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깜
“전하.”
“나는 오늘 최악의 이야기를 들었어.”
“……?”
“그리고 최악인 이야기는 끝도 나지 않았어. 나는 계속 최악인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또 마주해야 할 거야. 오늘 나는 너무 힘들었고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나한테는 너밖에 없으니까. 나한테는 네가 전부니까. 그런데 너는!”
너는 나보다 더 가여워서.
자신을 가여워하는 방법조차 배우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 되어 버려서. 그걸 보니까 나는 목놓아 울고 싶었다.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우는 건 어린애 같다. 아는데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네가 가여워. 이건 동정일까? 사람들은 말하겠지. 세실리아 사리안은 동정을 받을 여자가 아니라고. 그녀는 경의, 찬탄, 존경을 받을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가여워.
“전하.”
그녀는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내 눈물을 보다가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애 취급을 받게 되리라는 건 안다. 하지만 실리, 알고 있어? 사실은 내가 당신보다 더 제대로 큰 거야. 너는 어딘가가 완전히 크지 못했다고. 성장은커녕 아예 말살되었단 말이야. 누가 너의 안에 있는 그 작은 것들을 싹도 못 틔우게 밟아 버린 건데.
눈물이 계속 떨어졌다. 실리를 이렇게 만든 자가 누굴지 상상해 보면 더욱 슬퍼졌다. 그녀는 모든 것을 주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바쳤다. 하지만 분명 그녀를 이렇게 만든 건 그녀의 주변 사람일 것이다. 애초에 그렇지 않다면 그녀를 누가 이렇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나처럼 한밤중에 납치라도 할 건가?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때 실리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이마가 닿아서 당황했다. 키스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아마 키스를 하게 된다면 이 정도로 가까워야겠지.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실리가 속삭였다.
“울지 마세요.”
상냥한 목소리.
“저는 괜찮아요.”
뭐가 괜찮은데? 도대체 너는 뭐가 괜찮….
“저한테는 전하가 계시니까, 저는 분명 행운아일 겁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조금 떨어뜨려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웃고 있는 게 보였다. 평소와는 달리 그림자가 없는 깨끗한 웃음이었다. 고작 나 하나만을 가진 것으로 그녀는 만족하고 있었다. 그게 기쁘고 그게 슬퍼서 나는.
그게 너무 벅차고 너무 절망스러워서.
눈을 감고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댔다. 눈물이 떨어져 우리의 겹쳐진 입술에 고였다. 눈물의 맛이 나는 키스가, 내 인생의 첫 키스였다.
그녀의 몸이 멈칫했다. 그녀는 당황했고 나를 밀어내야 할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울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나를 쫓아냈을지도. 하지만 그녀는 나를 물리치는 대신 가만히 있었다. 입술을 열어 주진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나를 거부하고 있지도 않았다.
내 차가운 입술이 그녀와 닿아서 천천히 뜨거워지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와의 키스를 상상한 적이 있었다…. 여러 번, 꿈속에서까지. 하지만 꿈속에서 그렸던 것에 비하면 실리의 입술은 뜨겁지 않았고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달콤했다. 더, 훨씬 더, 현실감이 느껴지는 반응에 등골이 오싹했다.
이렇게 슬픈데도 어딘가에 정욕의 불씨는 남아 있었나 보다. 허리 아래가 단단해지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실리의 몸 냄새가 났다. 꽃향기. 검과 의무와 강인함과 체념, 그 마른 사막과 같은 그녀에게서 나는 싱그러운 꽃향기.
혀를 내밀어서 조금 그녀의 입술을 핥아 보았다. 늘 달콤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입술에서는 희미하게 연초의 쌉싸름한 맛이 났다. 그런데도 머리가 뜨겁고 황홀하게 녹아내렸다. 나도 모르게 다리 사이에 힘이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곳이 단단하게 일어선 느낌이 선명했다.
짐승 같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피하기는커녕 더 닿고 싶었다. 그녀에게 나를 보여 주는 건 창피하다 못해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와 서로의 밑바닥을 공유하고 싶었다. 나신으로 엉켜서, 타인에게는 보여 줄 수 없는 곳을 상처 입은 짐승들이 그러듯 핥아 주고 싶었다.
“전… 하.”
그녀는 고개를 뒤로 빼려 했다. 하지만 내 얼굴이 쫓아가자 결국 멈추었다. 내가 약혼자라서? 두 달 뒤에는 남편이 될 남자라서? 그런 시시한 이유여도 상관없었다. 나만이 그녀의 입술에 닿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할짝거리면서 그녀의 몸을 뒤로 밀었다. 그녀가 뒤로 한 발짝씩 밀려났다. 그녀의 아랫입술을 진득하게 빨아올렸다. 맛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살짝 이를 박아 보았다. 그녀가 몸을 떨었다.
“실리.”
숨을 헐떡이며 코끝이 닿는 거리에서 그녀를 부르자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당혹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는 나를 읽으려 하고 있었다. 내 상태가 어떤지 알아채고 거기에 맞는 대응을 하고 싶어 하는 그녀는, 그러나 내가 어떤 상황인지 상상도 못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실리, 나는 너를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데, 그래서 속이 상해 미치겠는데.
지금 너를 울리고 싶어서 돌아 버리겠어.
“실리.”
한 번 더 부르자 실리가 “예, 전하.”라고 대답했다. 어딘가 껄끄러워하는 목소리로.
“…예.”
“네 남편이 되어도 돼?”
지금.
내 속삭임에 그녀는 아무 말도 안 하다가 아주 가늘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예.”
빗소리가 더 이상 절망스럽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세상에 그저 우리 둘뿐이라는 표식처럼 기꺼웠다.
♡ 열 번째 앞장. 미지의 너 ♡
이든이 나를 원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남자로서 나를 원한다는 건 낯선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행위에 직접적으로 닿는다는 건 더욱 낯설었다.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게 그런 일을 행하고자 한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그들 모두를 적당한 선에서 타일러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해 왔으니까.
그는 울었고 격정에 휩싸여 나를 원했다. 비에 흠뻑 젖은 상태로 고통에 차서 내게 달려온 그는 나의 문신을 보고 절망스러워했다. 그는 나를 보고 안타까워서 울었다. 그의 드높은 자존심을 생각하면 드문 일이었다.
내가 나를 학대한다고 생각하는 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것 같았지만 나는 그걸 학대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스트레드의 주인이 되는건 영광된 일이고 나는 그 길을 걷는 걸 싫어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너무 슬퍼했다.
그리고 그건 내게 기쁨을 줬다.
나는 내 몸에 새겨진 문신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고 그건 그저 피부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 문신이 아파서 울었고 우리의 입술 사이에서는 그의 눈물 맛이 났다. 그 눈물 맛이 달아서 나는 도저히 그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서재는 어두웠다. 켜 놓은 초의 불빛들이 일렁이는 주황색 공간에서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잠옷의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그의 하얀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라 있었다. 정염의 표식조차 그에게는 참 어여쁜 것으로 나타났다.
단추를 하나 풀고서 그는 숨을 가늘게 쉬었다. 무언가를 참는 사람처럼.
나는 옌선에 돌아와 들었던 이르시아스 대공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도 타인에게 냉담해서 가끔 베푸는 호의에도 귀족 아가씨들이 망상과도 같은 기대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호의란 아주 별것 아닌 것이어서, 기껏해야 떨어진 물건을 주워 주었다든가 같은 상점에 있었다는 이유로 계산을 대신해 주었다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이든에게는 티가 나지도 않을 그런 일들인데, 그런 일조차 너무 드물어서 어린 숙녀들은 이든이 그런 일을 해 주면 내게 마음이 있나, 하고 기대한다고들 했다.
그런 걸 생각하기엔 호의가 좀 보잘것없는 데다 일회성이었다는 게 문제지만 나는 어린 아가씨들이 그런 기대를 갖고 싶어 하는 심리는 알 수 있었다. 이든은 정말 아름답게 컸으니까. 그는 남자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름다웠다. 유약하다기보다는 냉철한 미모에 사람들은 늘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고, 그가 지나가면 종종 뒤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눈을 떼기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례라는 걸 알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이 그에게는 있었다.
거기에 이르시아스 대공이라는 작위. 이든이라는 고귀한 이름과 태생. 더 고결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 그의 엄청난 자산.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녀들에게는 이든을 단 하나뿐인 왕자님으로 보이게 했다. 이든은 수많은 연서와 고백을 받으며 성장했다.
나는 그가 약간의 연애를 하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리고, 우리는 사실 연대 책임으로 묶인 관계니까. 하지만 고백을 받은 그의 태도는 좋게 말하면 정석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상대를 경멸하는 수준에 가까웠다. ‘나는 약혼을 했고 그건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건데 그런 사람에게 고백을 한다는 건 네 도덕심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고해 성사를 하러 가는 걸 권하겠어.’라는 말을 들은 어느 아가씨가 너무 우는 바람에 사교계 데뷔를 망쳤다는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였다.
[ “네 남편이 되도 돼? …지금.” ]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의 푸른 눈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가 낯설고 좀 이상했다. 그럼에도 내치지 않은 것은.
내가 가족을 만든다면 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래, 그런 건 너 아닌 다른 사람과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든의 입술이 다가왔을 때 나는 조그맣게, 입술을 벌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호응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든은 매우 흥분했다. 그는 나를 서재의 소파에 눕히고는 내 위에 올라탔다. 그의 몸은 여전히 서늘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서늘하지 않았기에 나는 그의 몸이 차갑다는 게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