하느냐는 얼굴에는 아주 순수한 의문뿐이었다. 왜냐고? 나는 그 순간 쓴웃음이 나왔다. 정말 이유를 몰라?

“으, 읍.”

내게 끌려온 실리가 나에게 입맞춤을 당하며 작게 신음했다. 그녀의 몸이 희미하게 떨리는 게 내 팔 안에서 느껴졌다. 그녀가 느낄 때의 버릇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은 세상에 나 하나뿐이겠지.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그녀 혼자 알고 있듯이.

머리가 타기 시작했다. 안 돼. 머리에 찬물을 들이부어 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 왔다. 그녀를 가지기 전에는 참을 수 있는 순간순간도 존재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안다. 그녀의 맛을, 그녀의 체향을, 그녀의 온도를, 그녀가 느끼는 목소리를. 나만이 가진 것들에 대한 향유는 너무 달고 지나치게 짧아서 꿈속에 두고 온 것처럼 아득하고 그리웠다.

그리고 속상함이 머리를 쳐들었다. 당신은 나를 가지고 싶지 않아? 나를 원하지 않아? 나만 이런 감정이야? 당신은 왜 또 그렇게 말갛고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어.

그녀의 가슴을 거칠게 움켜쥐어 보았다. 그녀가 진저리를 치며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 하고 몸을 떨었다.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 순간 확 미쳤다. 내가 거칠게 굴어도, 그녀는 받아들인다. 좋아한다. 귀에서 윙윙 소리가 났다. 머리가 핑 돌았다.

그녀를 눕히자 얌전히 내 손길에 따라 누웠다. 그녀의 몸을 반쯤 내 침대에 눕힌 상태로 나는 실리의 몸 위에 올랐다.

“바빠?”

그녀의 옷을 벗기며 물었다. 제발 바쁘다고 하지 마. 마음으로 빌면서.

“…아.”

그녀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바쁜 것 같기도 하고 조금쯤은 시간을 낼 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쯤? 아니, 나는 곤란해. 나는 세상에 너를 내줄 수가 없어. 나는 이 목마름을 채우려면 한참이 걸려. 너는 오랫동안 나를 혼자 뒀잖아.

“리.”

“…….”

“내 마음대로 생각할 거야.”

그녀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나를 조금 기쁘게 했다. 바쁘지만, 바쁘다고 말하기 싫은 듯해서. 나와 이러는 게 좋은 거 같아 마음이 들떴다. 착하다는 듯이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지다가 아까 그녀가 좋아했던 게 생각나 유두 부분을 잡고 비틀어 주었다. 그녀가 몸을 심하게 떨었다.

그녀는 좋아해.

내가 거친 걸, 그녀가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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