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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40화 (39/94)

<☆40ㅡ>깜

“실리가 하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언제나 상대를 위한 것입니다. 저라면 화를 내기 전에 실리가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충고하는 거냐?”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싸늘했다. 감히, 너 따위가. 그렇게 묻는 듯한 목소리였다. 오만하게 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리의 친구에게 그렇게 보이는 게 별로 좋지 않다고도 머릿속 한구석으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은 화가 났고 그 화가 다 풀리지 않았다.

실리가 나를 위해 그런 일을 했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그녀가 나에게 설명해 주면 좋았을 것이다. 왜 설명해 주지 않았는가. 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이런 일과 맞닥뜨려야 하는가.

이건 마치 그녀에게 아무런 설명도 들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아서….

“저 따위가 대공 전하께 어찌 감히 충고를.”

빅토리아가 웃으며 진정하라는 듯이 나를 달랬다. 어린애 달래는 듯한 태도에 더 기분이 나빠졌지만 화를 내진 않았다.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 어린애 같은 짓이라는 자각 정도는 있었으니까.

“…단지 전하, 실리가 말씀을 올리지 않았다면….”

“…….”

“그건 전하를 위함이 아니었을는지요.”

“…….”

“뭐, 소인의 짧은 생각이옵니다만.”

“…….”

“저는 솔루조웨 가문 출신의 치료사. 잘 체감이 아니 되시겠지만 저는 치료사로서는 미천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저는 금은보화를 싸 들고 와서 제게 제발 구해 달라는 사람들만 만났고, 그들을 구해 주는 대가로 어마어마한 것들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제가 실리를 좋아한다고 해도 저의 능력은 제 가치의 근본이며 자유의 보증입니다. 저를 싸게 파는 짓은 하지 않고, 따라서 실리는 제게 아주 큰 대가를 지불했답니다, 전하.”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실리가… 대가를 지불해? 너희는 친구잖아. 그런데 대가를, 받았어? 내 얼굴을 본 빅토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어른입니다. 일은 일이고, 우정은 우정이죠.”

아주 큰 대가를 지불했다고?

어떤… 대가를 지불했다는 거야?

그 ‘대가’라는 단어에선 묘하게도 돈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거기선 이상하게도 피 냄새가 났다. 나는 실리의 목소리가 떠올렸다.

[  “저는 직업상 무언가를 죽이는 일이 많지요. 마물이든, 마물이 아니든. …무언가를 살리고 싶을 때도 있는 겁니다.”  ]

실리에게 무엇을 내놓으라고 했던 걸까. 실리는 나를 위해서 또 무슨 짓을 한 걸까. 사람들은 본래대로라면 막강한 군대가 동원되었어야 할 리히타트라인 토벌에 하스트레드 기사단만 동원된 것도 나 때문이라고 수군거렸었다. 그녀는 또 무엇을 나 때문에 내놓아야 했을까.

“너는.”

화가 나는데, 누구에게 화가 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빅토리아 솔루조웨에게? 아니, 나는 나에게 화가 난 것 같다. 나 자신에게.

“아니, 나는….”

이렇게 어리고 무력하기만 나에게. 시간은 너무 안 가고 나는 너무 어리기만 해. 실리, 나는 너를 도와주고 싶은데, 최소한 폐는 되고 싶지 않은데, 나는, 나는….

그때 갑자기 문이 쾅 열렸다. 아까 난입할 때처럼 갑자기 들어온 실리를 본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피를 뒤집어쓴 상태였고 얼굴은 평소와는 달리 무표정이었다. 그녀는 내 앞으로 빠르게 다가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 같던 그녀가 이윽고 말했다.

“하스트레드로 가세요.”

피를 뒤집어쓴 악귀 같은 모습을 하고 실리는 웃었다. 웃는 그 얼굴은 내가 아는 실리였고 그래서 나는 울고 싶었다.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싫다고 한 적 없었지만 나는 왠지 그녀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걸 싫어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에게, 나는 모든 걸 주고 싶었어.

자유든 명예든 돈이든.

그런데 너는 나 때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다.

“하지 마.”

나 때문에 그런 거 하지 마.

목이 메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뭐라고 네가 이런 짓을 해. 나 따위가 뭐라고. 사람들이 너를 비웃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열다섯 살 차이의 폐세자에게 팔려 간 상속녀라고, 옌선의 귀족들이 네가 최악의 선택을 했다고 조롱하고 있다지.

그런데 너는 피를 뒤집어쓴 채 나에게 하스트레드로 가라고 한다. 그건 피신이잖아. 뭘 하려고 너는 나를 도망시키겠다는 거야. 나를 안전한 곳에 두고 너는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별거 아니에요.”

“거짓말 좀 하지 마!!”

고함을 지를 때 내 눈에 눈물이 솟았다. 눈물이 떨어져 입가에 짜디짜고 씁쓸한 맛을 남겼다. 머리에 피가 몰려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하지 마, 그냥 좀 하지 마.

“제발, 나를 구하려 하지….”

꽉, 실리가 나를 끌어안았다. 힘을 주어 그녀에게 안겼을 때, 그녀의 몸이 보드랍다는 것에 놀랐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프게 끌어안겼지만 그녀의 몸에선 꽃향기가 났다. 단단한 근육과 보드라운 피부와 꽃향기와….

그리고 그녀가 내게 속삭였다.

“미안.”

그녀가 나에게 반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서 미안해, 이든.”

온전한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

다그닥, 다그닥, 몸이 흔들렸다. 마차,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차 안에 내가 있구나. 눈을 감은 채 왜 내가 마차 안에서 눈을 감고 있지, 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무슨 일이 있었지?

목이 아팠다. 정확히는 목 뒷부분, 목덜미라고 불리는 부분이. 왜 아플까. 어디로 가는 거지. 어디를 가는 중이었지. 머릿속을 뒤적거리다 눈을 번쩍 떴다. 모든 게 생각났다. 나는 아무 데도 가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차를 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  “하스트레드로 가세요.”  ]

“어디로 가는 거야?”

내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신경질적이고 다급하게 튀어나왔다. 내게 무릎베개를 해 주고 있던 로즈메리는 내가 불에 덴 듯 놀라 일어나는 걸 보면서 같이 놀란 듯 작게 꺅, 소리 질렀다. 그에 비해 테인은 무덤덤했다. 그는 내 몸에서 떨어진 모포를 주워 다시 덮어 주며 조용히 대답했다.

“하스트레드입니다.”

“웃기지 마, 당장 돌려.”

“…….”

“테인!”

테인은 내 얼굴을 외면했다. 들어줄 수 없다는 대답과 같았다. 당연했다. 그의 주인은 사실 내가 아니라 실리였으니까. 그에게 돈을 주는 것도 실리였고 그를 내 곁을 데려온 것도 실리였다. 고개를 돌려 로즈메리를 보자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그녀는  “전하….” 하고 작게,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로즈, 나는 가야 돼.”

“안 돼요.”

“로즈!”

“안 돼요, 전하. 각하께서 하스트레드에 가셔야 한다고 했어요. 안 가시면, 안 가시면….”

“죽는대?”

내 질문에 로즈메리가 흡, 하고 숨을 삼키더니 큰 눈에 가득 눈물을 담았다. “그게, 그게….”라는 말을 끝으로 그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흔들었다. 아니라는 뜻이었다면 좋겠지만 그녀가 하고자 말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일 테다. 내가 테인을 바라보자 우리를 보고 있던 테인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참을 수 없었는지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그대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마차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비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었다. 마차의 속도 때문에 빗줄기가 사선으로 내렸다. 나는 바람과 같은 속도로 실리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무언가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그녀에게서, 나 때문에 피를 뒤집어쓴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중이었다. 바람처럼.

[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서.”  ]

가장 빛나던 너는.

[  “미안해, 이든.”  ]

나 때문에 또 피를 뒤집어쓰고서 왕의 사냥개라는 소리나 듣는 거야?

울지 않겠다. 너를 그 피의 절망 속에서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질질 짜는 게 아니니까, 울지 않겠어. 나는 이제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실리. 왜냐하면 나는 그래도 뭔가 가졌잖아.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내가 아니잖아.

내겐 너뿐이잖아.

가족이든 친구든 뭐든, 그 이름에 뭐가 붙든, 내게는 너뿐이라서.

나는 너를 잃을 수가 없어. 나는 다시 아무것도 없는 채로는 살 수가 없어.

그때 무언가가 보였다.

운명이 내게 갈 길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세상이 모두 까맣게 어두워지는데 오직 한 곳만 빛나는 듯이 밝았다. 어둠 속의 빛으로 손을 뻗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테인의 허리에 있는 검을 뽑아 내 목에 바짝 들이밀었다. 섬찟하고도 소름 끼치는 고통이 목에서 느껴졌다. 피는 뜨겁다기보단 미지근했다. 고통은 싸늘했다.

그래, 이게 나아.

“대공 전하!!”

로즈메리가 울음을 토했다. 비명을 지르며 우는 그녀는 완전한 나의 편이었다. 알아, 네가 나에게 애쓴 거. 알아, 다 아는데. 사실, 정말 고마워. 그런데 내 사람은 실리뿐이라서, 나는 도저히 너희가 내 곁에 있든 없든 그런 건 중요하지가 않아.

잃을 수 없어.

“실리가 있는 곳으로, 마차를 돌려.”

테인은 핏기가 가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전하. 그가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 모양만으로 중얼거렸다. 전하.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 러지, 마세요….”

그가 더듬거렸다. 테인이 더듬거리는 걸 처음 모았다. 내 발밑에 피가 고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딘가, 잘못 베인 건지도 모르지.

그래, 나는 차라리 죽겠어.

개같이 죽는 건 절대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는데. 사실은 실리, 나는 개만도 못한 삶을 사는 게 더 두려워. 그리고 나는 인간답게 살려면 당신이 필요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비추는 것이 필요하잖아. 거울이든 강물이든. 나에겐 당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테인.”

내가 손을 더 목 안쪽으로 대자 갑자기 로즈메리가 “안 돼에에에!”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이 테인을 일깨운 것 같았다. 테인은 몸을 날리다시피 해서 마부석 쪽으로 난 창에 달라붙어 미친 듯이 손바닥만 한 창을 두드렸다. 창문이 부서져라 두드리자 마부가 문을 열고 테인을 돌아보았다.

“예?”

“예, 옌선, 그러니까, 이스트럼으로, 가, 주세요!”

테인이 헐떡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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