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깜
그녀를 본다.
7년 만이었다.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매일 초조하게. 손바닥을 펴서 내려다봤다. 손바닥에는 빨간 자국이 나 있었다. 내가 매일 손톱을 손바닥에 박아서 생긴 자국이었다. 매일 그녀를 생각하며 손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내 습관이 되어 버렸다.
로드가 나가고 나도 나가기 직전 거울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거울 속 남자는 창백한 얼굴에 은실 같은 금발을 가지고 있었다. 색이 엷고 무표정한 젊은 남자. 실리가 좋아할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차라리 어릴 때가 나았을까.
방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어릴 때는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잖아. 남자로 보이는 건 무리였어도….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기엔 차라리 그게 유리할지도 몰랐다.
아니, 잠시 떠올랐던 생각은 곧 까맣게 지워졌다. 몇 번이고 그 위에 가위표를 친다.
고개를 돌려 보니 창밖은 여름이었다. 웃음이 났다. 자조인지 기쁨인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지만 늘 목으로만 건조하게 웃다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을 만끽하니 기분이 들떴다. 초조하면서도 행복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그때 당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거면 충분했는데 지금은 욕심이 더 몸을 부풀렸지. 이제는 그걸로는 부족해.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웃음이 났다. 왜 사람은 점점 더 많은 걸 바라는 걸까. 열한 살의 나는 지금 이 정도를 가질 수 있다면 원도 한도 없었을 텐데.
왜 스무 살의 나는 이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는 걸까.
“어머, 대공 전하.”
온실에 들어서자 소피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피는 새빨간 드레스를 입은 채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그녀보다 조금 작은 여자가 드레스를 입고 있는 게 보였다. 드레스? 누구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야 나는 소피와 실리가 티타임을 요청했다는 것, 즉, 드레스를 입고 있을 것이라는 걸 생각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건….
소피가 웃으면서 몸을 옆으로 비켜 주었다. 제일 먼저 보인 건 여자의 등 돌린 뒷모습이었다. 그녀는 내 온실의 난초를 보고 있었다. 온 세상의 희귀하고 아름다운 꽃과 약초들은 다 모아 놓은 나의 온실은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중 무엇이 그녀의 눈길을 끌었는지 궁금하면서도 그녀의 등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파란색 무늬가 있는 아이보리색 드레스였다. 도자기 모양의 드레스는 우아했고 복잡하게 땋아 하나로 둥글게 말아 올린 머리는 깨끗한 목덜미를 더 가녀리게 보이게 했다. 드레스의 푸른색보다 조금 더 짙은 청색 리본이 등 뒤를 장식하고 있었고 날씬하게 강조된 허리는 한 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등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눈부신 흰 피부와 햇살을 받아 더 반짝이는 금안이 보였다. 화장을 해서 입술은 기억보다 더 붉었다. 눈가에 점을 찍은 건 아마 요즘 유행이라서 시녀들이 해 준 것 같았고, 목걸이는 늘 차고 다니는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그 목걸이 외에는 아무런 액세서리도 하고 있지 않은 게 그녀다웠다.
나는 7년간 많이 변했는데 그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아서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약간 변한 것이라고는 그녀가 좀 작아진 것뿐일까. 아니, 내가 큰 것이겠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그녀가 작고 연약해 보였다. 언제나 크던 그녀가, 최소한 나와 눈높이가 같았던 그녀가, 지금은 나보다 훨씬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바람이 그녀를 살짝 흔들고 지나갔다. 그녀의 드레스 자락과 머리카락 조금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나는 말문을 잃고 그저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하.”
그녀가 말하는 순간에도 나는 꿈속에 있는 것 같아서 쉽게 입을 열 수도 다가갈 수도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픽 웃는 특유의, 모든 걸 달관한 듯한 웃음도 7년을 장대를 짚고 뛰어넘은 것처럼 기억과 똑같았다. 꿈. 멍하니 현실과 꿈 사이에서 헤매며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이 재회를 꿈꿨던가. 자면서도, 그리고 오후의 햇살 한가운데서도 그저 멍하게 머릿속으로 꿈꿨던 그 수많은 꿈의 한 조각이 너무 완벽하게 펼쳐져 있어서 나는 손끝 하나 까딱하기 어려웠다. 뭐라도, 뭐라도 실망할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아름다움이 훼손되었다든가, 실제로 보면 내 마음과 현실의 차이가 보일 거라든가. 그랬었는데 현실은 상상과는 달랐다.
“폴! 맙소사, 폴! 이게 얼마 만이니!”
꿈에서 깬 건 그녀로 인해서도, 나로 인해서도 아니었다. 소피의 반가움에 찬 목소리가 나를 꿈이 아닌 현실로 인도했다. 꿈과 현실은 고작 반걸음 차이인데 현실은 꿈보다 더 아름다웠다.
실리가 있었다.
소피가 폴을 상대로 수선을 떠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고 눈앞에 보이는 건 그저 실리뿐이었다. 실리는 내가 대답이 없자 의아하면서도 약간은 멋쩍은 표정으로 “전하?”라고 나를 불렀다. 한 손에 든 부채를 만지작거리면서.
조종되는 것처럼 저벅저벅 걸었다. 내가 걷는 건지 이끌려 가는 건지 스스로도 영 알 수가 없었다. 충동이 내 몸을 가득 채웠다. 나는 기꺼이 그 충동에 내 몸을 맡겼다. 손을 뻗어 그녀의 부채를 든 손을 잡아 부채를 뺏고 그 빈손에 입을 맞췄다. 살결에서 복숭아 향이 났다. 눈앞이 핑그르르 도는 기분이었다.
“잘 돌아왔어.”
그녀의 몸에서는 늘 꽃향기가 났었지만 이런 과일 향이 난 건 처음이었다. 먹음직스러운 향. 손이 작았다. 그녀의 손이 작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이 손으로 나를 안아 올렸었구나. 그녀가 나를 구했을 때를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를 구한 손이 이렇게 작다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새하얀 손. 단정한 손톱.
목이 바짝 말랐다.
실리의 손이 적당한 시간을 주고는 빠져나가려 했지만 나는 그 손을 놓아주지 못했다.
“전하?”
“결혼식을, 앞당겼으면 해.”
충동적으로 그냥 아무 말이나 꺼낸 것이었다. 손을 놓아주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꺼내 놓고 나니 만족스러웠다. 결혼하고 싶었다. 이 여자의 남자가, 가족이, 유일한 것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의 만족과는 달리 실리는 황망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당혹하다 천천히 웃으며 손가락으로 내 손을 도닥거렸다.
“지금도 충분히 빠릅니다, 전하.”
“열흘 뒤로 당길 수 있어.”
물론 무리를 해야 하긴 하지만 그녀와의 결혼식은 1년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으니 가능했다. 머릿속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말하자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전하, 지금은 여름입니다. 대부분의 귀족이 영지에 머물고 있을 때지요. 그들은 열흘 안에 옌선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
“그리고 결혼을 하는 순간 하스트레드와 이르시아스는 거대한 연합체가 됩니다. 장점도 단점도 있지요. 눈에 띄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모쪼록 부탁드립니다.”
열에 들떴던 머리에 이성이 돌아왔다.
그래, 이 결혼은 하스트레드와 이르시아스의 연합이다. 그걸 잊지 말아야 했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많았다. 다시는 내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내가 머리에 새겨 두어야 하는 수많은 것들이 있었다. 마음만으로는 아무것도 가질 수도 지킬 수도 없다.
“응.”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실리가 “감사합니다, 전하.”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 소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왜 이렇게 얼굴이 반쪽이 됐니!”
소피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 목소리는 클 뿐 아니라 미묘하게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폴에게 식사도 제대로 안 주었느냐는 듯한 어조라 나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소피, 폴을 몇 년 만에 본 거 아니야?”
“그렇죠, 전하. 제가 아이를 몇 년 만에 봤는데 아이가 세상에….”
“그럼 얼굴이 반쪽이 되는 건 무리 아닐까.”
얼굴이 더 커지면 커졌지, 반쪽이 되는 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냐는 내 말에 소피가 나를 흘겼다.
“전하, 제 아이의 얼굴이 수척해진 게 정말 보이지 않으십니까?”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예전엔 안 그러시더니 무척 차갑게 성장하셨군요, 전하!”
“본래 이런 성격이었어.”
어머, 어머, 어머! 소피가 과장되게 몸을 흔드는 동안 폴은 자신의 모친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낯설었다. 늘 웃고 소란스럽고 즐겁고 해맑던 폴이 아니라 뭔가 복잡한 표정이었다. 거의 7년 만에 보는 모친이었을 것이다. 내가 실리를 보지 않음에 따라 나의 시종들도 하스트레드와는 거의 접점이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폴은 뭔가 오랜만에 만난 모친을 상대로 불편한 기색이었고 그걸 감추려 애쓰고 있었다. 사실 실리나 소피는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눈치채지 못하기엔 폴과 너무 오래 같이 있었다.
‘왜 그래.’
소피의 뒤에서 입만 벙긋거려서 묻자 폴이 억지로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지만 절대로 아들이 어머니에게 보일 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아니, 물론 나와 같이 학교를 다녔던 귀족가의 자식들은 제 부모와 친한 경우가 드물긴 했다. 친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원수에 가까운 원한을 가진 경우도 꽤 잦게 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휘두르는 채찍에 맞아 한쪽 귀가 영원히 안 들리게 된 이도 있었고, 어머니의 집착 때문에 학교가 제일 편한다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폴은 그럴 만한 이유가 없어 보였는데.
이상한데.
나에게 굳이 친구가 한 명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폴일 것이다. 더 가까운 사람은 테인이나 로즈메리지만 그들은 내게 친구일 수는 없다. 차라리 가족이라고 한다면 모를까, 친구라고 하기에 우리는 너무 얽혀 있다. 하지만 폴은 적당히 멀어서 상식적으로 말하는 친구에 가장 가깝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내가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토록 오래 같이 있었는데 이렇게 낯선 얼굴이라니.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실리는 웃고 있었다. 늘 웃는 얼굴이긴 했지만 그녀의 눈이 나를 살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깨달았다. 실리는 눈치챈 것이다. 폴이 이상하다는 것도, 폴이 왜 저러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