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깜
그가 절정을 맞는 순간을 나는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몸을 부르르 떨어서 사정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안쪽에서 그의 성기가 움찔거리며 생명력을 토해 내고 있는 것 또한 선명하게 느껴졌다. 부르르 떠는 성기의 움직임. 한순간 멈춰진 그의 몸. 우리의 시선이 맞닿자 그는 웃었다. 한 치의 그늘도 없는 환한 웃음을 머금고 그가 말했다.
“사랑해.”
이게 사랑일까.
“아이를 갖자. 아니, 아이가 없어도 좋아. 우리는 우리 둘이서, 함께하자. 영원히.”
치기 어린 영원의 말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영원. 그런 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나이인데도 그 말이 정말로 기뻤다. 한아름 꽃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웃었다. 하지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영원이라는 게 있을까. 당신은 이르시아스고 나를 하스트레드다. 우리는 반드시 이익 상충 문제가 생길 것이고 그때도 우리가 함께하는 선택지를 찾아낼 수 있을까.
아니,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나는 차마 그에게 그러자고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팔을 들어 내 위에 있는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당겨서 내 위에 힘을 빼고 엎드리게 했다. 내게 무게를 실지 않으려는 듯이 팔에 힘을 주고 있던 그가 천천히 팔에 힘을 빼고 내게 엎드려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를 힘을 뺀 팔로 끌어안았다.
대답은 할 수 없어도 마주 안을 수는 있으니까.
일단은 여기서 만족하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난 그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내 말에 그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아침 식사 시간, 나는 그를 데리러 왔다. 그는 여전히 나신이었다. 금발의 미남. 아직 소년미가 사라지지 않은 그의 몸에 하얀 시트가 덮여 있었다. 내가 아침에 나가면서 덮어 준 것이다.
“일찍… 일어났네.”
그가 나를 보며 꽃이 흐드러지는 것 같은 만개한 미소로 웃어 보였다. 그는 세상의 행복을 다 끌어모은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나는 내 얼굴이 어떨까 생각했다. 아마, 평소와 같겠지.
조금 다르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이 좀 이릅니다. 식사가 준비되었는데 같이 드실 수 있으실지 여쭤 볼 겸 왔습니다.”
“아, 당연하지.”
“그럼 테인을 들여보내겠습니다. 테인과 폴이 이른 아침에 전하를 모시러 왔더군요.”
내 말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부른 거겠지. 테인과 폴이 내가 어디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온단 말이야.”
그는 별생각 없이 말했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내가 그를 감시하고 있는 것에 대한 비난처럼 들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부분이었던 것이, 나는 정말로 감시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연대 책임을 지고 돌보는 대상이었다. 그리고 내 어깨에는 하스트레드가 걸려 있다. 그러니 나로서는 그를 감시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내 입장이지 그의 입장은 아니니까.
“식당에서 뵙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멀어지려는데 그가 내게 손짓했다.
“이리 와, 리.”
리? 실리가 아니라 이제는 ‘리’인가? 나는 순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는 내가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를 빼앗으며 내 입술에 키스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닿을 뿐이었던 키스가 점차 깊어졌다. 혀는 농후하게 내 혀를 얽었다. 새벽녘까지 몸을 겹쳤던 터라 키스에 둘 다 조금 익숙해져 있었다. 더 이상은 치아가 닿거나 하는 불상사가 없이 자연스럽게 키스가 이어졌다.
“식당에서 만나.”
그가 속삭였다. 목소리에 관능이 묻어 나왔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그는 조금 변해 있었다. 개화한다는 표현을 남자에게도 쓸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그대로인데 그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식당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창밖을 봤다. 기분 탓일까. 아니면 어제 비가 많이 내렸던 덕분일까. 공기가 맑고 상쾌했다. 세상은 찬란하고 환한 것 같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들이 빛을 받아 보석처럼 방울방울 빛났다.
부끄럽고, 이상하고, 도망가고 싶으면서, 또 끌어당기고 싶은.
그런 이상한 감정들에게 파묻혔던 밤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사랑스러웠다. 내가 가졌던 그 어느 밤보다 아름다웠다. 어린 시절 처음 받았던 검을 품에 안았을 때 느꼈던 그 벅찬 감정과 거의 비슷했다.
사랑스럽다.
네가 주는 모든 것과 너 자체가.
그러나 그게 사랑인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어, 나는.
“주군.”
누가 불러서 뒤를 돌아보니 리온이 서 있었다. 평소의 능글맞은 얼굴과는 달리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 마석 말입니다.”
리온은 나를 데리고 서재로 갈 시간도 없는 사람처럼 바로 용건을 꺼냈다. 나 또한 서재로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터라 복도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서재에는 이든과 내 옷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을 게 틀림없었다. 우리는 중간에 내 방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곳에는 우리의 자취가 남아 있을 테고 나는 나의 부하에게 그런 사적인 영역을 보여 주고 싶진 않았다.
“솔루조웨 양께서 마탑에서 서신을 급히 보내오셨는데 마석의 출처는….”
왕실의 홀에서 우리를 습격했던 마물의 몸에서 꺼낸 돌은 마석이었다. 마물을 조종하기 위한 매개체. 나는 그걸 빅토리아에게 맡겼고 빅토리아는 아무도 모르게 마탑으로 가서 자신의 스승과 함께 마석의 출처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리온은 지금 그 결과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중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누구의 것인지까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리온은 그렇게 말하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매우 유감스럽다는 얼굴로.
“하스트레드에서 나온 물건이라고 합니다.”
하스트레드는 결속력이 뛰어난 집단이다. 대체로 우리 안에서 배신자는 나오지 않는다. 이건 대부분의 경우 장점이 된다. 그러나 가끔은 단점이 되기도 하는데 배신자가 있는 경우 찾기가 너무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너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를 믿을 수밖에 없고 또 믿어 왔기 때문이다.
팔다리 중 무엇이 나를 배신하고 있는가.
몇몇의 얼굴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간자 행세를 한 적이 있고 누군가는 나를 하스트레드의 주인으로서 인정하기 싫어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어떤 행동의 이력이지, 그들이 진심으로 나를 배신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이건 반역이며, 계약의 위반. 하스트레드의 존립을 완전히 뒤흔드는 일이며 완벽한 배신행위이다. 그걸 모르는 하스트레드 사람은 없다.
누구인가.
어떻게 찾아내야 하는가.
“아는 사람은?”
“현재는 저, 솔루조웨가의 아가씨, 그리고 그분의 스승님 정도입니다.”
나와 리온의 시선이 부딪혔다. 입을 막아야 할까? 빅토이라의 입을 막기 위한 극단적인 조치부터 온건적인 조치까지 머릿속에 지나갔다. 빅토리아를 죽이는 건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내게는 하스트레드가 더 중요하다.
“일단은 두고 보지.”
내 말에 리온이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식당에 앉아 커피를 마시려는데 이든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는 나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내 입술에서 곰방대를 빼앗아 식탁에 내려놓고 대신에 자신의 입술을 댔다. 키스는 노골적이고 질척했다. 누가 보든 말든 그는 상관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나와 혀를 얽었다. 그가 흥분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 머리를 뒤로 조금 빼자 그가 아쉽다는 듯이 쫓아왔다. 하지만 내가 완고하게 피하자 무리하게 요구하진 않았다.
“리, 커피만 마시면 어떡해. 식사를 해야지.”
그는 내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고는 내 옆, 코너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대각선으로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다. 사실 귀족 사회의 식사 예절에서는 꽤 어긋난 것이지만 상관없었다. 우린 그냥 우리였으니까.
하스트레드의 누군가가 당신과 왕을 죽이려 했다.
그 말이 입 속에서 맴돌았다. 내가 사과할 일이나 현재로서는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었다. 이건 보안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다. 누구인지 잡아내려면 내가 알아챘다는 걸 알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럼 범인은 바로 숨어 버릴 것이다.
이든의 눈빛이 달았다. 그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어여쁘고 귀한 걸 보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이런 태도를 숨길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리고 숨길 필요가 없는 것이 무척 행복하고 기쁘다는 듯이.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이 무척 기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해서 부담스러웠다.
그는 기어코 오믈렛을 가져오라고 하여 내 앞에 내려놓았다. 뭐라도 먹으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염려가 가득했다. 마치 그가 나를 밤중에 괴롭히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그의 손을 가볍게 도닥거리고 오믈렛을 뒤적이며 생각했다.
하스트레드의 배신자는 삼촌들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삼촌들은 아직도 하스트레드를 갖는 걸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그들의 욕심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가는 하스트레드를 보면서 더욱 비대해지고 있다. 나는 하스트레드의 정당한 주인이 되었고 왕조차 나를 인정하여 계약자로서 받아들였지만 그들은 거기에 여전히 반발하고 있다. 삼촌들은 각자의 기사를 데리고 하스트레드 영지를 영원히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그중에는 아예 우리가 하스트레드가 아니라며 새로운 하스트레드를 만든 이도 있었다. 표면적 이유는 하나, 내가 여자라는 것인데 물론 이게 잘 먹히는 명분은 아니었다. 나는 정당한 후계자였고 심지어 검사였으니까. 하지만 몇몇 고리타분한 원리주의자들, 그리고 야심가들에게는 그들의 명분 혹은 그들이 하는 미래에 대한 장밋빛 약속들이 먹혔고 그들은 삼촌들과 같이 하스트레드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건 별문제가 안 되었다. 아버지의 형제를 공격한다는 볼품 사나운 상황만 아니었다면 내가 바로 밟아 버렸을 정도로 우리의 전력 차이는 코끼리와 개미의 수준으로 컸으니까. 삼촌들도 내가 아버지의 형제를 공격하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해서 지금 뻗대고 있는 것일 뿐이고, 실제로 모든 걸 무시하고 공격해도 괜찮을 정도의 빌미는 결코 만들어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