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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42화 (41/94)

<☆42>깜

나는 왕세제를 죽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죽이면 좀 곤란해지기는 해도 나나 하스트레드에 아주 큰 영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것이다.

“우리 조카님께서 약혼녀를 그렇게 사랑하신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왕은 비릿하게 웃으며 술잔을 여유롭게 흔들었다. 나는 곤란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왕이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혀를 찼다.

“아쉽게 됐어. 그대가 짐이 원하던 것과는 좀 다른 방식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 눈엣가시 같은 놈을 처리하겠다고 해서 속이 시원했는데 말이야.”

“송구합니다.”

“…짐은 놈을 두고 볼 생각이 없어.”

왕은 왕세제와 거의 원수지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둘은 두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 형제지간이었다. 왕세제가 왕위에 오르려면 왕이 죽어야 하는데 자연적으로 사망하길 기다리기엔 둘의 나이 차는 너무 적었다. 게다가 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거의 기정사실이지만 만약에 기적이 일어나면 어떡할 것인가? 혹은 왕이 사생아라도 낳아 오면? 그런데 그 사생아가 제법 핏줄이 괜찮으면? 왕세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세제는 무엄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

문제는 왕은 대외적으로 왕세제를 건드릴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미 조카를 ‘처리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동생까지 죽이면 민심과 귀족들의 인망은 손쓸 수 없는 데까지 나빠질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동생의 오만한 태도와 교만한 야심을 두고만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왕세제를 처리해 주길 바랐다. 왕세제를 하스트레드와 함께 출정을 보내고 먼 곳에서 처리한다는 고전적인 방식을 취하길 원하고 있었다. 왕세제는 물론 이 이야기에 응하지 않겠지만 따르게 만들 자신이 왕에게는 있었고, 왕세제가 어떤 사병을 동원하든 하스트레드는 왕세제의 목을 자르는 것쯤은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유능한 기사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단지 나는 그의 그 명령은 거절해 왔다. 애초에 하스트레드는 ‘전쟁에 동원되어 적군과 마물을 토벌한다’는 계약에 응한 것이지, 정치를 위해 암살을 해 준다는 계약에는 응한 적이 없었다. 결국 왕은 나에게 이 일을 부탁하는 걸 포기했고 왕세제의 콧대는 더 높아져 갔다.

그러다 왕세제도 불안해진 것 같다. 정통성이 부족한 건 왕이나 왕세제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든이라는 이름을 계승하지 못했다. 심지어 이 조카는 살아 돌아왔다는 영웅담 같은 스토리도 가지고 있는 데다 가장 고귀한 초대 이든처럼 마력도 지니고 있었다. 왕은 왕위를 가졌기 때문에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만 감당하면 되었지만 왕세제는 아니었다. 왕이 죽어 왕좌가 비는 경우 그 자리가 왕세제 자신의 것이 될지, 아니면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아갈지, 그는 너무나 두려웠기에 라이벌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든의 수학 선생을 매수했고, 선생은 나의 함정에 걸려 넘어졌다. 그는 내가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했다. 나에게 잡히느니 자진을 선택할 정도로 왕세제는 무서운 이였고, 나중에 들어 보니 선생의 나이 드신 노부모님이 인질로 잡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왕세제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되는 법을 알고 있었고 선생은 얼마 견디지 못하여 ‘부모님을 꼭 구해 주는 조건’으로 내게 모든 사실을 말했고 자필서도 썼고 증언도 결심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늘 회색에 머무는 법을 배우라고 충고하셨다. 그러나 난 잘못 난 싹은 애당초 잘라 버려야 한다는 원예가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 왕세제를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든은 내 보호 아래 있었다. 그는 나를 지지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네가 하기 싫은 일은 하지 마.”라며 내 아버지조차도, 하스트레드의 주인이었고 공작이었던 내 아버지도 해 주지 못했던 말을 맨몸으로 해 주었던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을 죽이려고 했던 자. 그 둘을 같은 하늘 아래 둔다는 건 내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든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왕세제를 죽였을 것이다. 다만 내가 이든을 떠나보낸 건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물론 왕이 나를 건드리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실했다. 그에겐 하스트레드가 필요했고 내가 필요했다. 왕세제는 필요 없었다. 본인 말마따나 눈엣가시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이든은?

그에게는 이든도 필요가 없다. 그러니 그는 왕세제와 엮어서 이든을 없애 버리려고 할 수도 있었다. 나는 그 일을 사전에 방지해야 했다.

실패했지.

게다가 곤란하게도 왕세제가 살아서 이스트럼을 나갔다. 그는 이제 나에게 이를 갈고 있다. 귀족 원로원을 소집하여 나에 대한 처분을 내리겠다며 펄펄 뛰고 있었다. 물론 왕세제의 편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왕세제는 재판도 없이 나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친왕파는 ‘공작인데 재판은 당연히 해야 한다’며 은근슬쩍 재판을 해 보자고 역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재판이 열려 이든의 수학 선생을 비롯한 인물들이 증언대에 서면 왕세제는 무척 곤란해지기 때문에 그는 재판을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중이었다.

그러자 친왕파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반대를 하는 반왕파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은 반왕파지만, 왕세제는 마뜩찮게 생각한다. 왕세제는 의외로 친왕파기 때문이다. 애초에 현재의 왕을 계승한다는 게 아니면 왕세제가 왕위를 이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현재의 왕이 왕좌를 계승하지 않는다면 왕위는 이든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왕세제는 그런 미묘한 정치적 입장이 있기 때문에 언제나 친왕파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히려고 한다.

그 왕세제가 나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재판은 절대 안 된다며 펄펄 뛰고 있으니 당연히도 그들은 ‘재판을 열어 이야기를 들어 보자’는 식으로 나오게 되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들이 그토록 아끼는,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라 할 수 있는 이든의 약혼녀이자 보호자였다. 그들은 이 일이 이든과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알고 싶어 했다.

왕세제는 지금 결코 유리한 장소에 서 있지 않았다. 도리어 고지에 서 있는 건 나였고 그는 나의 활 끝에서 도망치려는 사냥감과 같았다.

그리고 나는 활을 꽤 잘 쏘는 편이다.

“어쨌거나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조금은 두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외로군. 짐은 그대가 무언가를 두고 보는 걸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토벌이든 뭐든, 그대는 최단기간으로 끝내는 걸 좋아하잖나.”

물론 그렇다.

문제는 왕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그를 언제든 끝낼 수 있다. 그런 생각이 아니었다면 내가 감히 도박장에서 한참 유흥을 즐기다 집으로 귀가하던 왕세제를 이스트럼까지 끌고 와 죽이려고 들었겠는가.

그러나 왕은 다르다.

“응? 실리, 그냥 끝내는 게 낫지 않겠어?”

왕의 눈이 번들거리는 게 보였다. 이 뱀 같은 자는 분명히 왕세제와 이든을 묶어서 처리할 생각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든 이든을 처리할 수 있다. 그리고 왕세제는 지금 그가 가장 골치 아파하고 있는 사안 중 하나이다….

나는 썩은 싹은 잘라 내야 한다는 주의지만, 어쩌면.

“왕세제 전하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이상한 탓에 여기저기서 눈길을 좀 끌었습니다. 이런 일을 눈에 띄게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대는 이든의 약혼녀이며 보호자지. 복수의 명분은 충분해.”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문제는 제가 그 복수를 이미 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왕세제는 끌려왔고 내게 고통도 당했다. 그는 죽을 기로에 선 채로 내게 빌었고 심지어 그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노출되기까지 했다. 명분은 이미 한 번 사용되어졌으니 그 효력은 사라졌다. 내 말에 쯧, 하고 왕은 아까움에 혀를 찼다. 하지만 나는 그 옆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명분이 사라진 게 아까운 게 아니다.

그는 명분이 사라졌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 정도 정무 감각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그는 왕이다. 정치라는 판에서 가장 많은 카드를 쥐었고 가장 많은 게임을 해 본 자.

그는 내가 넘어오지 않은 게 아까운 것이다.

사라진 명분에 달려들어 왕세제를 죽이고 이든이 죽고 내가 하스트레드를 그에게 넘기는, 말도 안 되는 어떤 꿈같은 시나리오가 그에게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어떡할까?”

왕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했다. 그의 눈길이 내 뺨과 옆얼굴에 쏟아졌다. 왕세제를 떠올렸다. 나는 누군가에게 살의를 느끼는 타입이 아니라서 그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사실 나는 사람을 죽이는 게 내키지 않는다. 언제나 그래 왔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일은 발을 한 번 들이면, 돌이킬 수 없다. 하얀 셔츠에 핏물이 뿌려진 것 같은 그런 인생의 낙인이 찍혀 버려서 돌아나갈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어차피 그런 인생을 살 거라면 나는 늘 효율적이고 고통받는 사람이 적은 길을 택하려고 노력해 왔다.

왕세제를 상대로도 그러고 싶은가, 잠시 생각해 봤다.

아니, 나는 그를 상대로는 효율보다는 확신을 원한다. 두 가지의 확신이 필요한데 그가 완벽하게 제거될 것. 다시 말하자면, 그의 잔당들까지도 제거되어 그의 복수를 하겠다는 둥 하는 일이 없을 것.

두 번째는 그가 제거되는 일이 무언가의 빌미가 되는 일이 없을 것.

“정말, 고민이 되나 보군.”

왕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제야 나는 지금까지 내게 다정하게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다 가장된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감정을 약간 즐거운 것처럼 덧씌워서 말하고 있었고, 실제의 그는 아주 고요하고 흔들림 없는 상태의 감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기다려야 할 듯합니다.”

“뭘 기다린다는 거지?”

“…마물 중에는 아주 작고 번거로운 마물이 있습니다. 아이션트라고 불리는데, 개미와 닮았습니다. 번식력이 매우 왕성하지요. 따라서 숫자가 적을 때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죽이는 게 관건입니다. 이 아이션트를 잡는 법을 아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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