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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36화 (35/94)

<☆36ㅡ>깜

유명한 거상은 키가 크고 육중하고 얼굴에는 살이 많으나 눈은 뱀처럼 교활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아주 유명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는 부인 멜라니가 로드카인 후작을 선택했을 때 그녀의 발밑에 엎드려 빌었다. 지금 피오르게는 편협한 사람으로 악명을 떨치지만 멜라니가 그의 곁에 있을 때 그는 부인을 너무나 사랑하여 어디를 가든 부인이 좋아하는 제비꽃으로 장식된 편지지에 서신을 보냈다던 로맨티시스트였다.

사랑이란 참 그렇다. 헤신트가 멜라니를 사랑한다는 걸 온 수도가 다 알고 있는데 멜라니라고 몰랐을까. 그러나 멜라니에게는 다른 것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그게 명예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나는 모르겠다. 멜라니가 정말로 그런 게 필요해서 수도 사람들에게 모두 지탄받을 그런 세기의 재판을 진행했을까. 그녀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낙인을 얻었다. 그것과 바꿀 만한 명예라는 게 존재하는가? 호사? 호사라면 피오르게의 부인으로서도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피오르게, 그럭저럭 초면인가?”

내가 그의 앞에 서자 크라이스가 내 뒤에 의자를 놔 주었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자 피오르게가 겁을 잔뜩 먹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아까 인사하려고 했는데 귀한 분이 오셔서. 누구신진 들었지? 내 옷장 속에서.”

피오르게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울었다. 여기에 끌려온 게 그저 무섭고 그냥 분한 모양이었다. 원래는 이런 대화를 아까 나누려고 했는데 그 찰나에 이든이 오는 바람에 리온은 피오르게를 끌고 옷장으로 들어가 버렸고 크라이스는 서둘러 주변을 정리하고 그사이 나는 내 집무실 앞에서 이든을 맞았었다.

이제 다시 이든이 난입하기 전의 상황으로 내 집무실의 풍경이 돌아간 셈이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하기가 더 쉬워졌다. 피오르게는 아까도 울고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통곡 수준이었으니까. 자신이 왜 끌려왔는지 아는 눈치였다. 혹은 아까도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확신하고 있거나.

“자아, 내 약혼자시자.”

휘익, 크라이스가 휘파람을 불었다. 신사적인 행동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어울렸다. 애초에 크라이스는 제 집에서는 백작가 차남으로 행동하면서 여기서는 망나니로 행동하는 거에 맛 들린 사람이었다.

“대공 전하시자.”

오오, 리온이 소리 없이 환호하는 척하며 입을 제 손으로 막아 보이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픽 웃어 주고는 마지막으로 검집을 들어 피오르게의 숙인 고개를 들어 올리게 했다.

“고귀한 혈족의 혈액으로 너는 이득을 취하려 했다, 인정하나?”

“저, 저는….”

“미리 말해 두는데, 어렵게 가게 만들면 나도 너를 어렵게 돌아가게 만들 거야. 피오르게, 내 인내심을 시험할 생각은 하지 마라. 나는 인내심이 별로 길지 못해.”

내가 말하자 크라이스가 뭔가를 질겅질겅 씹다 말고 피오르게 옆에 쪼그리고 앉더니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피오르게 씨, 제가 장담하는데요, 우리 주군께서 하시는 말씀은 대체로 진실이지만 저 말씀은 특히나 한 치의 거짓도 없으십니다.”

“에이, 있지. 사실 인내심이 길지 않으시다기보단 없으시지. 포로를 상대로는. 방금은 너무 좋게 말씀하셨는걸.”

리온이 웃으며 거들었다. 그러자 크라이스가 에헤이, 하고 손을 내저었다.

“포로는 아니니까 길지 않은 게 맞죠. 부단장님도, 참.”

“그래? 난 사형수쯤 되는 줄 알았는데.”

리온도 쪼그리고 앉았다. 피오르게를 두고 기사인 남자 둘이 바짝 붙어 앉은 모습은 나름대로 그림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보는 내 입장에서나 그렇지 피오르게 입장에서는 죽을 맛일 테다.

“어떠십니까, 피오르게 씨? 그냥 참고인이신지 포로신지 사형수신지 저희가 신분을 명확히 할 수가 없네요?”

“…부, 부단장님. 왜 이러십니까. 흑, 끅, 제가, 제가 노센 가문에….”

퍽,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리온이 피오르게의 옆머리를 주먹으로 후려친 탓이었다. 피오르게는 으아악, 소리를 내며 엎어졌지만 나와 크라이스는 리온이 그를 봐줬다는 걸 알고 있었다. 리온이 진심으로 힘을 줬다면 피오르게의 저 말랑해 보이는 머리통은 박살 났을 것이다.

“집 얘기는 하지 말고. 기분 잡치잖아.”

흐어어엉, 피오르게가 또 울음을 터뜨렸다. 많이 우네. 나는 피오르게가 사라져 비어 버린 내 검집 끝을 바라보았다. 아, 눈 마주치기 어렵네.

“피오르게 씨, 초면이라 숙녀답게 잘해 주고 싶은데.”

후, 나는 한숨을 쉬며 웃었다. 피오르게는 들었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고집불통의 어린애 같았다. 죽음을 앞뒀던 2년 전의 이든은 참 의젓했는데 피오르게는 죽인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계속 울어 제꼈다. 뻔뻔하고 낯짝이 두꺼운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어떤 직감도 들었다. 그가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직감. 아까 잠깐 보았던 그의 뱀 같던 눈동자가 생각났다. 그는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리라. 이건 전장을 굴러다닌 사람의 촉이었다.

“자꾸 그런 식으로 울면 울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어.”

귀가, 아프잖아.

나는 일부러 교만한 어조로 말하며 손가락으로 시끄럽다는 모양을 취해 보였다. 그러자 내 모습을 흘끗 본 크라이스가 나와 같이 박자를 맞춰 주겠다는 듯 실없이 헷헷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말도 못 하게 되지 않나요?”

혀를 떼 버리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성대를 없애 버리겠다는 뜻인지, 구체적인 방법을 말해 가며 피오르게를 압박할 필요는 없었다. 본래 스스로 상상하는 고문이 제일 무서운 법이니까.

물론 그게 제일 아픈 건 아니다. 제일 아픈 건 역시 직접 당하는 거다. 하지만 이 방에 헤신트 피오르게를 진짜로 다치게 할 생각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온갖 귀족들과 선이 닿아 있는 거상이다. 한두 대 때리는 정도야 그가 저지른 범죄가 워낙 엄중하니 할 수 있지만 그의 신체를 영구히 훼손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재판을 거치지 않고 우리가 무슨 권한이 있어서 그를 그렇게 만든단 말인가. 그도 이 점을 모르지 않아서 이렇게 떼를 쓰듯 울고 있을 게 뻔했다.

하지만 재판을 걸 수는 없다. 멜라니 피오르게가 멜라니 로드카인이 되는 과정이 온 세상에 까발려졌듯이 이든의 고통 또한 모두에게 드러날 테니까. 나는 그 자존심 강한 대공 전하의 고통을 모든 사람에게 알려 그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진 않았다.

결국 나와 피오르게가 하고 있는 건 카드 게임이었다. 서로 거지 같은 패를 든 채 블러핑만 죽어라 치고 있는 카드 게임.

“말을 못 해도 손가락만 있으면, 아니 사실 발가락이나 모가지만 있으면 뭐…. 어떻게든 의사소통은 되는 법이니까.”

리온과 크라이스의 놀라운 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둘 다 참 좋은 집안 출신들인데 건달보다 더 날건달 같다는 것이다. 리온이 혀를 쩝쩝거리며 하는 말에 피오르게의 어깨가 슬쩍 굳었다. 아, 지금은 진심으로 굳었군. 혀를 쩝쩝거리는 건 뒷골목 양아치들이 많이 하는 버릇이다. 마약으로 된 연초를 곰방대도 아니고 직접 씹기 때문에 쩝쩝거리는 버릇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걸 떠올린 게 분명했다.

“그럼, 뭐. 음.”

중얼거리던 크라이스가 달칵하고 단검을 꺼냈다. 단검이 있다는 것에 피오르게는 진심으로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기사들이 장검을 들고 다니는 건 많이 봤어도 단검을 들고 다닐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귀한 신분의 기사들은 종종 장검만 들고 다니기도 하는데 하스트레드는 모두 단검과 석궁 등 자신이 필요한 무기는 뭐든 소지하는 것이 원칙이다. 음식을 잘라 먹을 때, 시신에게서 전리품을 자를 때, 음식을 구울 때 등등 단검은 참 요긴하게 쓰이는 물건이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장검을 놓친 상태에서 몸싸움이 벌어졌을 때도 단검은 단숨에 우리를 우위로 만들어 준다.

전장은 토너먼트가 아니다. 살아남는 자가 강자인 곳이다. 크라이스가 피오르게의 입으로 단검을 가져가는 순간.

“각하!”

피오르게가 깜짝 놀라 고함을 질렀다. 진심이냐는 얼굴로. 블러핑을 가면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피오르게가 아차, 하는 이유. 가면은 깨지면 그 효용을 다한다. 절대로 가치를 되살릴 수 없다.

“그래, 피오르게. 이제 우리가 대화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될까?”

“…….”

“너는 고귀한 분의 피를 매입하려 했다. 오르센은 네가 복수에 눈멀었다고 하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설사 복수를 한다고 해도 그 김에 돈도 버는 게 상인들의 스타일이지, 안 그런가?”

“…….”

“자, 가장 첫 번째로 원하셨던 분의 이름을 들어 볼까?”

“첫 번째요?”

피오르게가 픽 웃었다. 멍청한 척을 그만둔 그는 자신을 잡고 있던 리온의 팔을 밀어 버리고는 으차, 하고 일어났다.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던 게 육중한 몸에 꽤 부담이 되었던 듯했다.

“첫 번째도 끝도 오직 한 분뿐입니다. 이 나라에서 그 피가 가장 필요하시고 가장 절박하시며 가장 높이 계시는 태양이시죠.”

이번엔 내가 침묵했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자 피오르게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분의 사냥개로 사신다고 계약하셨으면서, 저에게서 그분이 원하시는 걸 빼앗으실 수 있겠….”

“오르센은 액막이로 팔릴 거라고 하던데.”

“그거야 당연히 의사 선생을 상대로 한 거짓말이었죠. 아무렴, 태양께서 원하신다고 말할 수야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놈팡이가 그런 걸 들을 만한 주제도 안 되고요.”라고 말하며 그는 결박되어 있는 두 손을 내밀었다. 어서 풀라고 강요하는 얼굴이 아주 오만했다. 나는 결박된 그의 통통한 손목을 보다가 그 손에 새겨져 있는 작은 문신을 보았다. 작은 나무 모양의 문신은 아마 그의 상단을 상징하는 것일 테다. 먼 곳을 다니는 사람들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여 몸에 자신임을 알 수 있는 표식을 새겨 두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지워지지 않는 표식은 역시 문신이 가장 간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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