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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52화 (51/94)

<♡52>깜

마지막으로 챙길 사람을 향해 나는 빠르게 걸음을 독촉했다. 내가 이렇게 일을 진행하는 동안 이든은 우두커니, 아까 서 있던 곳에 그대로 머물렀다. 그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어디가 아픈가 해서 조심스럽게 그의 오른손에 내 손을 얹었다.

“괜찮으십니까?”

이든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핏기가 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오른손을 돌려 내 손을 마주잡았다.

“실리.”

“예.”

“돌아가자.”

어디로?

그렇게 물을 수 없었던 건 그의 얼굴이 너무 하얗게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와 여기서 당장 나가고 싶은 것 같았다. 많이 놀란 것 같아서 나는 그를 도닥여 주고 싶어졌다. 하지만 내게는 소임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돌아갈 곳이 없다. 한때 우리는 같이 살았지만 이제 그와 나는 거처가 다르지 않은가. 그는 스틸라드에, 나는 이스트럼에. 우리는 다른 곳에 사는데 어디로 돌아가자는 걸까.

내가 난처하게 웃자 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가.”

나는 그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저는 괜찮습니다.”

“…….”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이런 일에 저는 훈련되어 있습니다, 전하. 그러니까….”

이든은 눈을 감았다. 까마득한 절벽 앞에 서 있는 사람처럼. 그래서 나는 더 말할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에서 보이는 안타까움이 나를 향해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어서 당혹스러웠다. 나는 서른다섯 살. 공작. 기사단의 단주인데 이든은 마치 내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어린애인 양 보고 있었다.

왜일까.

당신은 왜 나를 그렇게 아등바등 지키려고 할까. 사실 나는 늘 지켜 주는 쪽이었지, 보호를 받는 쪽은 아니었는데. 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조차 내게 보호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왜 당신은, 대공이라는 간판이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을 당신은 나를 그런 눈으로 볼까.

이윽고 이든이 눈을 떴다.

“일단, 오늘은 혼자 돌아갈게.”

그리고 그는 고개를 숙여 내 뺨에 키스했다.

“다음번엔 이런 일 없을 거야.”

그는 맹세하듯 말했다. 누구에게 하는 맹세인지는, 알 수가 없다.

♡  아홉 번째 뒷장. 언제나  ♡

[  “이런 일에 저는 훈련되어 있습니다.”  ]

실리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것이다. 알았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겠지. 그녀의 성격상 그녀는 또 웃으며 자신의 표정을 감추었을 것이다.

그녀는 서늘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익숙하다고 하기엔 너무 지친, 체념에 가까운 얼굴. 훈련되어 있다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손톱만치의 자부심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괜찮아. 그녀는 늘 그렇게 말하지만 내 눈에 그녀는 조금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것들이 그녀를 짓누르고, 그녀에게 기댄다. 그녀는 모든 것을 지키고 자기 자신을 내준다.

이게 뭐야.

나는 당신만 있으면 되는데 당신은 왜 자신을 갉아먹어서 별 쓸모없는 인간들을 지키고 있는 건데.

“전하, 가시죠.”

나도.

“전하.”

나도, 그 쓸모없는 인간 중 결국 하나인가? 당신이 지켜야 하는 그 수많은 잡동사니 중 하나인가? 그래?

나는 우리가 단둘만이 존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는데 그건 모두 착각인가.

“전하…?”

크라이스가 나를 계속 불러서 나는 온 힘을 쥐어 짜내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여기에 석상처럼 서서 그녀가 나를 돌아보게 하고 싶었다. 무슨 일이냐고 내게 묻게 하고 싶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건 너무 어린애 같은 짓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실리. 왜 거기에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전하.”

“가지.”

발을 옮기면서 일부러 실리 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시선을 한 번이라도 주면 이 홀에서 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실리는 다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공작, 가장 유명한 기사단의 주인, 대륙에서 제일 이름 높은 신붓감. 그녀는 내 약혼녀지만 수많은 사람이 아직도 그녀를 노리고 있다. 대공의 약혼녀라는 건 그녀를 노리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아직도 많은 제안이 이스트럼에 도착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그녀는 늘 체념하고 있고 쓸쓸하게 웃고 많은 이들을 지키느라 자신을 갉아먹는 사람이다. 그녀가 도대체 뭘 원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무엇을 원하고 있어, 실리?

사람은 모두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잖아.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게 있긴 한 거야?

그게… 내가 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기 싫어졌다. 나는 모두가 증오스러울 지경이었다. 크라이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실리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이다. 실리의 보호를 받는 하스트레드의 일원. 실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하스트레드다. 그러니까 어쩌면 실리에겐 나보다 크라이스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속이 뒤집어졌다. 마차 멀미를 하는 기분에 눈짓을 하자 테인이 눈치 빠르게 마차의 창을 열었다.

“그나저나 하스트레드 경은 정말 대단하세요. 어쩌면 그렇게 강하실 수 있죠.”

로즈메리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그녀는 실리에게 흠뻑 빠진 얼굴이었다. 그런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예를 들면.

머릿속에 래리우드 지 산드리아의 얼굴이 지나갔다. 놈은 얼이 빠진 얼굴로 실리만 보고 있었다. 마물이 바닥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왕이 독화살에 위협을 받는 순간에도 놈의 눈은 그저 실리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놈은 마치 세상에 태어나 여자를 처음 본 듯한 눈을 하고 있었고 나는 살의를 느꼈다. 놈을 죽이고 싶었다. 아니면 파멸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로즈메리도 그런 눈이지 않은가. 세상에 그런 사람을 처음 본 눈.

그리고 나도 저런 눈을 하고 있었겠지. 너무나 오랫동안. 이제는 각인이 되어 내 눈동자를 들어내도 내 컴컴한 눈구멍만으로도 그녀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실리, 너에게 나 같은 인간은 너무 많고 너무 흔하겠지. 나의 이 감정은 너에겐 길에 널린 돌멩이처럼 흔한 걸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좋을까.

스틸라드에 도착하자 크라이스가 내 마차 문을 정중하게 열어 주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그를 치하해 주기는커녕 눈길도 주지 않고 안으로 들어왔다. 꼴도 보기 싫었다.

로즈메리가 나의 잠자리를 보러 간 사이 테인이 내 탈의 시중을 들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심기가 좋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습격을 당했으니까.”

테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심기가 안 좋은 건 그 탓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저 내 말을 믿고 넘어가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렇게 넘어가 주려는 테인에게 약간의 고마움을 느꼈다가 마음을 바꿨다. 테인은 실리의 사람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테인이 곁에 있는 한 나는 실리가 모르게 일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테인을 좋아한다. 로즈메리를 아낀다. 나에게 친구가 하나 있다면 그건 폴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실리를 대체할 수는 없다.

“내일은 돈을 좀 벌러 가야겠군.”

내 혼잣말에 테인이 무표정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 나름대로 질색하는 표정이라는 걸 안다. 그 얼굴을 뒤로한 채 나신인 채로 뜨거운 물이 담겨 있는 목욕통에 몸을 담갔다. 몸에 오한이 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내가 대단히 긴장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물을 봐서? 난생처음 본 마물이지만 생각보다 무섭진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마물에게 공포를 느낄 새가 없었다.

몸을 뒤로 기대고 눈을 감았다. 내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봤다. 천천히 정리하다가 눈을 뜨니 폴이 서 있었다.

“괜찮아?”

그는 안색이 새파랬다. 아마 나를 걱정해서라기보다는 그 위험한 곳에 뛰어든 어머니를 처음 본 것에 대한 충격 때문일 것이다. 나는 실리가 말해 주었던 것들을 떠올렸다. 천재인 어머니. 영원한 그림자로 남을 아들. 늘 해맑기만 한 폴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어둡고 질척거렸다. 그리고 의외로 친구의 모든 것을 아는 게 우정을 지속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다행이야, 이든.”

내가 아는 폴은 어머니를 상대로 그런 감정을 가질 사람이 아니었는데. 내가 아는 폴과 실제의 폴은 어느 정도의 격차가 있을까. 폴에게 그런 차이가 있다면, 다시 말하자면 내가 아는 실리와 실제의 실리에도 차이는 존재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나는 실제의 실리를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 안의 실리를 사랑하는 것일까. 내 마음이 사랑이기는 할까. 아니면 나를 구해 준 사람에 대한 각인일까. 마치 알에 태어난 짐승이 처음 본 생물을 각인하는 것처럼.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심연은 어둡고 난잡하다. 나는 심연을 들여다보던 고개를 들었다. 창밖을 보면 하늘이 맑다. 그래, 그것으로 충분하다. 별은 반짝이고 내 행복은 그 반짝임의 영역에 있다.

***

다음 날 내가 도박장으로 향하자 테인은 나와 동행했다. 로즈메리는 스틸라드에 있기로 했고 폴은 어머니 소피에게 가 보아야겠다고 해서 보내 주었다. 마침 때가 좋았다. 나는 도박장에서 도박을 길게 이어 갔고 테인은 그 분위기를 못 견뎌 했다. 불한당들이 제멋대로 떠들며 허세를 부리고 남들을 우습게 아는 듯한 그 분위기는 테인과는 맞지 않았다. 나는 돈만 벌면 돈을 잃는 이들이 뭐라고 떠들며 즐기든 알 바 아니라는 주의지만 테인은 아니었다. 그는 나보다 훨씬 점잖은 성격이었다. 그가 피로한 것 같을 때 내가 도박장 옆 카페에 갈 것을 권하자 그는 순순히 카페로 향했다. 어차피 이곳에 있어 봐야 나의 시중을 들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도박만 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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