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깜
그게 소피아에게 좋았을지 나빴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도 이 모든 건 전해 들은 이야기에 불과하니까. 어쨌든 소피아는 아이를 낳고 자기 꿈을 펼쳤고 중간중간 조이스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조이스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남자였다. 그는 소피아가 존재하는 한 괜찮았지만 소피아가 존재하지 않으면 다른 여자를 만날 게 확실했다. 그는 소피아보다 나이가 열두 살이 많았고 그의 인생에 여자가 없었던 적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혼자는 살 수 없는 타입이었다. 멀리 있는 건 괜찮아도 존재하지 않는 건 참을 수 없는 사람. 소피아가 걱정하는 건 바로 이것이었다. 조이스에게는 소피아만 중요해서, 다시 말하자면 소피아가 없어지면 조이스는 다른 여자를 선택할 것이고 그때 그는 그 여자 위주로 인생을 움직일 것이다. 소피아가 낳은 아이들을 어떻게 할지, 소피아는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소피아는 폴을 무리를 해서라도 이든의 시종으로 넣어 아이들의 장래를 도모하고자 한 것이고 나는 그녀의 그 선택을 결국 지지한 셈이 되었다. 어머니로서 그녀의 걱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폴의 마음도 알고 있다.
“집안의 가장이 된 소피아는 집안을 많이 돌봤지요. 하지만 감사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질시를 받았죠. 그녀는 늘 그래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질투했습니다. 소피아의 인생은 한쪽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여성에 평민인 그녀가 홀로 남작 작위를 받은 건 대단한 일입니다. 심지어 소피는 정치에 대해서는 손톱만치도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오로지 운명이 그녀에게 준 몫만 받았는데 그게 남작이라는 작위라니, 정말 입지전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소피의 인생 한쪽은….”
“질투와 시기로 가득하다고?”
이든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폴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는 얼굴이었다. 이든은 이해할 수 없는 듯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의 눈이 나에게 묻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폴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생각했다. 결국은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지만.
“자신을 낳아 준 사람의 그늘에서 평생 사는 걸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
“영원히 못 넘을 상대. ‘소피아 히옌의 아들’이라는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폴 히옌’이라는 이름이 앞에 오지 않는, 죽을 때까지 누군가의 간판 아래서 사는 겁니다. 절대로 사람들은 폴을 생각하지 않겠죠. 모두가 그를 소피아의 아들로 볼 겁니다.”
나는 열등감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 감정을 늘 보고 있기는 하다. 크라이스가 소피아를 상대로 그러니까. 그는 이성적으로 자신의 열등감을 누르려고 매우 애썼고 현재는 제 나름의 행복도 찾았다. 그러나 가끔 그는 소피아를 보면서 울분을 터뜨린다. 소피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걸 행운으로 여기지도 않고 그걸 즐기지도 않으며 다행스럽게도 여기지도 않는다. 그걸 그저 제 몫의 어떤 것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게 크라이스 같은 사람을 화나게 만든다.
아마 폴은 더할 것이다. 자신을 낳은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을 보호하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영원히 넘을 수 없는 상대라는 건 아주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폴은 잘 웃고 매력적인 아이지만 제 엄마 소피 앞에서는 종종 얼굴을 일그러뜨릴 때가 있다. 소피아 히옌의 아들. 소피아 히옌에 비하면 잘난 구석이 없는 아들. 그게 폴을 얼마나 옭아맬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다. 아마, 이든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그 또한 나처럼 선택받은 자고 혜택받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대로 흘려보내는 수밖에 없다.
“나는 모르겠어.”
마침 음악이 끝나서 이든은 나를 에스코트해서 플로어를 나왔다. 그는 나와 팔짱을 낀 채 걸으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말했다.
“나는 평생, ‘세실리아 사리안의 남자’가 되길 원해. 그 간판을 원하기 때문에 폴의 마음 같은 거 이해할 수 없어.”
“두 개는 다른 마음이지요.”
“그래, 두 개가 다른 마음이라면.”
이든이 무뚝뚝하게 앞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당신이 이해해야 할 마음은 내 마음일 거야. 폴의 마음 따위가 아니고.”
“그건….”
내가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불이야! 어딘가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불? 왕실의 홀에서 웬 불? ‘이상한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어딘가에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때때로 몸은 머리보다 먼저 움직인다. 나는 땅을 박찼고, 허공에 몸이 뜬 순간 주변을 둘러보았다. 몸은 폭발음 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시선은 다른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상대는 소피였다. 소피에게 고갯짓을 하자마자 소피가 재빨리 왕에게로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하는 건 왕과 왕비의 안전이었다.
“크라이스!”
크라이스가 보이지 않아 소리를 지르자 크라이스가 “예, 주군!” 하고 소리를 쳐 응했다.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에서도 크라이스는 내 귀에 들릴 정도로 명확하고 크게 답했다.
“대공 전하를!”
내 명에 크라이스가 내 쪽으로 달려왔다. 크라이스와 리온이 동시에 이든을 보호하기 위해 달리는 동안 나와 소피는 왕과 왕비를 향해 질주했다. 이든의 곁에 있던 내가 이든을 보호하고 왕과 왕비는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이 보호하면 좋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가장 강한 자가 가장 높은 자를 보호하는 게 호위의 원칙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왕은 사실 하스트레드의 모두가 자신을 보호하길 바라겠지만 말이다. 이든처럼 정치적 입지가 불안정한 인물은 이런 난리 통 속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될 수 있다. 나는 그걸 방관할 수 없었다.
핑!
어딘가에서 화살이 나르는 소리가 귀를 스쳤다. 본능적으로 오른손을 뻗었다.
[와라!]
언령에 힘을 최대한 실었다. 내 팔의 피부 안쪽에서 검이 생겨났다. 피를 검으로 화하는 건 아픈 데다 기력을 지나치게 소비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주변의 기를 모아 검을 부르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검이 다 생성되자마자 팔을 휘둘렀다. 거의 감으로 화살이 날아온다고 생각되는 쪽을 쳤고 다행히도 맞아떨어졌다. 화살이 반쪽 난 채로 바닥에 툭 떨어졌다.
푸슈슉 소리와 함께 바닥의 카펫이 녹아들었다. 강력한 독. 스치기라도 했으면 왕은 즉사했을 것이다. 내가 왕을 돌아보자 그가 눈을 크게 뜬 게 보였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닥의 화살을 노려보고 있었다. 화살은 아마 한시적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었던 것 같다. 마법이 풀리면서 독은 화살까지 녹여 버렸다. 녹일 수 있을 만큼 녹이고 독은 사라졌다.
왕이 부들부들 떨었다. 소피가 왕비를 한 팔로 끌어안은 채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왕비는 불편한 기색 반, 불안한 기색 반이었다. 그녀는 소피에게 안긴 채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소피는 여차하면 왕비를 그대로 어깨에 짊어질 참인 듯 주변에 대한 경계를 최대한 높이면서 곁에 있는 근위병의 검을 빼앗아 들었다. 검을 빼앗긴 근위병이 헉, 하고 숨을 삼켰지만 소피의 날카로운 눈빛에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소피가 검에 마력을 불어 넣자 검이 붉게 타올랐다.
나는 왕의 팔을 잡은 채로 주변을 확인했다. 소피 다음은 이든의 곁에 있는 리온과 크라이스였다. 둘은 이든을 샌드위치처럼 감싸고 주변을 경계 중이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앞다투어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리온과 크라이스는 이든이 움직이는 걸 제지했다. 이든이 움직이면 안 된다는 건 그들이 제일 잘 알았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건 질서였다. 질서를 이 공간에 불러들일 수 없다면 최소한 무질서한 곳에서 떨어져 있어야 했다. 무질서한 곳에선 반드시 사고가 나고, 사고를 틈타 두 번째 습격 시도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와 소피가 경계하고 있는 왕과 왕비의 자리. 그리고 리온과 크라이스가 경계하고 있는 이든의 자리는 입구에 비해 인적이 없이 한산했다. 누군가가 혼란을 틈타 접근할 수 없는 상태였다. 화살이 한 번 더 날아올 것을 생각한다면 인파 사이에 숨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 넷은 모두 화살을 쳐 낼 자신과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스트레드는 계약자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성의 없는데.”
왕이 독으로 인해 움푹 팬 바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무서운 나머지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도 괜찮은 척 허세를 부리는 중이었다. 아무 말이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하고 있을 그를 흘끗 보고 다시 주변을 살피면서 내가 대답했다.
“전하의 이익을 최대한 고려해 행동하는 중입니다. 전하의 안위를 위협하는 일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전하를 모함하기 위한 수일 수도 있지요. 어느 쪽이든 저로서는 전하를 안전하게 모셔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
불이야, 불이야!
불이 난 곳에서는 폭발까지 일어나 벽이 일부 무너졌다. 지금 가장 걱정되는 건 이 홀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 경우 모두가 압사할 수도 있는 문제니까. 하지만 벽이 무너진 틈으로 예상했을 때 홀이 무너질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왕궁은 강력한 방어마법진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 그 방어마법진을 깨려면 고성능의 마법 폭약을 이용해야 했을 텐데 그런 물건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구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대량으로 구할 수도 없고 구한다 해도 반드시 꼬리가 잡히게 되어 있다.
아니나 다를까. 홀의 벽 반대편 복도에서 달려온 이들이 불을 끄기 시작했다.
‘문이 안 열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공황은 더 커져 가고 있었다. 문이 열리지 않자 사람들이 문을 쾅쾅 치면서 힘으로 열려고 했다. 문이 저렇게까지 안 열린다고? 나는 소피를 바라보았고 멀리 있는 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크라이스에게까지 시선을 주었을 때는 모두가 동시에 검을 본격적으로 쥐고 있었다. 문을 밖에서 잠갔다는 건 이 안에서 무언가를 하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