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깜
“모르지.”
“아이션트는 한밤중이 되면 모두 둥지로 돌아옵니다. 그들은 거대한 고목을 둥지로 삼고, 그 안을 파서 생활하는데 마법사 한 명이 나무에 결계를 걸고, 다른 한 명이 결계 안쪽에서 나무를 태웁니다. 언제까지 태울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마물이 다 죽을 때까지겠지.”
“아니요, 나무가 재가 되어 결계 안에 재만 남을 때까지입니다.”
“…….”
“수십 개의 나무가 결계 안에서 타오르는 장면은 언제 봐도 장관입니다. 그리고 그 장관은 한밤중에 마물들을 부르기 때문에 기사들은 마법사들을 지키기 위해 혈투를 벌어야 하지요. 하지만 어쨌거나 아이션트는 토벌되고, 그래서 아이션트는 토벌의 난이도가 높은 편으로 측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아이션트는 큰 집단을 이루기 때문에 경험 많고 규모가 있는 기사단들이 아니면 잡을 수가 없습니다. 잘못 건드려 놓치는 날에는 그 근처 숲으로 모조리 흩어져 엉망이 되니까요.”
“그대는 말을 빙빙 돌리는 재주가 있군.”
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고 기분이 상한 듯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저 마물 하나 잡는 이야기였을 뿐입니다.”
흥, 왕이 코웃음을 쳤다. 창밖은 겨울비가 오던 게 언제인가 싶을 정도로 하늘이 맑았다.
***
이든이 일어난 건 거의 2주가 지나서였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겨울의 끝 무렵, 그는 눈을 뜨자마자 나를 찾았다. 마침 그의 곁에 있던 나를 보더니 그는 하아, 하고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마치, 세상이 밝아지는 듯한 미소였다.
“당신도 나도 살았네.”
죽을 만한 일은 아니었어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엄청나게 걱정했고, 내가 죽으러 간다고 생각했고, 목숨을 걸고 내게 달려와 주었다. 누군가는 그의 그런 점이 어리석다고 말했다. 일을 그르쳤다고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목숨을 걸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참 많이 봤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 다짐하는 것, 맹세하는 것과 실제로 행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누군가가 나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왔다는 것에 마음이 녹아내린다.
나는 이런 사람이었던가. 나는 내가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아주 감상적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실리.”
그가 불러서 나는 연초를 피면서 그에게 가까이 갔다. 곰방의 감촉이 입술에서 왠지 걸리적거리는 느낌이었다. 뭔가가 어색했다. 곰방대든 공기든, 뭐든 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사람?
많았지. 너무 많았지. 실제로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순수하게 나라는 사람을 향해 달려오진 않았다. 그들이 달려온 건 하스트레드의 주인, 자신의 가족들을 지켜 줄 주군, 그런 것이었다. 나 또한 그들을 그렇게 대했으니 불만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고작 열세 살짜리가 나를 구하겠다고 목에 검을 들이 대고 달려오다니. 폭우 속을 가르고서. 그 장면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데 그래도 내 마음은 그 장면에 무릎을 꿇는다.
이든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바라보았다. 손은 나보다 더 큰 것 같기도 했다. 손이 이렇게 큰 걸 보니 키는 더 클 것 같기도 하군. 나는 곰방대를 들지 않은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사실은 그때 눈이 잘 안 보여서.”
“…….”
“당신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지도 못하고 죽는 줄 알았어.”
“엄살이 심하십니다.”
내 말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생각보다 난 별로 안 다쳤었구나?”
아니, 당신은 내가 죽는 줄 알았겠지만 나는 멀쩡히 걸어 나올 자신이 있었어. 하지만 당신은 사신에게 뒷덜미를 잡혀 납치되고 있었지. 빅토리아가 비를 흠뻑 맞으며 서 있어 주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죽었어.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은 누군가가 그에게 죽을 뻔했다며 울고불고할 것이다. 일단 로즈메리가 그럴 것이 확실시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든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의 손에서 내 손을 빼내었다. 이든의 손이 허공으로 내 손을 따라왔다가 곧 거두어졌다.
“국왕 전하께서 노하셨습니다. 자살이 중죄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내 무뚝뚝한 말에 이든이 눈을 휘며 웃었다.
“자살하려고 한 건 아닌데.”
그리고 그는 한쪽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
“내가 죽어주면 제일 좋아할 사람 아닌가?”
이든이 죽으면 누가 제일 좋아한다는 것인지, 그는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못 들은 체하며 말을 이었다.
“…왕립 학교에 입학하셔야 합니다.”
이든이 대공의 자리에 안착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인 대신관 라스나티프를 비롯한 반왕파가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내가 보호자로서 의무를 다하고 있지 않으며 자격도 없다고 매섭게 공격해 왔다. 애초에 나는 보호자가 아니라 연대 보증인이었을 뿐이지만 그 내막을 아는 사람은 몇 없었고 따라서 명분만 보호자인 나는 원로원에 참석해 온갖 소리를 다 들어야 했다. 그러고는 이든이 교육을 받아야 하고 나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하며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치 그가 나에게 세뇌라도 된 것처럼.
이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맞장구를 치며 그들의 말을 들어준 건 국왕이었다. 그는 대공이 왕립 학교를 다니지 않아서 되겠느냐며 그의 왕립 학교 입학을 원로원의 그 자리에서 결정했다. 그건 왕명이었다.
“왕립 학교? 가기 싫은데.”
이든이 싱긋 웃었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왕명이 내려졌습니다.”
왕명, 이라는 말에 이든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에 분노가 잠시 스쳐 지나갔다. 왕이 그에게 저지른 일이 있는데도 감히 또 그에게 뭔가를 명령하려 든다는 게 매우 불쾌한 듯했다.
잠시 그가 말이 없어서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는 침대 시트를 손가락으로 구기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내 머리도 복잡했다. 그가 왕립 학교에 가게 되면 세 명을 더 입학시켜야 한다. 폴과 테인, 그리고 로즈메리. 테인과 로즈메리는 무난하게 왕립 학교 생활에 적응할 테지만 폴은 어떨는지. 무엇보다 중간 입학자를 한 번에 네 명이나 받아들여 달라는 요구에 교장이 어찌 나올는지.
하기야, 그것들은 다 어떻게든 될 일이다. 왕명이 내려진 이상, 왕명을 팔아먹고 기부금을 밀어 넣고 안 되면 조금 거친 언동과 함께 인사를 가면 될 일. 그러나 문제는 이든의 마음인데.
“좋아.”
의외였다. 이든은 생각보다 쉽게 좋아, 라고 입학을 허락했다. 그는 예전부터 왕립 학교행을 여러 번 권유받았다. 따라서 커리큘럼이 꽤 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로스랜의 학교들은 대부분 열다섯 살이면 마칠 수 있다. 왕립 학교의 경우에도 성인이 되는 열여덟 살이면 졸업이다. 하지만 후계자들의 경우에는 2년을 더 교육받는다. 신사 과정, 이라고 불리는데 실제로는 지배계층이 되기 위한 훈련이다. 사관학부의 경우에는 열여덟 살에 졸업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이든은 몸이 약하여 사관학부 입학은 도저히 무리였다.
“단, 두 가지 조건이 있어. 첫째, 나는 마법학부에 입학할 거야. 물론, 신사 과정에는 참여할 거야. 나도 그 과정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지는지는 아니까.”
학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초대 이든은 마법사가 아니라 마검사였으니 마법학부에 들어가는 건 이든의 정통성을 강화시켜 주진 않는다. 따라서 그건 문제가 없다.
“예.”
“둘째, 스무 살에 내가 졸업하면.”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도 했고 말을 하는데 용기가 필요한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지, 생각했을 때 그가 말했다.
“우리는 바로 결혼하는 거야.”
***
“…군, 주군.”
멀리서 들리던 목소리가 어느 순간.
“주군.”
귓가에서 들렸다. 눈을 뜨자 내 바로 위에서 크라이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눈을 잠시 깜빡였다. 크라이스의 얼굴에 주름이 좀 많아 보였다. 주근깨와 점도, 약간의 기미도. 음, 전체적으로.
“나이 들었네.”
“…예?”
자다가 남의 진영 북 치는 소리에 크라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아니야.” 하고 고개를 저었다. 손을 뻗자 크라이스가 내 손을 잡아 가볍게 일으켰다. 이틀 만에 잔 몇 시간의 잠은 달콤해야 했지만 꿈만 잔뜩 꾸고 말았다. 옛날 일을 꿈에서 보았더니 몸이 더 피곤해진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하품을 하자 크라이스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잠을 잘 못 주무셨나 봅니다.”
“꿈을 좀 꿨어.”
“꿈이요?”
“옛날 일들이 나오더군.”
“언제 말입니까? 주군께서 뺨에 여드름 달고 바스타드 소드 휘두르시던 시절 말입니까?”
내 소녀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 인생에서 아주 잠깐 동안 여드름이 났었던 적이 있는데 하스트레드 사람들은 그걸 무척 신기해했다. 누군가는 눌러 보고 싶어 했고 누군가는 짜 보고 싶어 했고 누군가는 보호하고 싶어 하는 등, 내 여드름을 두고 세기의 전쟁이 일어났었다. 뭐, 그들이 그렇게 싸우는 사이 여드름은 사라져 버렸지만.
“그보다는 좀 더 뒤의 일이었지.”
내 대답에 크라이스가 “그러셨군요.”라며 그냥 고개를 주억거렸다. 별로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라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 않자 그도 눈치껏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벌써 7년인가.
이든이 왕립 학교에 입학한 지도 어느새 7년. 그는 이제 곧 졸업을 앞두고 있다. 나는 서른다섯이 되었고 그는 스물이 되었다. 열세 살과 스무 살. 너무나 많은 게 달라졌을 나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조금 아쉬워지는 건 내가 그 아이를 진심으로 좋아했기 때문이다. 나는 적지 않은 친구가 있었지만 사리안 가문의 후계자인 세실리아가 아니라 나라는 자연인과 친구가 된 사람은 오직 이든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