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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53화 (52/94)

<♡53>깜

나는 도박을 한 판 쉬고 일어나 뒷문으로 향했다. 거기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나오자 상대는 기다리고는 있었지만 진짜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 그는 오직 나를 위해 이곳에 서 있는 사람이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는 계속 이곳에 서 있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이 역할은 사람도 몇 번 바뀌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왕립 학교의 정원 으슥한 곳에서, 스틸라드의 안쪽 정자에서, 이스트럼의 숲 입구에서, 정체 모를 누군가는 나를 계속 기다려 왔다.

열두 살 무렵에 누군가가 내게 쪽지를 보내왔다.

[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습니다.  ]

그리고 장소가 적혀 있었다. 나는 비슷한 쪽지에 응했다가 호된 꼴을 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거처를 옮길 때마다 그 쪽지는 누군가를 통해서 내 손에 들어왔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 메시지는 동일했다.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오늘이 되어서야 그들은 나를 만난 것이다.

누구인지는 모른다. 무슨 일인지도 모른다. 함정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한쪽 손에 마력을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언제든지 마력을 뿜어내어 공격 마법을 시전할 수 있도록. 그리고 내 뒤에서 나를 습격하는 이는 없는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상태였다.

“전하, 모시겠습니다.”

움직여야 할까.

이 짧은 시간 나는 엄청나게 고민했다. 여기서 같이 가도 될까. 만약 나를 해하려는 사람이었다면 몇 년을 그냥 두고만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릴 때를 떠올렸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곳에 나갔던가. 그때도 나는 분명히 도박을 건다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왜 도박에 강해졌는가.

이기지 못할 도박에서는 빨리 패를 던져 버리기 때문이다.

“주인에게 전해.”

“…….”

“오늘 밤 스틸라드로 오라고.”

내 영역이 아닌 곳에서 만날 수는 없다. 내 안전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나는 실리를 떠올렸다. 내가 너무나 애타게 갖고 싶어 하는 그녀를. 그리고 그런 그녀가 몇 번이나 살려 준 내 목숨을. 내 목숨은 도박판의 칩 따위가 아니다. 절대 걸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하오나.”

남자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내가 뒷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자 남자가 당혹스러운지 나를 붙잡으려 했다. 그 순간 나는 손에 집중하고 있던 마력을 그대로 남자에게 쏘아 버렸다. 작은 벼락이 남자의 몸으로 떨어졌고 남자가 아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함부로 손대지 마라.”

내 경고에 남자가 “소, 송구합니다.”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한 팔을 붙잡고 연신 주무르는 꼴이 어지간히 아픈 듯했지만 자비를 베풀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대로 도박장으로 들어와 잠시 눈을 감았다. 빠르게 뛰던 가슴이 천천히 천천히 제 박자를 찾을 때까지 나는 잠시 그대로 있었다. 아마 내가 이러는 걸 실리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피보호자라고만 생각하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아무런 진전도 없다. 그러니까 나는.

뭔가 달라져야겠다.

결혼식은 고작 두 달을 앞두고 있었다.

한밤중에 온 손님은 검은색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임대 마차를 타고 온 그 사람이 여인이라는 것을, 나는 아주 가까이 한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로 그는 자신이 누군지, 성별조차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감추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후드를 벗을 때까지 가만히 서재의 책상에 기대선 채로 바라보기만 했다. 먼저 인사를 건넬 생각은 없었다.

다리를 건너고 있다. 아주, 위험한 다리를.

그 끝에 있는 게 실리일까, 파멸일까. 지금으로서는 끝이 아득하게 멀어 알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는 게 전부다.

“사석에서는 처음 뵙습니다, 전하.”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군, 라스나티프.”

반왕파의 주요 인사 중 한 명이자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할 대신관 라스나티프가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60대 여성이었다. 이마에는 선택받은 자의 빛이 감돌고 있고 노쇠한 얼굴과는 달리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문득 실리와는 극단적으로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리의 눈은 아름답지만 언제나 고요하고 서늘했다. 그녀의 눈은 한숨 섞인 웃음만 감돌고 있다. 강하기 때문에 짊어질 게 많은 사람의 얼굴. 그 모든 걸 포용하기 위해 자신의 자유는 외면한 사람의 눈은 늘 내 마음을 시리게 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어떤가. 60대의 대신관이라는 여인은 참으로 눈이 반짝거렸다. 삶에 대한 의지와 욕망이 가득한 눈이었다.

보기 좋다고 하기엔 속이 뒤틀리고.

꼴 보기 싫다고 하기엔 내가 실리에게 주고 싶은 그런 눈.

뭐라고 할 수 없는 이중적인 감정이 끓어올랐다. 개인적인 감정을 접어 두려 애쓰며 나는 입꼬리를 올려 보았다.

“의외의 거물이시군.”

“전하의 앞에선 그저 작디작은 자일 뿐입니다.”

내 말에 라스나티프가 겸손을 떨었다. 그녀는 왕이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인물이다. 그런데도 그녀를 못 죽이는 것은 그녀가 너무 거물이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명성이 그녀를 지켜 주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역병을 물리치고, 죽었다고 알려진 왕세자의 존재를 찾아내어 세상에 드러낸 그녀는 한마디로 빛 그 자체인 인물이었다.

…세간의 평가가 그렇다는 것으로, 귀족 사회 내에서의 평가는 또 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그 세간의 평가가 그녀의 보호막이었다.

“…….”

그녀는 나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는 듯이 나를 응시했지만 나는 침묵을 지켰다. 나는 그녀를 상대로 내 패 한 장도 허투루 내보일 생각이 없었다. 내 카드를 보고 싶다면 그녀는 응당한, 혹은 그 이상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내 표정을 본 그녀가 씩 웃었다. 실리와는 달리 아무것도 어깨에 짊어지지 않은 듯한 사람의 웃음이라 인상 깊었다. 실리만큼이나 그녀는 유명하고 또 명성이 드높은데 어떻게 이토록 자유로운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될 수 있는 열쇠가 있다면 나는 온 세상을 뒤져서 찾아내 실리에게 주고 싶었다.

“이렇게 경계하시면서 어찌하여 저를 부르셨습니까?”

상황에 맞지 않는 질문은 순수한 호기심을 담고 있었다. 의외의 질문에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왜 불렀냐고. 실리를 구하고 싶어서. 그렇게 생각하고 웃을 뻔했다. 구하고 싶다고? 누가 들으면 웃을 것이다. 세실리아 사리안을 ‘구한다’고? 드높은 곳에 있는 그녀를 누가 감히 구한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지끈거렸다. 그녀는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고 나의 모든 생각은 망상에 불과한 것만 같아서.

“전하?”

“나는 승부사니까.”

되는 대로 지껄였다. 나는 승부사가 아니다. 도박으로 돈을 번 건 처음엔 우연이었고 그다음부터는 도박을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남들이 도박을 즐길 때 나는 철저히 도박을 돈을 버는 일로서 대했다. 가능성이 없는 곳에서 큰 행운을 만나는 그런 낭만은 기대해 본 적도 없다. 그게 바로 내게 부를 가져다주었다.

귀족은 돈을 벌지 않는 것이 품위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 돈이 없는 귀족은 가난한 평민보다 비참하다. 그리고 나는 가난한 평민만도 못한, 가축과 같은 삶을 영유해 봤다. 가진 것이 없는 삶은 무기가 없이 전쟁을 나간 병사와 같다. 그토록 고통스럽고 쓸쓸하고 무서운 것이다. 내게 돈은 유일한 무기였다. 나는 목숨을 걸고 한 푼 한 푼 아쉬워하며 모았다. 사람들은 내가 도박으로 돈을 번다며 비웃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이 비웃는 동안 그들의 알짜배기 재산들에는 다 내 이름이 새로이 적히게 되었으니까.

무엇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저 가진 무기를 더 날카롭게 벼리고 더 크게 빚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무기를 휘둘러 보려 한다. 무엇을 썰게 되든 간에.

내가 승부사라고 말하자 라스나티프가 싱글거렸다. 딱히 믿는 기색은 아니었다. 믿든 안 믿는 상관없었다.

“나를 몇 년간 기다린 건 당신인가, 아니면 당신 또한 메신저일 뿐인가?”

“둘 다입니다.”

“……?”

“저는 ‘기다린 사람들’ 중 한 명입니다. 그러니 저는 기다린 자임과 동시에 그들의 메신저이기도 하지요.”

“무엇을 기다렸지?”

내 질문에 그녀는 싱긋 웃더니 품 안에서 손수건을 하나 빼서 내 책상 모서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뒤로 물러났다.

“왕비 전하의 물건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나는 그 손수건에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거기에는 어두운 자국이 보였다. 고위한 왕비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그것은 핏자국이었다. 핏자국? 예감이 아주 나빴다. 핏자국이 말라붙은 선왕비의 손수건이 왜 반왕파 유력 인사의 손에서 나오는가. 저 피는 누구의 피인가. 누구의 고통인가. 저 피는 나와 관련이 있는 피인가, 없는 피인가.

“물건을 가져온 여자는 왕궁의 세탁부였습니다.”

“…….”

“시녀 한 명이 큰돈을 주고 말했다는군요. 태우라고. 세탁물 사이에서 손수건을 회수할 수 없게 되자 세탁부를 매수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 세탁부에게는 병에 걸린 아들이 있었지요. 세탁부는 죄를 지으면 아들의 병이 낫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해서 신전에 왔지요.”

“…….”

“이 피는 왕비 전하의 피입니다. 세탁부가 증언했습니다. 봤다더군요. 그리고 저희 쪽에서 알아본 결과, 이 피에는 미량의 독이 섞여 있었습니다.”

독살.

내가 알기로 내 어머니께서는 나의 죽음으로 인해 마음의 병을 얻으시어 앓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는 고통스러웠다. 나의 방만함이 부모님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이 지독하게 한스러웠다.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두 분의 희생이 개죽음이 되지 않게 하라는 말에 악착같이 살아남았지만 가끔 나는 차라리 내가 개처럼 구르다 죽었어야 맞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정도로 내게 고통이었는데.

독살, 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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