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깜
화살을 쏘는 건 이미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하고.
이 장소를 무너뜨릴 것도 아니라면, 무엇을 하려 했을까?
내 머릿속에서 새빨간 등이 경고를 담아 불타오르는 순간.
이든을 중심으로 커다란 원이 생겨나더니 그 안쪽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그리고 괴이한 울음소리가 공간을 찢어 놓았다. 그와 함께 어둠으로 화한 바닥에서 거대한 괴물이 바닥을 팔로 짚으며 몸을 끄집어 올렸다.
“소피, 부탁해!”
소피에게 고함치고 바로 달렸다. 누군가가 마법으로 마물을 소환했다. 왕궁 홀 한복판에. 이든을 타깃으로. 왕은 처음부터 미끼였던 것이다.
당했다.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치는데도 내 발이 느린 기분이 들었다. 마물은 처음 보는 희귀한 종류였다. 무시무시하게 커서 왕궁 홀 안에서도 몸을 겨우 펼 정도였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거대한 방망이였는데 아마 스치기만 해도 이든은 가루가 될 것이다.
마물의 소환이 완전히 끝났을 때도 나는 마물 앞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마물이 팔을 휘둘렀다. 붕, 하는 소리가 위협적이었다. 바닥을 차고 뛰어오르면서 내가 발밑에 마력을 부여했다. 내 몸이 하늘을 날 것처럼 떠올랐다. 그대로 공중을 날아서, 내가 검을 높이 들고 마물의 목을 겨눔과 동시에 크라이스가 이든의 허리를 잡고 굴렀다.
콰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패었다. 아까의 독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마물이 바닥을 치느라 허리를 숙이는 사이 나도 마물의 목에 검을 꽂아 넣었다.
꽂아 넣은 순간 뭔가가 걸렸다. 보통 마물이라면 성검을 대상으로는 깨끗하게 잘려 나가야 하는데 뭔가가 걸리적거려서 당혹한 나머지 약간, 아주 잠깐 내가 신경을 빼앗겼고 그때 마물이 몸을 흔들었다.
젠장.
드문 실수였다. 내 몸이 그대로 허공에 내팽개쳐졌다. 중심을 잡아야 된다는 걸 알지만 강한 힘으로 뿌리쳐져 마력을 부여할 수가 없었다. 벽에 부딪히는가. 그렇다면 머리를 보호하고 최대한 덜 다치는 방향으로 부딪히기 위해 공중에서 몸을 돌렸을 때 갑자기 속도가 확 줄어들면서 내 몸이 둥실 떠올랐다.
나는 허공에 서 있었다.
고개를 내리자 이든이 나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아아, 그렇지. 그는 마법사였지. 심지어 대공이 아니었다면 그는 아주 촉망받는 마법사가 되었을 사람이었다. 그가 내게 부유 마법을 걸고 있었다.
나는 허공을 다시 달렸다.
[거대하게 불타올라라.]
내 언령에 검이 바스타드 소드만큼 거대해졌다. 그리고 활활 타올랐다. 불의 형태로 화한 검은 시전자인 내게도 뜨거울 정도였다. 나는 그대로 달려가 다시 이든을 공격하려고 하는 마물의 정수리에 손을 짚고 목을 돌려 그었다.
마물이 비명을 질렀다. 끔찍한 소리였다.
마물의 목에 틈이 벌어진 순간 손을 집어넣어서 아까 걸리적거렸던 무언가를 빼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확인해야 했다. 내가 그걸 빼냄과 동시에 마물이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나를 집어 던지고 몸부림을 쳤다. 이번에는 나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몸을 뒤로 훌쩍 공중제비해서 바닥으로 착지하려 했다. 그러나 공중제비한 내 몸은 둥실둥실 구름을 탄 것처럼 하늘하늘 내려왔다. 땅을 보자 이든이 두 팔을 벌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응?
마물이 재가 되어 사라지는 동안 나는 천천히 낙엽이 떨어지는 것처럼 내려와 이든의 두 팔 위로 착지했다. 이든은 나를 가볍게 안고서 내려다봤다.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입술은 파랬다. 입술이 달달 떨리는 게 보여서 나도 모르게 성검을 없앤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만지려 했다.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도 내가 왜 그러려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손끝이 그의 입술에 닿는 순간 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는 앞뒤 보지 않고 고함을 질렀다.
“당신, 미쳤어?!”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가 아무리 대공이라고 해도 하스트레드는 설령 왕이라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집단이 아니었다. 소피와 크라이스, 그리고 리온이 거의 검을 빼어 들 기세로 이든을 노려보았다. 특히 소피는 멀리 있었지만 왕의 호위만 아니었다면 당장 뛰어와 이든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하지만 이든은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다치면. 죽기라도 하면…!”
이든은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나를 움켜 안은 채 고함을 질렀다. 그 팔이 달달 떨렸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나를 잃을까 봐, 그리고 내가 조금이라도 다칠까 봐,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다칠지도 모르는 일을 한 것에 대해 노여워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나를 모욕한다고 여겼다. 누군가는 나와 같이 치욕스러운 일을 당한 것처럼 분노했고 누군가는 이 모든 상황을 단지 흥미롭게 구경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래, 당신은 이전에도 그랬지. 나를 구하기 위해 당신은 그 많은 피를 흘리며 내게 왔었다. 나는 당신이 흘린 피를 기억하고 있어.
내 한 명뿐인 ‘누군가’.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지만 도저히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없는 단 한 명뿐인 사람이 여기에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다치는 걸 걱정해서 얼굴은 새파래지고 세상이 자신을 비난하든 약점을 잡으려 하든 개의치 않을 정도로 이성을 잃는 그런 사람을 나는 이전에도 만난 적 없었고, 이후에도 이든 외에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팔을 벌려서 어설프게 그를 끌어안았다. 팔 안에 안긴 몸은 아주 말랐지만 뼈대가 몹시 굵었다. 그건 이든이라는 사람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연약한 육체와 강력한 정신. 나는 그를 도닥거렸다. 이상한 말이긴 하지만 충동적으로 속삭였다.
“오랜만이에요.”
마치, 지금 만난 것처럼 속삭이자 그의 눈이 커졌다. 그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얼굴을 했다.
아무도 우리가 지금 어떤 감정인지 이해할 수 없겠지. 하지만 당신은 내 감정이 뭔지 이해한 것 같고 그러니까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나도 바닥을 모를 나의 심연을 당신은 끌어안는다. 우리에겐 많은 차이가 있는데도.
“내려 주시겠습니까, 전하.”
내 요청에 그는 싫은 듯 잠시 침묵했다. 나를 내려놓지도 않았다. 나는 그를 도닥거리면서 그저 기다리기만 했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나를 내려 주었다.
눈을 잠깐 감았다 뜨는 것만으로도 모든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내 시선에 소피가 내키지 않는 눈으로 이든의 옆에 섰다. 그녀는 천재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 어떤 경우라도 이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이든은 나를 지키고 싶어 하고 내가 다치지 않길 원한다. 그런 그의 그 감정을 볼 때마다 사랑스럽고 감사하다. 하지만 그건 나의 현실은 아니다.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아마 사랑스러운 거겠지.
내가 움직이자 리온과 크라이스가 따라붙었다. 홀의 중앙에서 우리와 소피는 서로 지나쳤다. 나는 왕의 앞에서 기사로서 무릎을 꿇었다. 드레스를 입고 있는 상태로는 사실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었지만 지금의 나는 드레스를 입은 숙녀가 아니라 하스트레드의 수장이었다. 계약을 충실히 이행해야 할 때였다.
왕의 눈이 나를 향했다가 다시 바닥으로 움직였다. 극악한 독에 녹아내린 바닥. 그 독은 한 방울만 왕에게 튀었어도 그의 목숨을 앗아 갔을 것이다.
“하스트레드 공. 짐은 이 모든 불미스러운 일의 경과를 알아야겠다. 그대가 책임자가 되어 조사할 것을 명한다.”
나는 내가 이 조사의 책임자가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정도는 왕궁을 좀 오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바였다. 왕궁 홀에 마물이 들어왔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가 들여보냈다는 것이다. 심지어 문을 잠갔다. 이건 내통자가 있다는 의미이며 근위대를 믿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되면 조사는 외부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마침 마물을 잡은 게 나이니 내가 책임을 지고 이 일을 맡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관련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는 모두 짐의 앞에 끌고 와라,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왕은 다시 한번 팬 바닥을 노려보고는 왕비를 에스코트해서 문으로 향했다. 그 순간 안 열리던 문이 열렸다. 문 앞에서 아비규환으로 몰려 있던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켜 길을 만들었다.
왕비는 비틀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아찔한 하이힐은 신은 그녀가 걷는 모습은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었다. 왕은 그녀를 부축해 주진 않았다. 그저 같이 걷고 있을 뿐이었다.
왕과 왕비가 나가자 문이 다시 닫혔다. 마치 다른 이들은 여기서 나갈 권한이 없는 것처럼.
소피가 왕과 왕비를 문밖에 있는 근위 기사에게 안내하는 사이 크라이스가 “근위대장님은 어디 계시지?” 하고 근위대에게 물었다. 여기로 마물을 들이려면 내통자가 있었을 것이다. 크라이스의 말은 근위대에서부터 내통자의 여부를 확인하겠다는 뜻이었다.
“크라이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내가 손을 까딱거리자 크라이스가 눈을 조금 크게 떠서 의아함을 표했다. 옆에서 리온이 속삭여 주자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왕세제 전하, 대공 전하, 돌아가시죠. 하스트레드에서 호위하겠습니다.”
일단은 호위가 먼저였다. 왕세제, 대공, 공작, 후작, 이런 식으로 작위별로 호위하여 손님들을 안전하게 보내는 게 우선이었고 그다음엔.
“소피.”
내가 소피를 부르자 그녀가 다가왔다. 오늘 파티 때문에 드레스를 입었지만 이미 그녀의 눈은 기사의 것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움직이는 데 드레스가 영 거슬린다는 얼굴을 하고서 내게 다가와 귀를 대 주었다.
“하인들을 신경 써. 하스트레드 기사들이 동행하다 보면 데려온 하인들이 마차에서 쫓겨나게 될 거야. 그 사람들을 모아서 마차에 태워 각 저택에 데려다줄 수 있도록, 일단은 대기할 수 있는 곳에 모아 두도록 해.”
소피가 고개를 끄덕이고 문으로 향했다. 문은 근위대가 막고 있었지만 소피의 눈빛을 받은 근위대는 잠자코 길을 열어 그녀가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소피아 히옌의 검을 받고 싶은 근위병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천재 검사고 심지어 남작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