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배의 꽃-45화 (44/94)

<☆45>깜

소피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이윽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녀가 아주 기분이 나쁠 때에만 나오는 버릇이라는 걸 알아서 우리 모두 잠시 침묵했다. 그녀와 늘 실랑이를 벌이기는 해도 결국 제일 친하다고 할 수 있는 크라이스가 그녀의 곁으로 가서 “왜? 왜 그러는데?”라고 물으며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안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 그렇게 묻고 있는 크라이스의 눈에 대고 소피아가 말했다.

“죽기 전에 하프를 안고 울더라.”

“뭐?”

“처음부터 이랬어야 하는데.”

“……?”

“그게 그 녀석 유언이야. 처음부터 이랬어야 하는데. 시발, 그 녀석 인생을 모르니 내가 뭐라고 할 말은 없지만 도대체 인생이 어땠기에 남의 하프에 숟가락 얹은 죄로 죽는 주제에 웃을 수가 있는지 알 수가 없네. 기분 더러워서.”

침묵이 흘렀다.

“시발, 내가 왜 이런 기분을 겪어야 해.”

소피가 욕설을 뱉으면서 다시 한번 침을 뱉었다. 참을 수가 없는 듯한 그녀의 태도를 보며 크라이스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우리 중에 사람을 죽이는 걸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넘어서 거의 즐긴다에 가까운 유일한 사람인 소피지만, 그녀는 적을 해치우는 걸 즐기는 것이지 나의 편을 처리하는 걸 즐기는 건 아니었다. 그런 일에는 누구보다 저항감이 심한 사람이었다.

“가족이 죽었어.”

리온이 다시 가던 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이번에는 나와 크라이스, 그리고 소피아가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우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녀석이 죽인 사람이 복수했다지.”

“애가 죽었다는 이야기야?”

소피가 물었다. 그러자 리온이 아니, 하고 대답했다.

“부인과, 아이, 부모님, 그리고 형제까지. 전부 몰살.”

“…잔인하네.”

“자세히는 말 안 하던데 그쪽도 나름대로 그런 원한을 가질 만했나 보더라고. 그래서 복수도 못 하고.”

“…….”

크라이스와 소피가 아무 말도 못 하는 걸 보면서 나는 얼굴만 어렴풋이 알았던 기사를 떠올렸다. 그는 하스트레드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분명 내가 기억하기로….

“근위대 출신 아니었던가.”

혼잣말처럼 묻자 리온은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근위대 출신의 인물이 가족이 몰살당해도 복수조차 생각하지 못할 일을 저질렀다는 건, 대체로는 임무를 다하다가 원한을 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 기사는 그저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그 결과 가족을 잃고 부평초처럼 떠돌다 자유를 가장 우선시하는 하스트레드까지 와서는 왕의 하프 따위에 목숨을 잃었던 셈이 된다. 입맛이 썼다. 그런데 그는 웃으며 죽었으니 어떻게 된 일일까.

대답해 줄 사람은 이미 없다.

하프가 있는 막사에 도착했을 때 우리의 분위기는 더 처질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이 분위기를 바꾸고 싶은지 소피아가 화제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이네요. 주군, 옌선에서는 결혼식 준비가 거의 끝났겠죠?”

픽, 웃음이 났다.

“그랬겠지.”

더는 말하지 않았다. 7년은 너무 긴 세월이었다.

♡  여덟 번째 뒷장. 시간이 필요했다  ♡

세상이 밝았다.

그녀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며칠 전부터 옌선에 파다했다. 왕명으로 이제는 마물들의 왕이 아니라 정말 드래곤까지 토벌하러 간 그녀가 진짜로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영예를 얻고 돌아오고 있다는 말에 좀 아득해졌다. 그녀는 나비, 아니 벌새 같다. 내가 아무리 쫓아가도 그녀는 먼 곳으로 날아간다. 벌새. 나는 내가 생각한 단어에 웃음이 났다. 그런 말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지. 그녀에게 어울리는 건 절벽의 꽃이다. 최소한 내게는 그래.

“오늘도 꽃단장이시네요, 전하.”

폴이 들어오며 웃었다. 내 옷매무새를 바로잡아 주고 있던 로즈메리가 곱게 눈을 흘겼다.

“당연히 꽃단장을 해야지. 누가 돌아오시는데.”

폴과 로즈메리는 신분 차이가 났지만 둘은 서로에게 편하게 대했다. 둘 다 나의 시종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폴의 성격이 한몫했다. 그는 언제나 폴 히옌이었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 총명하지도 않았고 그와 있는 게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늘 폴과 있고 싶어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바짝 곤두선 정신이 그하고 있으면 조금 누그러졌기 때문이다.

“결혼식이 성대하다고 다들 말이 많아요.”

테인이 한마디 했다. 내 정치적 입지는 늘 폭이 좁은 외나무다리에 서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했고 테인은 그런 나를 걱정하고 방어해 왔다. 그는 내가 결혼식을 수수하게 치르는 게 좋겠다고 주장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당연하지 않나? 그럼 대공 전하와 공작 각하의 결혼식인데 성대하지 않고 조용할 줄 알았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상하다.”

폴은 내 책상에 걸터앉아 어린애처럼 다리를 까딱까딱하며 사람들을 정면으로 비웃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음험하거나 한 게 아니라 단순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폴다웠다. 다들 이상해, 당연히 성대한 결혼식이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참 해맑았다.

“넌 참 인생 편하게 살아서 좋겠어요, 남작 각하?”

우리보다 세 살 어리지만 기어코 우리와 같은 학년에 입학했고 같이 졸업한 로즈메리가 혀를 찼다. 그녀도 폴을 좋아했지만 그녀는 가끔 폴의 이 해맑음을 못 견뎌하기도 했다. 아마 지금이 후자인 모양이었다. 나는 로즈메리의 어깨를 잠깐 도닥거렸다. 로즈메리는 누이의 심정으로 우리 셋을 돌봤는데 우리 셋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분통을 터뜨렸다. 그녀는 언젠가 과일주에 가까운 아주 도수가 약한 술을 먹고 취해서는 ‘너희는 돌아가면서 나를 하루에 한 번씩 열받게 해!’라고 삿대질을 한 적이 있었다. 취한 사람 앞에서는 공작이고 남작이고 눈에 뵈는 게 없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사흘간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미안한 감정도 있었지만 아마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해서인 것 같았다. 그때 일은 아직도 우리 사이의 금구였다.

“응, 좋아.”

폴이 웃으면서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인이 픽 웃었고 로즈메리는 눈을 흘겼다. 나도 웃음을 조금 흘렸지만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초조했다. 거울 속의 남자는 꽤 잘생겼고 나도 그걸 안다. 하지만 그녀는 서른다섯이다. 스무 살짜리 남자가 그녀의 눈에도 남자로 보일까?

…남자긴 할까.

“아름다우십니다.”

로즈메리가 내 옆에서 뿌듯하게 말했다. 나도 내 외모가 어떤지는 안다. 많은 사람이 내 외모를 칭송했다. 그들의 감탄, 칭찬, 질시, 그리고 나에 대한 집착, 다 봐 왔다. 가끔은 그것들을 이용해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늘 그녀를 생각했다. 나도 내가 나쁜 짓을 했다는 건 알지만 그런 짓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절이 있었다.

당신에게도 내 외모가 조금은, 혹하는 부분이 될까.

나는 그렇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데.

그녀에게 내 외모가 통할지 어떨지, 나라는 인간이 잊혀지지는 않았을지 계산해 보고 혹 잊혀졌다면 다시 되돌릴 수 있을 만큼 나에게 가치가 있을지 상상의 나래를 펴 보고 희망을 가졌다가 절망에 빠지길 반복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그 7년간 나는 그녀에게 연락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녀가 연락을 해 온다면 당연히 답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먼저 할 생각은 없었다. 자존심 같은 건 아니었다. 내게 자존심은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그녀를 대상으로 한다면 그것도 하찮아졌다. 그녀는 나의 유일한 것이니까.

그녀를 뭐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가족? 연인? 친구? 보호자? 그 모든 것. 그리고 그 모든 걸 넘어서는 어떤 존재. 구원자. 그래, 거기에 가장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나를 구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녀가 나를 구원하는 게 끔찍하다.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그녀가 나를 다르게 인지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그녀를 무엇으로든 인지할 수 있었다. 나의 여신. 그녀는 나에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나는 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떠나는 데 동의했고 그녀에게 결코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어린애로 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많이 변했어, 실리.

하지만 내 안은 그대로지. 당신은 어때.

손끝이 저렸다. 가슴이 떨리고 눈가가 뜨거웠다.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들뜬 것 같기도 해서, 내 몸 상태를 나도 알 수가 없었다. 약을 먹어야 할 정도는 아닌 거 같아. 스스로 몸 상태를 진단해 본다. 마법학부에 다니게 되면서 가장 좋은 것은 내 몸을 스스로 진단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더는 오르센이나 아비드 같은 놈에게 내 몸을 농락당하지 않아도 된다.

더는 당신에게 짐이 되지 않아.

어지러워서 눈을 감았다. 그녀가 옌선에 곧 도착한다는 소문은 이미 파다하게 났는데 그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날수록 초조함이 내 살갗을 긁어 대고 내 혈액을 빨아 먹는다. 보이지 않는 벌레가 내 손끝을 갉아 먹고 있다.

눈꺼풀이 떨렸다.

“전하.”

누군가가 불러서 고개를 돌렸더니 집사 로드가 내 방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입학을 하면서 이스트럼을 나와 나의 타운하우스를 구입했다. 타운하우스를 구입하고 일부러 공사도 진행했다. 사람들은 내 재력에 대해 수군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내게 돈이라면 넘치도록 많았으니까. 나는 옌선에서, 아니 그로스랜에서 돈이 가장 많은 사람이었다. 한 번의 도박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도 더욱 돈은 많아졌다. 돈은 돈을 불러왔다. 물론 옌선의 귀족들은 나에게 좋은 말을 하진 않았다. 귀족이 돈을 번다고, 천하다고, 역시 바깥에 험하게 구른 티를 낸다고 다들 험담을 해 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돈을 그렇게들 함부로 써 대면서 돈을 버는 걸 혐오하고, 그러면서도 돈에 혈안이 되어 있는 위선적인 인간들. 아마 나는 그들의 말마따나 험하게 몇 년 굴러서 천해진 모양이다. 귀족들의 위선적인 모양새가 종종 역겹곤 했다.

내 집사 로드는 나의 그런 성향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종종 내 기분을 거스를 소리를 잘도 했는데 가령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산드리아 후작 영애께서 티타임을 청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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