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깜
‘왜?’
나는 실리에게 눈으로 물었다. 왜? 소피는 좋은 사람이잖아. 좋은 어머니이기도 하고. 소피는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단의 상급 기사인데도 늘 폴을 걱정해 많은 서신을 보내왔다. 내가 서신을 보내지 않으면 일절 편지 한 장 없는 누군가와는 딴판이었다. 소피는 여러 장소를 다니면서도 좋은 것이 있으면 늘 폴에게 보내 주었다. 전장에서 물건을 보낸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인데도 그녀는 그걸 기필코 했다.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 상단에 부탁하기도 하고 돌아가는 부대 편에 함께 보내기도 하고 순례하는 신관이나 마법사들에게 맡기기도 했다. 어떤 물건은 1년 반 만에 폴의 손에 들어온 것도 있었다. 그 정도로 애정이 넘치는 어머니인데, 왜.
애초에 폴이 왕립 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도, 나의 시종이 된 것도, 다 소피가 실리에게 매달려서 이뤄 낸 결과가 아니던가. 실리가 누군가에게 청탁을 할 인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아무리 상대가 나여도 그녀는 청탁을 쉽게 하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청탁이라며 부탁을 꺼냈다. 소피를 위해서, 소피의 아들인 폴을 위해서.
그때는 그저 얼굴이 찌푸려질 뿐이었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소피는 계속 위험한 곳에 있고 그녀는 아들들을 보호해야 했다. 아들은 셋인데 그 셋을 모두 보호할 수는 없으니 장남의 힘을 키워 다른 아이들을 보호하게 하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폴 또한 그 의도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폴은 장남이었으니까. 그는 장남으로서 작위를 계승할 것이다. 그만큼 의무가 따르는 건 당연하다. 폴은 도대체 뭐가 불만인 거지?
폴이 누리고 있는 모든 건 소피가 준 것들인데?
그때 실리가 내게 다가와 손을 뻗어 내 뺨을 쓸어내리듯 하며 나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내렸다. 그녀와 뺨과 뺨이 거의 맞닿을 거 같은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그녀가 내뱉는 숨결의 향까지 맡아질 정도였다. 복숭아 향이었다.
“밤에 설명드리죠.”
밤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덜컹, 바닥으로 추락하는 듯했다.
…그리고 밤, 나는 아주 많이 실망했다. 나도 안다, 내가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는 거. 알아, 아는데.
“대공 전하.”
어떤 여자가 와서 아양을 떤다. 친절하게 말을 거는 거라고 나도 좋게 해석하고 싶지만 이 여자는 그렇게 해석하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녀는….
“안녕, 올리비아. 오랜만에 보네.”
폴이 적절하게 나서며 말을 걸었다. 올리비아 지 산드리아. 그녀와 우리는 구면이다. 아니지, 정확히 그녀는 우리의 후배다. 우리는 졸업했지만 그녀는 아직 졸업 전이었다. 우리보다 세 살 어린 그녀는 로즈메리와 동갑이지만 로즈메리는 그녀의 선배이다. 로즈메리는 죽을힘을 다해 우리와 같은 학년을 다녔으니까. 심지어 로즈는 우등생이었다.
나의 시녀이자 친우이자 지인으로서 같이 파티에 참석한 로즈메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올리비아 산드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즈메리는 나나 테인, 폴에게는 상냥하고 잔소리 많은 누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매우 차가웠다. 학교에서 그녀의 별명은 여왕 전하였다. 비웃는 사람도 감탄하는 사람도 모두 그렇게 불렀다. 그런 여왕 전하 앞에서 올리비아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로즈메리, 오랜만이야.”
“…….”
“아, 안녕?”
“안녕하십니까, 산드리아 양.”
목소리에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테인은 얼굴을 찌푸렸고 폴은 아하하, 웃으면서 울상을 짓는 올리비아와 ‘뭘 잘했다고 울어.’라는 얼굴의 로즈메리 사이를 적절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녀들이 뭘 하고 있든 사실 별 관심이 가진 않았다. 내 관심은 오직 실리가 이 파티에 오느냐 마느냐 하는 것뿐이었다. ‘밤에 보자’는 게 파티에서 보자는 건 줄 알았으면 아까 내 심장이 좀 덜 충격받았을 텐데.
“대, 대공 전하.”
눈을 움직여 올리비아 산드리아를 보자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눈으로 플로어를 가리켰다. 자신에게 댄스 신청을 해 달라를 노골적인 요구였다. 나는 웃으면서 “실례.”라고 말하고 그녀를 지나쳤다.
이런 여자는 너무 많다.
나라는 사람을 보는 건지 나의 혈통과 작위를 보는 건지 이도 저도 아니면 부모님이 시킨 건지 알 수 없는 사람들. 이런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다.
“이런, 또 연초야?”
곰방대를 꺼내 입에 물며 소파에 앉자 다가온 남자가 키들거렸다. 후작의 외아들인 그는 당연히 후작 작위를 이을 몸이다. 래리우드 지 산드리아. 말할 것도 없이 올리비아의 오빠다.
“오랜만이야, 후배님.”
“오랜만이네.”
내가 성의 없게 대꾸하자 그가 멀리서 이쪽을 보며 입술만 깨물고 있는 자신의 여동생을 흘끗 보고 웃었다.
“좀 잘해 줘. 저만하면 예쁘잖아. 드물게도 진짜 신실한 편이라서 아주 성실해. 매일 밤마다 기도도 열심히 한다고.”
나는 진짜 산드리아 집안이 지긋지긋하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약혼녀가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지 않는 법을 배워야 성실하다고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놈의 약혼. 너는 그놈의 약혼을 언제까지 입에 달고 살 거냐. 야, 결혼은 다 계약이야. 노는 건 엄연히 다른 거라고.”
반왕파의 핵심 가문 중 하나이기도 한 이 집안은 언제부터인가 올리비아를 들이밀어 나와 연을 맺으려고 필사적이었다. 정말 정략으로만 다가오는 것이었다면 올리비아와 이야기하기 편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여자들도 몇 있었고 그들과는 이야기가 쉽게 끝났으니까. 그러나 올리비아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하는 말에 ‘저는 괜찮아요. 전하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니까요.’ 운운하는 바람에 나는 아주 정나미가 떨어져 버렸다.
“그래서 소중한 동생과 불장난이라도 하라고?”
“불장난도 괜찮지. 본인의 소원이라면야.”
“더러운 소리 하지 마.”
내가 이를 갈자 래리우드가 웃으면서 장난치는 척 나를 공격해 왔다.
“하여간 결벽증이야. 열다섯 살 많은 여자와 약혼했으니 망정이지 평범한 여자였다면 너의 그 결벽증에 질려 버렸을 거라고.”
순간 찔렸던 것은 오늘 낮에 본 실리의 드레스 차림 때문이다. 그녀도 여성이었다. 그렇다는 건 그녀도 남자를 볼 때는 평범한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시무룩해졌다. 물론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내가 아무 말 않자 래리우드가 한마디 더 했다.
“사람들이 널 보고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차라리 신관이 되는 게 나았을 거래.”
흥, 코웃음이 났다. 신관이라고? 내가 실리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면 절대 못 할 소리를 하고 있군 그래. 다른 여자에게 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여자와 달라붙는 게 더럽게 느껴진다고 해서, 내가 신관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그때였다.
“전하.”
실리가 나타났다. 아까보다 더 눈부신 모습으로. 전체적으로는 아까와 비슷한 차림이었는데도 더 눈부신 건 아마 시녀들의 솜씨 덕분이겠지. 아니, 샹들리에의 불빛 때문일 거다. 아니, 어쩌면 밤이라서 내 심장이 아까 바닥에 떨어져 제대로 기능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리.”
내가 그녀의 애칭을 불렀을 때였다. 옆에서 느껴지는 낌새가 이상해서 고개를 돌리자 래리우드가 눈을 크게 뜨고 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실리가 무례하다고 뺨을 때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지만 그녀는 그러는 대신 픽 웃었다.
“여기 이분은?”
실리의 질문이 조금 상처가 됐다. 마치 보호자가 피보호자에게 이 친구는 누구냐고 묻는 듯한 그런 어조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답을 안 할 수는 없어서 대답을 하려는데 래리우드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래… 래리, 래리우드, 산드리아, 시픈 후작의 장남입니다….”
“아, 아아. 제임스의 아드님이시군.”
시픈 후작은 아마 60대는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30대의 실리는 그가 마치 자신의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친근하게 말했다.
“아, 네, 네…. 그, 그… 아, 그,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사리안 양과 결혼할 이 친구의….”
뭐, 이 미친 새끼야?
‘사리안 양’이라는 무례한 호칭에 내 눈에 불꽃이 튀려는 순간.
“졸업은 했을 나이로 보이는데 곤란하네.”
실리가 웃으면서 말하고 내 앞을 슬쩍 막아섰다. 그녀는 내가 폭발하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뒤에서 이를 악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저 미친 새끼에게 당장 공격 마법을 쏟아 내 주고 싶었다. 왕궁에서 마법 사용은 금지라고? 알게 뭐야.
래리우드가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한 듯한 눈으로 어버버하며 물었다.
“예, 예?”
“경칭을 제대로 못 쓰는 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불편하거든.”
“……!”
래리우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위에 도움을 청하는 것 같기도 했고 누군가가 이 상황을 봤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그가 주변을 둘러보는 걸 멈추었을 때 실리가 말했다.
“다음에는 보다 좋은 날에 보도록 하지.”
실리의 은근한 축객령에 래리우드는 한마디도 못 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가 물러나는 걸 보면서 나는 좀 아연해졌다. 실리는 화를 내지도 않았고 딱히 래리우드에게 모욕을 준 것도 아니었다. 모욕이라면 실리가 더 크게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사리안 양이라니,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녀는 멀쩡했고 래리우드는 비틀거리고 있었다.
래리우드가 멀어지는 걸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분명 화가 났었는데 지금은 멍해졌다. 그녀는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을 주지 않았다. 나라면 분명 화를 내고 래리우드의 턱에 주먹을 박거나 결투를 신청하거나 했겠지.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몇 마디 말로 그녀는 래리우드를 쫓아 보냈다.
“머네….”
스무 살이 되어 그녀와 결혼할 수 있게 되면 나는 그녀에게 좀 가까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는 걸로는 가까워질 수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
창밖의 밤하늘은 어둡다, 내 마음처럼. 별은 반짝이겠지, 그녀의 눈빛처럼.
우리는 같이 있는데도 아득히 먼 그런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