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배의 꽃-39화 (38/94)

<☆39ㅡ>깜

약초를 키우는 온실.

나는 숙모가 키우던 온실을 아주 간신히 기억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 온실에는 꽃이 가득했었다. 화려한 꽃뿐이었는데 사실 숙모는 그 온실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가꾸지도 않았다. 하지만 귀부인은 온실을 가꾸는 즐거움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숙모는 그런 척만 했다. 시간이 날 때 가끔씩 가위를 들고 꽃 한두 송이 자르는 것, 그리고 가위를 시녀에게 건네주는 것. 그것이 숙모가 온실을 가꾸는 방식이었다.

“어머니를 위해서 온실을 가꾸는 거야?”

“그냥 습관이 되기도 했고.”

실리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지만 나는 애가 닳았다. 나는 좀 더 그녀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습관이 되기도 했고, 그리고 뭐? 나는 더 알고 싶었다. 내가 계속 그녀의 얼굴을 보며 대답을 재촉하자 그녀는 연기를 뱉으며 웃었다.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데, 라는 얼굴. 하지만 그녀는 나를 보고 결국 웃으며 입을 열어 주었다.

“저는 직업상 무언가를 죽이는 일이 많지요. 마물이든, 마물이 아니든.”

실리는 사람을 죽인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그게 나를 위한 것인지 그녀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실리가 말을 이었다.

“무언가를 살리고 싶을 때도 있는 겁니다.”

문득 ‘죽인다’는 것이 그녀에게 사실은 상처가 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검을 좋아한다면 죽이는 것도 좋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사실은 검을 좋아하지만 죽이는 건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실리가 서 있는 저곳은 그녀가 원하지 않는 곳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내 표정을 보자마자 실언을 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냥 좀….”

“좀?”

“취미는 원래 본업과는 다른 거니까요.”

나는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길 바랐고 그때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나 자신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될 것이다. 돈도 명예도 자유도, 내가 내 이 손에 모조리 가둬서 그녀에게 바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하면서 살 수 있도록,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것이다. 나는 꼭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인생을 바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창밖을 보니 태양은 보이지 않고 비만 온다.

언젠가는 개이겠지. 하지만 그동안 그녀는 계속 비를 맞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내 마음을 답답하게 했다.

***

라이즌은 실리가 한가롭다고 했지만 나는 한가롭지 않았다. 나는 수많은 가정 교사들에게 교육을 받고 있었고 그 교육은 나뿐만 아니라 테인, 로즈메리, 그리고 폴도 참가했다. 물론 나를 위주로 하는 교육이었고 나머지 세 명은 참석만 하는 형태긴 했지만 사실 그게 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비스킷을 제가 왜 가져오는지 아십니까?”

수학 교사 아비드가 우리에게 비스킷을 나눠 주며 폴을 노려보았다. 아비드가 가져오는 비스킷은 독특한 맛이 있는 것이었는데 나에게는 독특했지만 폴은 그 비스킷의 맛을 아는 것 같았다. “평민들이 좋아하는데 비싸서 잘은 못 사 먹는, 유명한 비스킷이에요.” 폴은 언젠가 그렇게 말했었다. 맛은 아주 자극적이고 식감은 매우 딱딱한 비스킷은 요즘 우리 사이에서 살짝 유행이었다. 아비드도 그것을 알기에 매번 비스킷을 사 와 우리에게 나눠 주며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한편 폴을 지적했다.

“폴, 늘 이 수업에서 대공 전하께 방해만 되고 있다는 걸 인지는 하고 있습니까?”

“…….”

“수업에서 대공 전하께 방해가 되면 차라리 수업을 안 듣는 건 어떻습니까? 이를 악물고 따라와도 모자랄 판국에 이렇게 느리면 대공 전하 발목만 잡는 셈이 된다는 걸 모릅니까?”

나는 폴을 좋아했다. 그는 좋은 시종이었다. 그리고 그는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하여 우리의 수업을 따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선천적으로 총명한 편도 아니었고 수학에 재능이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우리와는 학습 진도 자체가 너무나 떨어져 있었다. 사실 폴은 수업의 대부분을 이해 못 했고 폴의 가르치는 건 아비드가 아니라 테인이나 로즈메리였다. 그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폴의 수준에 맞추어 그를 가르쳤다. 내가 왕립 학교에 들어갈 때 폴도 같이 입학해야 하기 때문이다.

테인이나 로즈메리가 폴을 대하는 태도는 조금 묘했다. 둘은 작위를 받을 수 없었지만 폴은 작위를 받는 게 거의 확정적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테인과 로즈메리, 그리고 폴 사이에는 서로 신분의 차이가 있는 셈이었다. 테인이나 로즈메리가 폴에게 조심스럽게 행동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그 거기를 좁힌 건 폴이었다. 그는 정말 맑고 밝았기에 우리는 모두 폴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는 눈치도 없었는데 그것도 여러모로 예민한 우리들에겐 꽤 신선한 느낌이었다. 폴은 어느새 우리에게 상쾌한 바람 같은 존재가 되어 주었다.

무엇보다 폴은….

“대공 전하!”

폴이 대경실색해 나를 바라보았다. 왜? 내가 그에게 눈으로 묻는데 로즈메리가 꺄아아악, 하고 비명을 질렀고 테인이 날카로운 눈으로 아비드를 노려보았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내 눈에도 문제점이 보였다. 내 피부가 빛나고 있었다. 피부 아래 불이 켜진 것처럼,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테인은 아비드를 노려보았고 나도 그를 따라 아비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방금 아비드가 준 비스킷을 먹었고 그 직후 내 피부가 이렇게 되었다는 건….

“이, 이런, 빌어먹을!”

아비드가 욕설을 뱉으며 무언가를 꺼내려 들었다. 아마 무기이리라. 테인이 나를 자신의 뒤로 보냈고 로즈메리를 보호하라는 뜻으로 폴에게 다급한 시선을 던졌을 때였다.

“으아아아아아, 사람 살려어어어, 대공 전하가, 대공 전하 살려어어어…!”

폴은 그렇게 소리 지르며 내 서재를 나가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아무도 폴이 고함을 치며 마구잡이로, 마치 놀란 소 떼처럼 그렇게 달려 나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뭔가를 꺼내려던 아비드조차 가슴팍에 손을 넣은 채로 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 저런 미친놈이 다 있어.’ 하는 눈이었다. 그리고 테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바로 아비드에게 달려들었다.

으악, 하고 아비드가 비명을 질렀다. 테인은 사정을 보지 않았다. 그의 얼굴, 정확히는 코 중앙을 쳐서 무너뜨리고, 그다음에는 다리 사이를 올려 찼다. 몸을 한 번 회전하더니 명치에 팔꿈치를 꽂아 넣었다. 아비드는 가슴팍에서 손을 빼지도 못한 채로 고꾸라졌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쾅 열고 들어왔다.

“대공 전하!”

실리였다. 그녀가 왜 여기에, 이렇게 빨리 당도한 걸까? 내가 의아해하는 사이 로즈메리가 소리 질렀다.

“각하! 아비드가 무엄한 짓을 하려고 합니다!”

실리는 나를 한 번 보더니 그대로 몸을 날렸다. 아비드는 모든 게 여의치 않자 혀를 길게 뽑았다.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자진할 셈인가. 내가 생각했을 때 실리가 자신의 검집을 그의 입에 쑤셔 넣었다. 분명 아비드의 입가는 찢어졌을 게 틀림없었지만 실리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아비드는 결국 혀를 깨물지 못했다.

“이름이…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생.”

실리가 후우, 하고 한숨을 쉬며 웃었다.

“조속히,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아비드의 머리채를 잡은 채 질질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아비드는 몸부림쳤다. 실리보다 아비드는 키가 훨씬 큰 사람이었다. 머리 하나만큼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실리는 그를 마치 솜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볍게 끌었다.

“대, 대, 대공 전하! 전하!”

폴이 뛰어 들어와 나를 살폈다. 내 몸이 빛나는 걸 보며 그가 대성통곡을 했다. “어떡합니까, 어떡합니까, 전하. 엉엉, 우리 전하, 어떡합니까.”라며 폴이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우는데 그의 머리카락 위로 새하얗고 창백한 손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깨끗한 영혼을 가지신 분이시어, 귀한 분은 괜찮으시니 걱정 마세요.”

나는 폴의 뒤에 나타난 빅토리아 솔루조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새까만 로브를 입고 있었다. 로브로 가려진 안쪽은 어둠밖에 없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가까운데 어둠밖에 안 보이는 게 정상인가? 나는 어쩌면 그녀가 현혹의 마법을 걸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실리는 누군가가 전하께 좋지 않은 약초를 드리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약초에 반응하는 약을 드시게 했습니다. 그뿐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아니, 사실은 상황을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모르고 싶었달까, 이해하기 싫달까, 그런 부분이 있었다. 그러니까, 빅토리아, 네 말은….

“다시 말씀드리지요. 아마, 실리가 모셔 간 저분이 대공 전하께 뭔가를 드렸고, 그 안에는 어떤 약초가 있을 겁니다. 좋은 약초는 아니고요. 그리고 실리는 그 약초를 드리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대공 전하께….”

“꽃차라고 속여서 그 약초에 반응하는 약초를 먹였다는 거야?”

내 목소리가 날카롭게 나갔다. 내 말에 빅토리아가 음, 하고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실리, 그녀가 한 일입니다.”

“실리에게 따지라 이건가.”

실리가 한 일이니 빅토리아 자신에게는 추궁하지 말라, 이건가. 내가 한쪽 입가를 올리며 차갑게 뇌까리자 빅토리아가 “아니요.” 하고 입을 열었다.

“세실리아 사리안은 언제나 자신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 고질병이 있습니다. 묘하게 자기애가 없고, 자기에게 차갑고, 자기를 응징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지요. 실리는 인정하지 않지만 그녀는 늘 남을 위해 살아갑니다. 제가 기사가 아니라 수도사인 줄 안다니까요.”

비웃는 듯한 어조.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실리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가득 차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빅토리아는 정말 실리를 좋아한다. 그걸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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