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깜
♡ 아홉 번째 앞장. 습격 ♡
“어휴, 저 후작가 도련님은 아까부터 왜 저러는 겁니까? 눈빛이 너무 뜨거워요.”
크라이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진저리를 치는 걸 보면서 나는 흘끗 그의 등 뒤를 확인했다. 그의 등 뒤, 꽤 먼 곳에서 아까의 후작가 도련님이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확 붉혔다.
“화가 나서가 아닐까?”
“진심이세요?”
크라이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는 내게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춤을 신청하는 그 모습에선 지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민망한 기분에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천천히 플로어로 걸어 나갔다.
“도대체 뭘 하셨기에 저렇게 눈빛이 뜨겁습니까….”
“대… 화?”
“안 그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약혼자분 표정이 많이 안 좋습니다.”
“약혼자? 피보호자겠지.”
“7년 만에 만나셨는데요? 그리고 저 눈은….”
크라이스가 내 뒤를 보면서 말했다. 빙글빙글 돌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크라이스가 어디를 보는지 곧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든을 보고 보고 말한 것이리라. 그리고 이든은 우리를, 아니 아마도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까 오후에 이든을 만났을 때, 나는 조금 당황했다. 이든은 키가 엄청나게 자랐다. 그는 키가 큰 크라이스보다도 커져서 나는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마른 건 여전했다. 나는 그에 대한 보고를 여전히 받고 있었고 보고에 의하면 그의 검술은 중상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건강에 대해 많은 신경을 썼지만 어릴 때 잃은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체력이 약했고 자주 앓아누웠다. 그럴 때마다 로즈메리는 나에게 서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는데 가끔은 얼마나 급했는지 그녀답지 않게 필기체가 날아가는 것처럼 엉망인 경우도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아팠고 가끔은 혼절 상태로 며칠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결국 모든 걸 잘 넘어서서 성인이 되었다.
나는 내내 그런 보고를 들어 왔고, 그래서인지 내 머릿속의 이든은 늘 열세 살의 그 연약한 소년이었다. 아름답지만 연약한, 어딘가 아슬아슬해 보이는 소년. 아니, 사실은 열세 살도 아니고 열한 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검은 가져가라고 말하던, 그 가엾던 소년.
“많이 크셨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겐 어린 지인이 하나 있었다. 그를 친구라고 해야 할지 가족이라고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어도 그는 내게 위로가 되는 존재였다. 오랜 세월 서신 교류 한 번 없었지만 그는 존재만으로 내 마음에 아주 작은 봄바람을 지속적으로 감돌게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조금 쓸쓸해졌다. 이든이 장성한 건 다행스럽고 기쁜 일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의 어린 지인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컸다는 걸 인정할 때가 왔다. 쯧. 혀를 한 번 차는 것으로 나는 내 어린 지인과 마음속에서 작별했다. 그는 더 이상 어리지도 않았고 나의 작은 지인도 아니었다.
[ “돈도, 명예도, 자유도, 모두 내가 이 손에 넘치도록 가질 테니까, 당신은 하고 싶은 걸 해.” ]
그렇게 말해 주던 나의 이든은 먼 옛날에 두고서 당신은 이제 어른이 되었구나.
“너무 크셨네요.”
크라이스가 내 말에 동의하는 것인지 아닌지 애매한 어조로 투덜거렸다.
“원래 그로스랜 왕가 남자들이 장신이잖아. 도리어 그로스랜의 일원이라고 치면 너무 마른 거지.”
내 대답에 크라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주군.”
그의 팔 아래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면서 다시 한번 이든을 바라보았다. 키가 크고 상당히 마른 남자. 하지만 뼈대가 굵어서 빈약해 보인다기보단 냉정한 느낌이 들었다. 고작 스무 살밖에 안 되었는데도 그는 오만하고 냉랭한, 왕족의 전형 같은 모습이었다.
“그럼?”
“남자의 눈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죠.”
“…….”
“모르는 체할 생각 마시고요. 누가 봐도 저 눈은 남자의 눈이, 아이고.”
응?
크라이스가 내 등 뒤를 보며 신음했다. 크라이스의 잔소리를 별로 듣고 싶지 않기도 했고 마침 음악도 끝난 참이었다. 이때를 틈타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려 몸을 돌리려 했을 때였다. 크라이스와 내 손이 떨어진 순간 다른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챘다.
“실례.”
거칠다기보단 리드미컬하다는 것에 더 가깝게, 손이 붙잡혔다. 아무 생각 없이 내 손을 잡은 이를 돌아봤다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이든이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이든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든의 푸른 눈이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너무 차가운 파란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악단들이 다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이든이 나를 플로어 중심으로 이끌었다. 거부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는 왕부터 가까이는 크라이스까지, 모두가 7년 만에 만난 열다섯 살 차이의 커플이 어떻게 춤출지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속의 동물이 된 기분이 이럴까. 피식 웃었더니 이든이 얼굴을 가까이 해 나를 들여다보았다.
“나만 봐, 실리.”
“예?”
“나와 춤추고 있잖아.”
[ “남자의 눈을 하게 되셨다는 이야기죠.” ]
크라이스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나는 이든의 눈을 아무렇지 않은 척 피해 버렸다. 남자의 눈을 한 이든이라니, 불편하고 어색했다. 나는 나이 어린 지인이 있었고 그는 내게 나름대로 소중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커서 남자의 눈을 하게 되었다고 적응할 수가 있을까.
이든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싸고 있었는데 그 손이 무척 컸다. 그는 능숙하게 춤을 췄고 나는 그의 행동 일거수일투족을 나의 작은 이든과 비교하다 춤을 다 출 때쯤에는 포기해 버렸다. 같은 사람이라는 건 안다. 그리고 그가 컸다는 것도 안다. 다 알면서 나는 뭘 비교하고 어디서 같은 점을 찾고 싶은 걸까.
“실리.”
“예?”
부른 건 그인데 그는 뭔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품에서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르겠다. 우리 사이에서는 음악만 흐르고 있었다. 그의 손이 나의 몸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듯 보조했고, 우리는 어색하지 않게, 그러나 마음만은 참 낯선 기분으로 춤을 췄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아까 말해 준다는 건 뭐야?”
“…? 아아, 폴 말입니까?”
“응.”
그는 폴의 이야기에 관심이 커 보이지 않았고 사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도 불편하고 이 낯선 분위기도 싫었기 때문에 무슨 화제라도 끄집어내야 했다.
오후에 소피가 졸라서 나는 옌선에서 유행하는 티타임을 해 보았었다. 소피가 원한 저택은 오직 한 곳뿐이었다. 그의 장남이 몸담고 있는 곳, 즉 이든의 저택이었다.
이든이 이스트럼을 나가 새로 구입하여 대대적인 보수를 진행한 스틸라드는 옌선에서 가장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았지만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최신 건물로 인정받았다. 다들 한 번쯤 들어가 보고 싶어 하는 타운하우스였는데 정작 이든은 파티를 열거나 하여 손님을 초대하는 일이 일절 없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겉모습만 알고 있었다. 단지 이든이 온 세상의 값비싼 가구며 장식품들을 사들였기에 그 안이 아주 호사스러울 거라고 예측만 할 따름이었다.
따라서 소피는 아들이 거하는 장소를 볼 겸, 그 유명한 스틸라드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도 풀 겸, 또 옌선에서 유행한다는 티타임도 경험해 볼 겸 같이 가자고 내게 청했다. 혼자 갔다가는 이든이 문전 박대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이든은 이 티타임을 아주 싫어해서 상대가 누구든 할 것 없이 모조리 다 거절하고 있었기에 소피는 약혼녀라는 거절할 수 없는 간판을 가진 나를 대동해서 스틸라드의 정문을 넘고야 말았다.
그리고 폴은 내가 예상한 것과 별다를 바 없이, 반가우면서도 반갑지 않은 미묘한 태도로 제 엄마 소피를 맞았다. 7년 만인데도 폴의 그 태도는 여전했다. 폴의 태도에 놀란 사람은 소피도 폴도 나도 아닌 이든이었다. 그는 ‘소피는 좋은 사람인데 왜 폴은 자신의 엄마를 저런 식으로 대하는 거야?’라고 눈으로 내게 물었다. 그 이야기는 사실 좀 복잡했다.
“소피아는 마력을 타고났습니다.”
소피아의 인생의 단 면과 쓴 면은 모두 소피아가 마력을 타고났다는 데서 시작한다.
“마력은 개인이 타고나는 것이죠. 소피아의 경우 강력한 마력을 타고난 편입니다. 그리고 소피아는 검술도 훌륭하고 재능이 있었습니다. 강대한 마력에 검술에 대한 훌륭한 재능을 타고난 그녀는….”
“…….”
“집안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아주 피곤한 삶이 소피아에게 펼쳐졌다. 한쪽에서는 소피아를 칭찬했지만 다른 한쪽은 소피아를 등쳐 먹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로 가득했다. 가족들은 시간이 갈수록 소피아를 누이, 딸, 언니, 동생 등으로 보지 않고 돈을 벌어 오는 가축으로 보기 시작했다. 돈을 아주 잘 벌어다 주는 가축. 심지어 그 가축은 매우 충성심이 있었다. 그들은 매우 편안하게 살면서 소피아의 돈을 제 돈처럼 쓰고 소피아의 인생에 대해 자신들이 권리가 있는 것처럼 굴었다.
소피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는 강단 있는 성격이었지만 제 사람에겐 물렀기에 가족들이 자신을 노골적으로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외면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하스트레드에 들어왔고 밖으로 나돌았다. 돈은 더 잘 벌게 되었지만 그녀는 더 가난해졌다. 그때 즈음 만난 게 조이스였다. 외로움을 타는 남자. 하지만 자기 자신과 자신의 연인이 무엇보다 중요한 남자.
조이스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해 나갔다. 소피아에게 ‘나만이 너의 가족이고 연인이야.’라고 주입시키는 한편, 소피아의 가족들을 잔인하게 내쳤다. 그들 중 누군가는 거지가 되었다는 소문마저 돌았지만 조이스는 눈썹 한 올 꿈쩍하지 않았다. 소피아의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조이스는 그녀를 전장으로 내보냈다. 좋아하는 것을 하라며 보내 버리고 그는 소피아의 인생에 진창인 부분에 기꺼이 뛰어들어 그 모든 것을 헤쳐나갔다. 소피아가 첫 아이 폴을 가졌을 때 소피아에게는 조이스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