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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54화 (53/94)

<♡54>깜

삼촌의 얼굴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나도 모르게 주먹을 내리쳤다. 쾅, 쾅, 쾅.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서재를 울렸다. 주먹이 부서질 것 같았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주먹이 아파서, 그래서 나는 견딜 수가 없는 걸 거다. 그 때문에 나는 숨을 쉴 수가 없는 걸 거다. 그래서 나는….

“전하!”

라스나티프가 놀라 다가오려 한 순간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무엇이 폭발했는지는 모르겠다. 단지 그녀가 나를 치료하려 한 것에 화가 났다. 내 부모님은 어둠 저편에 계시잖아. 살해당해서, 살해당해서…! 고작, 아들이라는 새끼 하나 때문에!

“나가!”

마음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이 광기인지 분노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가슴속에 있던 뭔가가 폭발하여 터져 버렸다. 내가 고함을 지르자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문 밖에서 났다. 내가 문을 잠그고 있었기 때문에 바깥쪽에서는 안절부절못하는 채로 “전하?”라고 나를 부르기만 했다. 로즈메리의 목소리였다. 테인도 아마 옆에 있겠지. 나를 달래기 위해서 내가 누이처럼 여기는 로즈메리를 앞세웠을 것이다. 로즈메리 또한 자신이 나섰을 것이고.

“전하, 문 좀 열어 보셔요.”

로즈메리가 나를 다급하게 달랬다.

“전하, 전하. 로즈여요, 전하. 전하, 무슨 일이신지…. 전하, 문을 조금만 열어 주셔요.”

달래는 건 라스나티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전하, 보여 주십시오. 제가 속히 치료를.” 하고 말을 꺼냈다. 그 순간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나를 치료한다고? 부모를 둘 다 지옥으로 밀어 버린 자식새끼를?!

“나가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생각했는데 내 입에서 나온 건 비명처럼 날카롭고 연약했다. 내 귀로 듣는 것이 비참했다. 라스나티프는 문 밖에서 문을 부술 것처럼 두드리고 있는 소리와 나가라고 비명을 지르는 나 사이에 서서 당혹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그들이 기다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눈물이 났다. 분해서도 억울해서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으므로 어떻게 생각하든 내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하지만 실리.

왜 나는 이 모양일까. 나는 내가 컸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조금만 방심하면, 나에게 주어진 곳에서 조금만 더 팔을 뻗으면 내가 어디 있는지 운명은 나에게 잔인한 가르침을 줘. 나는 그 열한 살에서, 당신을 처음 만난 그 비루먹은 때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나 봐.

“전하!”

문이 열리고 로즈메리가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내 손을 보자마자 하녀를 향해 “선생님을 불러!”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수라장 속에서 나는 로즈메리에게 순순히 손을 내어 주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테인이 라스나티프를 적의의 눈길로 보고 있었다. 그는 아마 그녀가 나에게 뭔가 해코지를 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전하, 물러가겠습니다.”

라스나티프는 적의의 눈길이 부담스러운지 아니면 이만 물러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내게 인사를 하고는 빠른 속도로 내 서재에서 벗어났다. 아무도 그녀를 잡으려 하지 않으면서도 모두가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짓을 했기에 내가 이러는지 알고 싶고, 알기만 한다면 그녀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눈들이었다.

라스나티프가 얼마나 초라하게 변장하고 나타났는지, 그녀의 원래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은 물론 그녀를 몇 번 본 로즈메리나 테인조차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그녀가 빠져나가는 걸 뒤에서 지켜보다 내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하녀가 가져온 젖은 수건을 받은 로즈메리가 내 손을 조심조심 닦고 있었다. 피투성이의 손을 보고 있자니 한심한 짓을 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하지만 후회가 되지도 않았고 딱히 이성이 돌아오지도 않았다. 사실 나는 가능하다면 나를 죽이고 싶었다.

그리고 실리가 보고 싶었다.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나 자신에게 혐오감이 들었다. 그녀에게 기대는 모든 것들을 그토록 경멸했으면서 이 순간 그녀가 그리워서, 보고 싶어서, 필요해서 견딜 수 없어지는 내 자신이 싫었다. 딱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은데도 그게 결국 나 자신이라서, 이렇게 못나고 한심하지만 그게 ‘나’라서.

“전하?”

내 손을 치료해 주던 로즈메리에게서 손을 거두었다.

“다녀올게.”

“전하! 곧 의사가 올 겁니다!”

테인이 매우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내가 죽기라도 할 것 같았는지 얼굴이 하얗다 못해 누렇게 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실리를 못 보면 죽을 것 같았다. 손 따위는 내일부터 못 써도 좋다. 하지만 실리를 못 보면 심장을 못 쓰게 될 것 같은 심정이었다.

“모두 여기 있어. 나는 말을 타고 다녀올 테니.”

말을 타는 걸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호위 없이 돌아다니는 것도 자제하던 내가 충동적으로 꺼낸 말에 모두가 염려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지 말아 주기를, 눈으로 애원하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나는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실리만큼 소중하진 않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 나름대로 나를 무척 생각해 주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

하지만 머리가 텅 비어 버렸다. 실리가 보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어서.

겨우 쥐어 짜낸 말은.

“다녀올게.”

고작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하늘은 어둡고 비가 내렸다. 폭우 속에서 말을 달렸다. 말을 타는 걸 별로 즐기지 않는데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미칠 것 같아서 달려야 했다. 당장 찾아가 실리를 만나야 했다.

오랜만에 도착한 이스트럼은 세월이 흐르지 않은 것같이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 똑같아서 나는 약간 현기증이 났다.

“대공 전하.”

이스트럼 안으로 들어가자 시종들이 내게 타월을 건넸다. 내 옷을 벗길 수가 없는 그들로서는 내 젖은 옷을 계속 수건으로 닦아 말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곧 실리가 뛰어왔다. 그녀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자려던 때였는지 아니면 이미 잠자리에 든 뒤였는지 실리는 잠옷 차림이었다. 헐렁한 잠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자. 그녀는 그저 평범한 귀족가의 여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 시선은 그녀의 팔에 꽂혔다. 그녀의 잠옷은 반팔이었고 드러난 하얀 팔에는 어지러운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신관들이나 할 법한 문신을 그녀가 왜 하고 있는 걸까. 저건 아주 아프다고 들었는데.

실리는 나를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문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왜 당신이 이런 문신을 하고 있어? 이런 건 신에게 귀의하는 사람들이 하는 거잖아. 아주 아파서, 그들이 수행을 위해서 하는 거잖아. 내 얼굴을 본 실리가 슬쩍 소매를 내렸다. 반팔 소매를 내려 봐야 그녀의 팔은 가려지지 않았다. 내가 계속해서 바라보자 실리가 입을 열었다.

“그냥….”

“그냥?”

내 젖은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후, 실리는 한숨을 쉬며 시종에게서 수건을 받아 내 머리를 직접 닦아 주었다. 우리는 키 차이가 많이 나서 그녀는 팔을 한껏 뻗어야 했다. 흠뻑 젖은 수건을 교환한 뒤 새 수건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내 손을 잡은 채 나를 어디론가로 이끌었다.

그냥.

나는 그 뒷말을 기다리며 얌전히 걸었다. 내 손을 잡은 그녀의 손은 희고 조금 굳은살이 박여 있고 작았다. 이렇게 작은 손. 나는 이 손에서 검이 나타나던 형상을 떠올리고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지? 이렇게 작은 손을 가진 여자에게 무슨 위로를 받겠다고 여길 온 거지.

그녀는 나를 서재로 이끌었다. 그리고 내가 젖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파에 앉혔다. 수건을 한 아름 가져오게 한 뒤 시종들을 모두 물린 그녀는 나와 단둘이 서재에 남아 나를 직접 닦아 주기 시작했다. 내 앞에 서 있는 그녀의 잠옷 안쪽으로 문신들이 보였다. 온몸을 얽고 있는 여러 주문 형태들. 나는 그 주문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신전에서 직접 새긴 것이 분명한 주문들은 대체로 힘을 누르는 형태의 것들이었다.

“실리, 난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야.”

내 말에 실리가 한숨을 쉬었다.

“그냥, 어쩌다 보니깐.”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나는 일어서서 그녀의 팔을 잡아 돌려세웠다. 갑자기 힘을 쓴 나 때문에 그녀는 부지불식간에 내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옷을 늘려서 옷 안쪽에 숨어 있는 등 부분을 확인했다. 드레스를 입으면 노출되지 않을 부분들에도 빼곡히 여러 문양과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더럽게 아팠을 것이고.

스스로는 절대 새기지 못하며.

자신의 힘을 제어하는 주문을 그녀는 온몸에 새기고 있었다.

“어떤 새끼가 이런 짓을 했어?”

누구야?

내 질문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곤란한 사람처럼 몇 번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누구든 이미 일은 벌어졌고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저런 주문들을 새기는 건 살이 타는 듯이 아프다. 나는 마법사지만 내 몸에 어떤 주문도 새기지 않았다. 그런데 심지어 자신의 힘을 증폭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어하기 위해서 새긴 주문들이 빼곡한데 그게 괜찮다고?

“당신은 늘 거짓말만 해.”

내 말에 실리가 고개를 숙였다. 할 말이 곤궁한 것처럼.

“당신은 늘 남만 생각해.”

“딱히 그렇지는….”

나는 다시 그녀를 돌려세웠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내 손길에는 나도 모르게 힘이 실렸고, 그 탓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자 속이 뒤집혔다. 무슨 일 있어? 마음 상해하지 마. 그렇게 말하고 있는 얼굴.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내 팔을 어색하게 도닥거렸다. 나는 나를 도닥거리는 팔을 잡았다. 양손을 맞잡았다.

“당신은 당신을 학대해.”

“…….”

“도대체 그 사람들의 어디가 너보다 더 중요한 건데?”

속이 미어져 미칠 것 같다. 내 어머니는 독살당했고 실리는 너무 학대당해서 자신이 망가졌다는 것도 모른다. 나를 낳은 사람은 살해당했고 나를 구한 사람은 무너졌다. 나는 너밖에 없는데 너는 언제나 너를 갉아먹지.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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