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깜
요즘 옌선에서는 ‘영애’들의 티타임 놀이가 유행이다. 그녀들은 낮마다 마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자기가 정해 둔 저택에 가서는 티타임을 청하는 것이다. 그럼 그 집주인은 그녀들의 행차에 고마워하며 그녀들에게 가능한 화려한 티타임을 제공하는 것이 예의였다.
그리고 요즘 나는 그녀들의 타깃이 되어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거절해.”
내 집이 난공불락의 요새이기 때문이다. 선택받은 저택이 되어 기뻐하는 것 같던 집사가 조금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내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교계에 데뷔한 지도 2년이 지났다. 나는 적당히 사람들과 교류했다. 커 가면 커 갈수록 나는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된다. 나는 실리와는 다르다. 그녀의 찬란함, 깨끗함, 단정함, 그런 것들과 나는 거리가 멀다. 그래, 어쩌면 나는 당신처럼 살 수 있었을지도 몰라. 당신과 함께한 그 시절에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다 지난 일이지.
“오늘 밤에도 나들이를 가시나요, 전하?”
로즈메리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물었다. 테인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런 일에 대체로 둘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로즈메리는 종종 옷을 야하게 입고 가면을 쓴 채 나와 동행하기도 했지만 테인은 동행하는 내내 심기가 불편한 걸 간신히 참아 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생각이야. 여린 신사분들께서 굳이 내게 돈을 상납하시겠다는데 받아 주지 않아서야 예의가 아니지.”
내 말에 로즈메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가여우신 귀족 나리들.”
나는 의외로 도박에 소질이 있었고, 내 회계사 리살은 이제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제가 대공 전하의 일을 봐 드리고 있는 것인지 어떤 천재 도박사를 돕고 있는 것인지 헷갈립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나는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재산들은 또 수많은 수익을 창출했지만 그중 도박으로 얻는 이득이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말들이 많아요.”
테인의 말에 폴이 테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같이 맛있는 술 마시면서 구경이나 하자. 대공 전하께서 또 다 쓸어 오실 텐데, 뭘.”
“바로, 이겨서 말이 많은 거야, 폴. 무슨 뜻인지 몰라?”
테인이 정색하자 폴이 기분 풀라며 테인의 접힌 미간을 손가락으로 눌러 폈다.
“지면 말이 적을까? 잘 모르겠는데.”
“도박을 안 하면 말이 적지.”
“음, 존재를 안 하는 게 말이 제일 적지 않을까.”
폴의 말에 테인이 눈을 크게 떴다. 폴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가끔 정곡을 찔렀다. 테인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없었다면 조용했을 것이다. 내 존재는 지금 시끄러운 문젯거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쨌든 결혼식을 앞두고 도박장에 다니시는 건….”
테인이 또 잔소리를 시작하려 하는데 이번에 막은 건 로즈메리였다.
“그래서 들뜬 티라도 내셔야 해? 그럼 더 이상하지 않겠어?”
“…….”
“열다섯 살 연상의 여자와 결혼하시는 거야. 너 정확히 판단해. 네가 도박을 싫어한다고 말 막 하지 말란 말이야. 전하께서 사랑이라도 하는 것같이 보이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사랑 .
그 단어는 테인에게 어떻게 다가갔는지 몰라도 내 폐부에는 깊숙이 꽂혔다. 사랑. 나는 그 단어로 실리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나의 가족, 구원자, 친구, 선생… 여신. 세상. 모든 것. 그렇지만 사랑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게 뭔지 알지 못하므로.
하지만 사랑이라는 게 한 명의 타인이 세상의 모든 것처럼 느껴지는 거라면 내 감정은 확실히 사랑에 가까울 것이다.
“그럼 변태란 말이야!”
로즈메리가 고함을 쳐서 나는 깜짝 놀란 티를 낼 뻔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바라볼 수 있었다. 변태. 무슨 말인지는 안다. 그로스랜에서 결혼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결합이 아니라 신성한 계약이다. 이 신성한 계약에 사랑이라는 동물적 감정을 집어넣는 건 야만적인 걸 넘어 변태적으로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보통 사람들에게 사랑해서 하는 결혼은 천하다는 것 이상의 위화감을 주기 마련이다. 마치, 교회에서 말의 교미를 보는 듯한 기분이랄까.
교미… 라.
말이 교미하는 걸 본 적이 있다. 학교 친구들은 웃으면서 음담패설을 나눴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곰방대만 물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 내가 연초를 배운 건 실리의 영향이 컸다. 그녀는 늘 곰방대를 물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 곰방대를 물고 있는 입술에서, 묘하게 야한 느낌이 들었다. 미지근해야 할 곰방대가 뜨거운 듯한 느낌이 들어서 참을 수가 없어졌다.
“전하께 누가 되는 소리라는 걸 좀 알고 지껄여, 알았어?”
로즈메리가 테인을 구박하고 다시 내 매무새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내 매무새를 바로 잡기 위해 들고 왔던 도구들을 챙겨서 밖으로 나가면서 테인을 한 번 노려보는 걸 잊지 않았다.
변태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첫 자위도 그녀를 생각하며 했으니까. 성적인 그 어떤 것도 그녀를 통해서가 아니면 느낄 수 없었다. 내 세상엔 그녀 하나밖에 없으니까.
“…미안.”
폴이 나를 보며 사과했다. 테인이 나를 보다가 “고의는 아닙니다. 로즈가 생각보다 조금, 어떤 부분에서는 눈치가 없어서요.”라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내 감정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사랑? 성욕? 어쨌든 내가 실리를 이성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겠지. 알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같은 학교, 같은 기숙사에 있었다. 오랜 시간 같이 있다 보면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 같은 것들.
“너희가 사과할 문제는 아니지.”
또.
“로즈가 사과할 문제도 아니고.”
그리고.
“나도.”
아무도 사과하거나 변명할 문제가 아니다. 이건 그냥 그렇게 되어 버린 일이니까. 내 말에 테인이 고개를 깊숙이 숙여 동의를 표했고 폴은 내게 다가와 내 팔을 몇 번 쓸어 주었다. 위로라도 하는 것처럼.
***
실리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린 건 옌선 북쪽 성문에 드래곤의 머리가 걸리면서부터였다. 실리는 드래곤의 머리와 함께 전설에 나오는 실로리안 하프를 왕에게 바쳤다고 했다. 실로리안 하프. 소유주에게 행복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파멸을 선사한다는 그 하프를 실리가 왕에게 바쳐 의도를 곡해받을 위험을 감수했을 리가 없으니 하프는 왕이 주문하여 가져다준 것이리라. 왕이 그 하프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닐 테니 누군가에게 주고 싶었던 것일 텐데 누구려나. 하프를 선물받을 이를 두고 사람들의 추측이 무성했다.
나는 나에게 주든, 그가 싫어한다는 왕세제, 즉 레오날드 삼촌에게 주든 알 바 아니었다. 세상에 비가 오든 번개가 치든 햇빛이 눈부시든 다 상관없었다. 실리가 도착했다. 7년 만이었다.
그녀를 보러 가야 하나, 생각하다가도 7년 동안 아무런 교류가 없었던 것에 발목을 잡혔다. 보러 갈 명분이 없었다. 내가 여자였다면 티타임 방문이라도 해 볼 텐데 나는 남자였고 그런 명분은 도저히 찾아낼 방도가 없었다. 오전 내내 방을 빙빙 돌면서 명분을 찾고 찾다가 결혼식에 대해 상의를 해 보자고 할까, 생각도 했다. 그러다 그건 좀 약한 거 같았다. 이미 하스트레드 쪽과 이르시아스는 양쪽의 고용인들이 결혼식에 대한 준비를 거의 끝내 놓은 상태였다. 그녀는 무엇이든 좋다는 식이었기 때문에 결혼식은 철저히 내 취향에 맞춰서 진행되었다. 그러니 그녀에게 물어볼 일 같은 건 없었다. 우린 둘 다 고아였고 친척들은 하나같이 적대적이어서 협조를 구할 일 자체가 없었다. 그녀의 친척들은 나를 보러 몇 번 찾아오기도 했었는데 그녀에게 어찌 대했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나는 그들을 모욕했고 그들은 뒤에서 나에 대해 험담을 일삼고 있다고 들었다. 나의 친척들은 그녀를 무서워하거나 부려 먹거나 나를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뿐이었고.
뭐가 있을까.
한참을 생각한 끝에 눈에 보이는 건 어린이용 검이었다. 그녀가 내게 준 선물. 그녀가 썼던 검. 아름다우면서도 실용성이 높은 그 검은 내게 검술의 기초를 알려 주었다.
검을 돌려준다고 할까.
돌려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명분이 아니면 그녀에게 가 볼 이유가 없어 보였다. 결혼식 날짜까지 기다려서 그녀를 만나도 되지만 솔직히 그때까지 기다릴 만큼 내 사정이 여유롭지 못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매 순간이 초조해 미칠 것 같았다. 내가 결혼식 날까지 기다렸다간 아마 심장이 찢어져서 죽을지도 몰….
“전하.”
로드였다. 흘끗 창밖으로 보니 어느새 낮 시간이었다.
“티타임은 무조건 안 돼.”
지겨운 나머지 말이 싸늘하게 나갔다. 그러자 로드가 눈을 깜빡이더니 난처한 얼굴로 문가를 떠나지 못했다. 내가 “로드!” 하고 주의를 주자 그가 “그래도…. 약혼녀신데.” 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러고는 “알겠습니다.” 하고 등을 돌렸다.
약혼녀 같은 소리 하고 있, …뭐?
나도 모르게 달려가서 로드의 어깨를 잡았다. 방금, 누구라고?
“누구?”
“하스트레드 공작 각하께서 히옌 남작 각하와 오셨습니다…. 송구합니다. 소인의 짧은 생각으로는 약혼녀분이시라 들이시는 게 좋다고 생각하여서….”
로드가 어물어물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믿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인 로드의 정수리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누가 와? 도리어 현실감을 준 건 실리의 방문이 아니라 소피가 왔다는 사실이었다. 소피는 폴이 보고 싶었을 테니까. 아, 소피가 실리를 데려왔나 봐. 그럴 수 있어, 그건 가능하지.
그래서 내가 지금 얼굴이, 몰골이, 어떻지?
거울에 비친 나는 며칠 동안 지켜봐 왔던 그대로였다. 사람들이 많이들 감탄했던 모습 그대로였고, 나도 그들이 왜 감탄하는지는 알지만, 그 감탄에 진심으로 동의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내게는 그저 내 얼굴일 뿐이다.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로드에게 “잘했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얼이 빠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예?”
“잘했다고.”
“그, 그럼…?”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그의 얼굴이 확 폈다.
“모시겠습니다. 어디로, 어디로 모실까요, 주인님?”
“응접실, 아니, …온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