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ㅡ>깜
“로스텔로지는?”
피오르게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그의 얼굴은 아까 내내 울던 것 때문에 구정물로 엉망이었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아까와 천지 차이로 달랐다. 그의 눈은 지혜와 간악으로 빛났고 그의 표정에서는 모든 재화를 다뤄 본 사람의 여유와 싸늘함이 묻어 나왔다. 그는 아무것도 숨길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와 나는 게임을 했다. 가면을 쓰고 진실된 자신을 보여 주지 않은 채로 상대의 패만 보려고 드는 게임이었다. 나는 거기서 이겼고 그는 자신의 패를 온전히 까발려야 했다. 그러니 이제 그는 퇴장시켜 달라 하고 있었다. 게임은 끝났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은 차가우면서도 어딘가 미래를 기약하는 냄새가 풍겼다.
피오르게가 유명한 여성 혐오자라는 이야기는 들어 봤다. 부인 멜라니 때문에 그리되었다 하지.
[ “피오르게는 복수를 한 거예요.” ]
오르센은 그렇게 말했다. 피오르게는 오르센을 우습게 봤고 그에게 이야기를 다 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오르센은 한 가지는 꿰뚫어 봤다.
피오르게는 복수를 한 것이다.
“헤신트 피오르게, 로스텔로지.”
한 번 더 말하자 그의 얼굴에 짜증이 실렸다.
“로스텔로지라면 마법사들이 종종 구매하는 그 독초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그게 어쨌다는….”
나는 검을 휘둘렀다. 피오르게의 손목을 결박했던 밧줄이 반으로 갈라졌다. 피오르게가 시발, 이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게 보였다. 그래, 너는 확실히 나중에 문제가 되겠다. 나는 한 번 더 팔을 움직였다.
윽.
크라이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반으로 잘린 피오르게의 몸뚱이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피오르게의 얼굴은 찡그린 상태 그대로 반씩, 좌우로 떨어졌다. 영원히 붙을 일은 없을 것이다.
졸지에 피를 뒤집어쓴 두 기사가 억울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말이라도 해 주시고 하시지.’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두 명의 건장한 남자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뒤처리하고 씻으면 되잖아.”
싹은 잘라 내야 한다. 마물이든, 인간이든.
***
헤신트 피오르게의 실종은 옌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피오르게가 죽었다는 걸 들은 오르센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수도경비대에 모든 걸 털어놓았고 리온은 형 그리그에게서 서류를 통째로 강탈하여 오르센의 자술서를 읽었다. 거기에도 로스텔로지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오르센은 정말 로스텔로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것 같았다.
한편 나는 매일 아침 이든과 식사를 하고 같이 꽃차를 마시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우리는 매일 여러 꽃차를 마셨는데 이든은 꽃봉오리가 유리 포트 안에서 화려하게 피어나는 것을 늘 즐겁게 바라보았다. 아름다워. 그는 어느 날 그렇게 말하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이 꽃은 당신을 좀 닮은 거 같아.”
약혼자라고는 해도 어린 분에게 꽃을 닮았다는 말을 들으니 어이가 없었다. 내가 황당해서 바라보자 그는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제야 나는 그가 열세 살이고 여자에게 꽃을 닮았네요, 따위의 말을 할 나이가 아니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그 꽃이 나의 어딘가를 닮았다고 생각해서 뱉은 말이었다.
맙소사.
나는 꽃들의 신이라고 불리는 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꽃은 꽃들 중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되기도 하지만 신에게 바치는 꽃이기도 하기 때문에 꽃 중의 신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런 꽃에게 비견되다니.
“영광이네요.”
내가 이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있겠는가. 내 말에 이든이 눈살을 찌푸렸다.
“꽃이 영광이지.”
초월신이시여, 저는 지금 열세 살짜리 기둥서방과 함께 있는 기분이오니 저를 이런 기분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당신은 인간이고 꽃은 고작 식물인데, 당연히 꽃이 영광인 거 아니야?”
그의 말에 ‘아, 예, 그렇습지요.’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저 식은 웃음만 지었다. 그냥 이 화제가 빨리 넘어갔으면 했다. 그때.
“주인님,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손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전보에 따르면….”
원래대로라면 나와 이든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겠지만 전보의 내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노라고 라이즌이 구구절절 변명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손님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 빅토리아가 왔군.”
“빅토리아?”
내가 일어나며 하는 말에, 이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이 가시죠.”라고 내가 권하자 그는 두말하지 않고 일어났다. 우리는 긴 회랑을 걸었고 그동안 나는 “왕립 학교에 들어가시게 되면 마법학부를 보시며 개념을 잡게 되겠습니다만 간단히 마법사들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라고 내 설명의 포문을 열었다. 머릿속으로 어떻게 해야 간결하게 이 설명을 끝낼 수 있나 생각해 보았지만 약 세 줄 안으로 끝낼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은 떠오르지 않았다.
“마법사는 대체로 다섯 가지로 분류합니다. 물론 세세하게 더 분류하기도 하지만 큰 분류는 그렇습니다. 마법학자. 이분들은 연구를 줄로 하시는 마법사들입니다. 저서를 쓰시고 연구를 하시는 게 그분들의 주요 일이죠. 수마법사. 수비형 마법사들입니다. 수성을 위한 체계를 세우고 마법진으로 그리고 마법을 수단화하여 방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강구하는 분들이 이 마법사들이죠. 공마법사. 공격형 마법사들입니다. 공성을 위한 무기들을 만들고 적을 공격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생각하는 마법사들입니다. 주술사. 언령, 주술에 관한 것들을 다룹니다. 저주, 혹은 저주를 푸는 것 등은 이 주술사들의 영역이지요. 또한 기우제 같은 것도 이분들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치료사. 의사와는 다른, 마법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사람들을 치료사라고 합니다. 이렇게 다섯 가지로 구분하는데 앞의 세 가지는 마력을 가지고 훈련을 하여 성장하는 사람들을 말한다면 주술사와 치료사는 조금 다른 영역입니다. 그들은 마력을 가졌지만 다른 재능도 필요합니다. 그들은 대체로 그냥, 저절로, 자신이 그 존재임을 알게 된다고 하죠.”
“그래?”
이든이 입술을 한쪽으로 올렸다. 그림 같은 미소년이 그러니까 못돼 보인다기 보다는 그저 반항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보였다. 하지만 눈이 호사를 누리는 건 누리는 거고 그가 왜 불쾌해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저절로, 알게 되는 거라면 그게 어떻게 내가 원하는 거라고 확신해?”
“예?”
“그니까 나는 그냥 서 있는데 그게 된 거잖아. 당신 말대로라면. 주술사나 치료사는 그런 사람들이라며.”
“뭐어, 그렇죠…?”
그게 뭐가 그렇게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사실 좀 운명적이라며 세간에서는 대단히 로맨틱하게 받아들이는 직업이었다. 그 직업의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 아는 사람들은 신이 정해 준 운명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라며 무척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든은 생각이 좀 다른 것 같았다.
“그럼 그 사람들은 주술사나 치료사를 하려고 태어나는 거네? 누군가의 저주에 관여하거나 누군가를 치료하기 위해 태어나는 거네? 그게, 좋아?”
“…싫을 건 또 뭐가 있습니까?”
“나는 싫어.”
이든은 딱 잘라 말했다. 바람이 차네. 나는 이든을 보기 전에 하늘을 먼저 올려다봤다. 비가 올 것같이 하늘이 흐렸다. 당장에라도 천둥이 칠 것 같았고 코끝에서는 비 냄새까지 맡아졌다. 비가 오겠는데.
주변에서 시선을 거둬 이든을 보자 그도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비 때문에 하늘을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늘 너머의 누군가를, 인간에게 절대적 영향을 끼치는 누군가, 창조주니 초월신이니 라고 불리는 누군가를 그는 경멸하듯 증오하듯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운명 따윈 싫어. 나는 내가 선택하는 길을 걷겠어.”
“…그렇습니까?”
“그래.”
하늘은 흐린데 이분은 참 선명하구나.
세상은 어두운데 이분만 혼자 눈부시다.
왕세자로 태어나 타고난 걸 갈취당했으면서도 운명 탓도 하지 않고 운명 따위는 싫다고 한다. 자신이 선택하는 대로 살겠다는 사람. 나를 지키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지지하기 위해 재산의 반을, 자신의 가능성과 미래의 반을 걸었던 사람.
얼마나 고고한가. 타협하지 않는 결백함. 자신의 진심이 오해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무작정 달려와 해명하려고 들던 모습이 얼마나 순수한가.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누군가에게 그런 모습으로 비춰지던 시절이 있었던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나는 나를 바라볼 수 없으니까.
“나라면 치료사나 주술사로 태어나도 그렇게 살지 않겠어. 나는 반항할 거야.”
신과 운명에 대한 분노로 술에 찌들고 패배주의에 빠져드는 인간은 수도 없이 많이 봤으나 이토록 도전적으로 웃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가 겪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놀랍다. 내가 할 말을 잃고 그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을 때였다.
“글쎄요, 전하. 치료사가 되어 보지 않으셔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요.”
고아한 목소리와 함께 검은 후드로 온몸을 완벽하게 감싼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키.”
내가 반갑게 그녀의 애칭을 부르자 후드 안쪽에서 후훗, 하는 웃음소리가 났다.
“안녕, 실리. 잘 지냈어?”
그리고 빅토리아는 자신의 품이 큰, 정말 엄청나게 큰 후드를 파티의 드레스처럼 양옆으로 벌려서 궁정 예법에 걸맞는 절을 해 보였다.
“빅토리아 지 솔루조웨, 이르시아스 대공 전하께 감히 인사 올립니다.”
“솔루조웨면 솔루조웨 가문인가? 마법사 협회의 회장, 솔루조웨의?”
이든조차도 솔루조웨 가문을 아는 모양이었다. 대륙 최고의 마법 엘리트 가문. 마력은 개인이 타고나는 것이라지만 솔루조웨 가문에서는 거짓말처럼 모두가 마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피를 잇지 않은, 외부에서 들어와 가족이 된 이들 외에는 모두가 마력을 지니고 있는 가문. 초월자가 총애하는 마법사의 피를 지닌 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