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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41화 (40/94)

<☆41ㅡ>깜

우리가 왜 만났는지 그런 건 알지 못한다.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그게 악연이었는지 인연이었는지 그딴 건 잊어버렸다. 나는 어른이 아니라서, 아직 아이라서, 아직 못 자라서, 어리석어서, 이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 나는 이 순간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죽을 때는 무서울지도 모르고, 돌아가신 부모님께 들 낯이 없는 것도 맞아.

그래도 나는 도저히 너 없이는 살 수 없어. 온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짐승의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세상에서 너만이 말갛게 웃고 있으니까.

피가 떨어진다.

내 생명이 발치에 고여 간다.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해져 간다.

그래, 너를 구하는 것으로, 아니, 사실은 내가 너를 구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는 걸 나도 알지, 같이 죽는다면, 내가 혼자 남지도 혼자 가지도 않게 된다면, 나는 그것으로.

그것으로 의미를 얻을 수 있어.

마차는 바람처럼 달려서 실리에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늦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

내가 이스트럼에 도착했을 때 나는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테인의 품에 안겨서 지혈을 받으며 나는 이스트럼으로 달렸고, 저택에 도착해서는 허리를 세웠다. 꼿꼿하게 가자. 눈앞이 흐릿한 걸 보며 생각했다. 안개가 끼었다고 생각하면 돼. 이 정도는 걸을 수 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가 나를 막아섰고 테인이 “대공 전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누군가가 나를 데리러 왔다. 또 다른 누군가가 속삭였다.

“대공 전하, 대공 전하. 저를 기억하십니까? 빅토리아 솔루조웨입니다. 제가 상처를 좀 봐도….”

다급한 목소리였다. 문득 우스워졌다. 픽 웃음이 났다.

“괜찮아.”

아, 깨달음을 얻었다. 실리는 언제나 이렇게 웃었다. 픽, 하는 웃음. 모든 것에서 한 발짝 떨어진 웃음. 그 웃음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했더니 이런 느낌이었나 보다.

그래, 너는 이런 거였구나.

언제나 이렇게 이방인으로 사는 거였어.

세상은 흐릿하고 내가 넘치도록 흘린 피비린내로 코가 마비되어 이제 모든 것은 상관없어졌다. 죽음도 무섭지 않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다. 내 머릿속은 깊은 숲속의 새벽처럼 고요한데 심장은 폭우처럼 시끄러웠다. 죽어 가기 직전 발악이라도 해 보듯이.

이런, 이런 기분으로 너는 웃는 거였어.

실리, 나는 네가 있어서 괜찮았다. 나는 행복했어. 너를 만난 이후로, 내게 미래란 그저 희망과 빛뿐이었어. 그건 모두 네가 나에게 한 아름 안겨 준 것이었어.

하지만 너는 나에게 그 모든 것을 주고 이런 기분으로 웃고 있었어?

“어디 있어?”

빅토리아에게 물었다. 빅토리아는 누구의 거취를 묻는지 당연히 알아들었다.

“숲지기의 오두막에 있어요.”

“거긴 네가 머무는 곳이잖아.”

“네, 거긴 아무도 안 오는 곳이죠.”

왜 실리가 아무도 안 오는 곳에 가야 했는지 가 보면 알겠지. “테인.” 하고 부르자 테인이 나를 부축했다. 점차 피로해지고 있었다. 이 피로는 내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새까만 무게의 피로. 그 무게는 아주 무거워서, 내가 떨쳐 낼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녀가 왜 나를 떨쳐 냈고, 어떤 방식으로 나를 구하는지 보고 싶었다. 내가 그녀와 함께 있으면 죽을 거라고 단정 지을 만한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사실은 화가 났었는데.

…피와 같이 화가 다 쏟아져 나갔는지….

눈앞이 너무 흐려서 그런지, 그냥 그녀가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다시는 그녀의 얼굴을 선명하게 보지 못할 것 같은, 그런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테인이 나를 안고 숲지기의 오두막으로 달렸다. 비가 내 몸을 때렸다. 테인은 자신은 아무것도 입지 않았으면서 내 몸에는 후드를 씌웠다. 어떻게든 후드가 벗겨지지 않게 하려고, 한 손으로는 고삐를 잡고 한 손으로는 나를 안은 채로, 턱으로 후드를 고정하고 있었다. 또 웃음이 났다.

그리고 슬퍼졌다.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이렇게 웃을 수 있구나…. 너는 그래서 그렇게 웃었던 거야.

테인이 결국 나를 두 팔에 안고 말에서 내려 숲지기의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 가까이 갈 때까지는 빗소리에 지워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었는데 가까워질수록 희미하게 어떤 소리가 나고 있었다.

“제발, 제발…. 실리, 알잖아, 나는, 그냥, 방어를 한 거야.”

“압니다.”

“실리, 제발…!”

“저도 같은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왕세제 전하.”

왕세제?

지금 국왕인 내 삼촌의 동생이자 제1 왕위 계승자. 그래, 그리고 그는.

나는 테인에게 내려 달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테인은 곤란한 얼굴을 하면서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몸짓으로 나를 천천히 내려 주었다. “조심하세요.”라고 속삭이면서. 그래, 테인도 안 내려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왕은 우리 아버지의 동생이다.

그러니까, 저 안에 있는 사람은.

다시 말하자면 내 아버지의 동생이자, 내 또 다른 삼촌이기도 하다.

“열어.”

내 명령에 테인이 문을 열면서 말했다.

“대공 전하십니다.”

안쪽에 고하는 목소리는 아까의 벌벌 떨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차가운 것이었다. 사무적인 목소리. 그러나 테인의 손등은 여전히 핏기가 없이 하얬다. 그는 많이 놀랐고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로즈메리는 이스트럼에 도착하자마자 주저앉았을 정도였다. 세 살이나 어리면서도 그녀는 왠지 나를 누나처럼 대했는데 아마 꼼꼼하고 야무진 그녀의 성격 때문일 것이다.

그래, 그 모든 것과 작별인지 아닌지.

이제 판가름이 나겠군.

“오랜만입니다, 삼촌.”

내 말에 더러운 바닥에 엎드려 실리의 부츠에 매달려 울고 있던 삼촌이 고개를 들었다. 멍한 얼굴은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피범벅이 된 내가 괴상하고 소름 끼쳐서겠지. 그건 실리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녀는 드물게도 눈을 완전히 홉뜬 채로 “어떻게 된 거야?!”라고 테인에게 고함을 질렀다. 테인이 뭐라고 말을 하기 전, 나는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

“나는 네 눈앞에 있어.”

사실은 네 얼굴이 좀 흐릿하기만 하지만 그래도 아까보다 피는 덜 나는 거 같고 나는 여기 있지. 너에게 오기 위해서 꽤 번거로운 일들을 거쳐야 했고.

“나에게 말해.”

“…….”

“자해입니까?”

“응.”

“…….”

그녀는 화가 난 것 같았고, 참느라 말을 삼키는 듯했다. 하고 싶은 말을 씹어 삼키며 내 쪽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윽고 “왜?”라고 아주 짧게 물었다.

“너에게 와야 했는데.”

“…….”

“아무도 내 말 따윈 들어주지 않더라고.”

“그래서 목을 그었습니까?”

나는 웃었다. 아마, 평소의 그녀처럼 웃고 있었을 것이다.

“전하!”

그녀가 화를 냈다. 나는 조금 기뻐졌다. 어린애 같은 짓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녀가 나에게 화를 낸다는 것, 반응한다는 것이 다 체념하고 웃는 것보다 살아 있는 증거처럼 느껴져 더 좋았다.

아니, 사실은 당신이 아주 행복하게 웃었으면 좋겠어. 그게 제일 보고 싶긴 한데.

나는 시선을 돌려 벌레처럼 엎어져 있는 내 삼촌을 내려다보았다.

“내 삼촌이 나에게 독을 먹였어?”

“…….”

“그랬구나, 그래서 너는 나에게 아무 말도 안 한 거야.”

그는 왕세제였고 나에게 언제고 다시 해를 끼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실리는 아마 뿌리를 뽑자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에게 피가 튀면 안 된다고 여긴 거겠지. 아아, 그래.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누군가는 핏줄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던데, 내게는 핏줄이 너무 가소롭다.

“실리, 그만둬.”

“…….”

“돌이킬 수 없는 짓은 하지 마.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단 말이야.”

내 말에 실리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게 너무 흐릿했다. 피를 많이 흘리긴 했어. 응, 정말 많이 흘리긴 했어. 그래, 죽을지도 몰라. 만약 여기서 나 혼자 죽는다면….

아, 그러면 결혼하고 싶다는 말은 좀 해서는 안 되는 그런 말이었던 거 같기도 하고….

“전하!!!”

실리의 비명이 멀리, 꿈에서 들리는 것처럼 멀리 들렸다. 내가 쓰러지고 있는 건지 세상이 내게 쏟아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늘 알고 있던 어둠은 참 차가웠는데, 오늘의 어둠은 뜨거웠다. 누군가의 보드라운 품 안에서 나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  여덟 번째 앞장  ♡

꽤 시끄러운 일주일이었다.

왕세제를 살려 둘 생각 따윈 없었는데 이든이 쓰러지는 바람에 왕세제고 뭐고 신경 쓸 겨를이 없어졌다. 뒤따라 달려와 오두막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빅토리아가 뛰어 들어와 바로 치료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든은 죽었을 것이다. 피를 너무 많이 잃었다며 빅토리아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바로 내 손목을 단검으로 그어 그녀에게 내주었다. 피가 필요했다. 엄청나게 많은 피가. 그것도 마력을 지닌 자들의 피가.

“내 피는 줄 수 없어.”

빅토리아는 딱 잘라 말했다.

“나는 아무에게도 내 피는 주지 않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인지 안다. 그녀가 어떤 맹세를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피를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그냥, 내 피나 많이 써 줘.”

“너, 좀 힘들 거야.”

“괜찮아.”

“그래도 다행이다.”

빅토리아의 손 아래에서 파란빛이 쏟아졌다. 내가 봤던 그 어떤 치료사의 빛보다 짙은 푸른빛이었다.

“뭐가?”

“네가 성검사라. 사실 신력을 가진 사람의 피가 제일 도움이 되거든. 괜히 사제 중에 치료술의 권위자가 많은 게 아니야.”

이상하지, 신은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자기는 늘 고고하고 좋은 것만 차지하려 든다니깐.

빅토리아는 빈정거리면서도 계속 이든을 치료했다. 그녀는 꼬박 사흘을 졸다 깨다 하면서 이든에게 치료술을 썼다. 치유 마법을 비롯한 수많은 치료술들이 창밖의 폭우처럼 이든의 몸에 쏟아졌다. 그리고 폭우가 그쳤을 무렵에는 이든의 몸도 겨우 생사의 고비를 넘겨, 생의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당연히 내 문제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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