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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44화 (43/94)

<☆44>깜

친구.

아니, 그 단어는 옳지 않다. 우리는 마치 안개 숲에서 길을 헤매다 만난 조난자들처럼 둘이 같이 걸었던 것 같다. 그래, 그때는 세상에 서로밖에 없는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서로를 경계하기도 했고 가끔은 서로가 있는 것이 더 힘들 때도 있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서로가 전부가 되었다. 그러나 조난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우리는 결국 안개 숲을 나왔다.

그리고 감사의 인사를 하며 헤어진 그런 사이가 됐다.

“뭐, 아쉬울 일은 아니지.”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해 버렸다. 내 옆에서 걷던 크라이스가 “예?” 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요즘 부쩍 혼잣말이 많아진 것 같다.

“아니야, 혼잣말.”

내가 고개를 숙이며 웃자, 크라이스가 나를 주의 깊게 바라보는 눈길이 옆얼굴에 느껴졌다.

“괜찮으십니까? 오늘 안색이 조금 안 좋아 보이시는데요.”

“잠이 좀 모자라서 그래.”

“아무래도 이번 원정은 좀 과했죠.”

“과하다기보단 놀라웠지. 그걸 찾아오라고 우리를 보낸 전하의 결단력에도 감탄할 따름이고, 실제로 그 물건이 존재했다는 것이 더 놀랍고.”

왕은 전설에 나오는 실로리안 하프라는 물건을 가지고 싶어 했다. 어느 신이 땅에 두고 갔다는 이 하프는 스스로 연주한다고 했다. 그 하프에게 주인의 피를 먹이면 하프는 스스로 연주를 시작하고 주인이 되는 자는 연주를 들을 때마다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신기한 이야기가 전해졌다.

실로리안 하프는 참 기묘한 물건이었다. 문헌들에 따르면 ‘실로리안 하프는 아주 보잘것없이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어두운 떡갈나무로 만들어져 있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나무는 아닌 그 어떤 것으로 만들어진 하프이며 줄은 심지어 조금 느슨하게 늘어져 있어 보기도 흉했다. 게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가 묻어 있는지 얼룩이 지독하게 많았다. 그 하프를 처음 본 권력자들은 하프의 생김새에 진저리를 쳤다고 묘사되었다.

하지만 하프는 언제나 사랑받았다. 주인들은 하프에게 늘 피를 먹였고 하프에게 위로받았다. 하프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었다. 흉물 같은 하프는 늘 엄청나게 비싼 천에 감싸인 채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되어 가장 좋은 곳에 장식되었다.

주인이 죽으면 하프는 늘 자취가 묘연해졌다. 하프란 부피가 큰 물건이다. 그런데도 늘 그 물건은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이 물건을 도대체 어디에 쓰려는 것일까요?”

나와 함께 실로리안 하프를 둔 막사로 걸으며 크라이스가 물었다.

“글쎄.”

“주인들은 행복해했다지만 사실 그 주인들의 말로가 좋은 건 아니었잖습니까.”

실로리안 하프의 주인들은 그 끝이 씁쓸하기로 유명했다. 모든 걸 빼앗긴 채 하프와 남겨져 눈을 감는다, 그리고 하프는 사라진다. 이것이 실로리안 하프가 얽혀 있는 이야기들의 공통점이다. 그런데 굳이 이 하프를 찾길 원했다는 건 본인이 가지고자 한 건 아니었겠지.

누구에게 그 하프를 줄 생각으로 구해 오라 한 것인가.

“그러니까 구해 오라 했겠지.”

내 말에 크라이스가 혀를 찼다.

꿈에서는 7년 전의 크라이스도 보였었는데. 그는 그때 집안과 기사단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었다. 작위를 받지 못하는 자신의 입지에 불안함도 많이 느꼈고 양 집단을 오가면서 정보도 흘렸었다. 그가 정보를 흘리려고 한 게 아니라 양쪽 다에게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싶다 보니 무리하게 된 결과에 가까웠다. 그리고 지금의 그는….

“하프를 선물하는 것조차 생각해야 하는 게 정치라니, 저는 귀족은 못 해 먹겠습니다, 진짜.”

많이 변했다.

일단 그는 결혼했다. 상대는 평민 여성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분노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그와 비슷한 처지의 귀족 여성과 결혼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니, 사실 그의 아버지는 어쩌면 크라이스가 나를 잘 유혹해서 내 결혼 상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꿈도 조금 꿨던 사람이었다. 물론 그 가능성에 큰 무게를 싣지는 않았지만 그럼 참 좋겠다, 정도의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아버지에게, 공작 며느리를 나름대로 상상하던 아버지에게 평민 며느리를 데려갔으니 불에 덴 것처럼 놀란 건 당연할 일.

하지만 그 평민 여성은 아주 똑똑하고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라르투르 의상점의 수석 디자이너였고 크라이스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사람이기도 했다. 크라이스의 부친, 오르소 백작이 아들을 가문에서 쫓아내겠다고 펄펄 뛰었을 때 그 여성은 어차피 작위를 물려줄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응수했다. ‘유산이라면 필요 없고, 혈연이라면 가문에서 제한다고 끊어지는 게 아니에요!’라는 그녀의 한 치도 틀리지 않은 말은 오르소 백작의 안면을 정통으로 강타했고 그는 두고두고 자신에게 감히 대든 이 며느리를 미워했지만 크라이스는 아주 속 시원해했다.

[  “이상한 일이죠? 저는 평생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가문에서 쫓겨난 날, 진심으로 기뻤습니다.”  ]

크라이스는 웃었다. 아주 속이 뻥 뚫렸다며 그날 아내와 같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고 즐겼다고 그는 행복해했다. 저주에서 풀린 기분이 이럴 거라면서. 그는 아내를 사랑하고, 물론 가족도 사랑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면 어쩌겠느냐며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더 이상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리온은 ‘지금의 아내와 문제가 생기면 또 그 지랄 나는 거 아닙니까?’라고 빈정댔지만 나는 크라이스가 지금의 아내와 헤어지지 않길 바랐다. 그는 정말 행복해 보였기 때문에.

그와 아내 사이에는 아이도 생겼고 그는 평범한 아버지가 되었다. 예전에는 아이에게 자신의 운명을 대물림하기 싫다고 말하고 다녔던 그는 아이에게 ‘안전한 곳에서라면 하고 싶은 걸 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됐다. 보기 좋았다.

이렇게 변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음 해 급여 인상률은 조금 더 높게 요구해야 할 거 같아요.”

이렇게 안 변하는 사람도 있다.

리온이 우리 쪽으로 따라붙으면서 투덜거렸다.

“드래곤 레어에서 물건을 훔쳐 오라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안 훔쳐 왔잖아.”

“…….”

“당당하게 싸워서 가져왔지.”

“예, 예. 드래곤 고기도 먹어 보고 아주 황홀합니다. 아, 진짜 이번엔 위험했어요. 둘이나 죽었고….”

리온이 짜증을 냈다. 마물들을 토벌하거나 전장에 동원되거나 이런 건 다 이해하지만 하프 하나를 위해 드래곤 레어를 박살 내라는 건 지나친 명령이다. 게다가 계약 위반의 여지도 존재했다. 왕은 계약자가 단독이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집단이다. 내가 제대로 계약을 지키지 않는다고 여겨지면 하스트레드의 기사들은 떠날 것이다. 내가 계약을 수호하는 것. 하스트레드의 자유와 명예와 이름값을 지켜 내는 것. 그것이 나의 소임이다.

“하지만 솔직히 하프 빼고는 전부 우리 몫이었는걸. 냉정하게 말하면 남는 장사였잖아, 리온.”

“짭짤하긴 했지만.”

“하프가 존재한다는 거, 그걸 가지고 있는 드래곤이 누군지, 그 레어는 또 어딘지, 이런 걸 알아낸 건 모두 왕의 정보원들이었다고.”

크라이스의 지적에 리온이 “아, 너는 누구 편이야!”라며 신경질을 냈다.

“당연히 나야 네 편이지만.”

“웃기지 마, 이 이중 첩자 새끼야.”

“옛날, 옛날 얘기야.”

둘이 아웅다웅하는 걸 구경하며 두어 걸음 뒤에서 걷고 있을 때였다. 우리의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셋이야.”

나와 크라이스, 그리고 리온이 의아해져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검은 셔츠와 검은 가죽 바지를 입고 검은 부츠를 신은 소피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우리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혀를 찼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주군, 방금 사망자는 셋이 되었습니다. 한 명을 바로 처형했습니다.”

“왜?”

“하프를 훔치려고 했으니까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당연히 목을 베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우리 셋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프를 가지고 긴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입장상 도둑은 바로 해결해야 한다. 실로리안 하프는 전설 속에서 여러 번 등장했던 물건이었다. 당연히 수집가들에게는 광적인 사랑을 받는 물건이었다. 도둑을 어쭙잖게 봐주면 뒤가 힘들어질 수 있다.

“팔자를 고치고 싶어 한 거야?”

“그런 놈이면 기분 상쾌하게 목을 자르고 왔을 텐데요.”

소피아의 얼굴이 평소보다 무거웠다. 소피아는 우리 넷 중에 가장 무사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나는 검을 좋아했지만 다툼을 좋아하진 않았고, 리온은 검도 좋아하지 않았고 그저 돈을 좋아할 뿐이었다. 크라이스 또한 백작가의 차남이라는 상황 때문에 기사가 되었을 뿐, 검을 좋아하거나 검을 부딪치는 걸 즐기거나 하진 않았다. 그러나 소피는 완전히 검귀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검을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그 검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걸 즐겼고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걸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피아 구분이 확실해서 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는 인물이었다.

“왜? 누구였는데?”

소피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내게는 좀 낯설었다. 그러나 크라이스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는 “걔가 하프를 훔치려고 했다고?”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크라이스의 반응을 보건대 아마 성실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자 소피아가 말했다.

“정말 행복해지는지 궁금해서.”

“…….”

“피를 먹여 봤대.”

맙소사.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주변을 보자 크라이스와 리온은 땅을 보고 있었다. 둘 다 어이가 없어서 말을 못 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실로리안 하프는 그 피로 주인을 구분한다. 그리고 주인을 위해 스스로 연주한다. 다시 말하자면 주인을 한 번 인지하면 그 주인을 위해서만 연주한다. 따라서 피의 주인이 살아 있는 한은 피의 주인을 위해서만 연주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당연히 소피아로서는 죽일 수밖에 없다. 차라리 그녀 자신이 죽여서 편안하게 가게 하는 게 낫지, 왕이나 혹은 이 하프를 선물받게 될 고귀하신 누군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는 곱게 죽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런 바보 같은 짓으로 죽는 그 인간의 유언은 뭐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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