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ㅡ>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이라고 말한 실리가 말을 흐렸다. 그녀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라고 잠시 생각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는 사이 이스트럼에서 내 옷을 가져온 크라이스가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듯 얼굴을 완전히 찌푸리고 대답했다.
“전하. 세금은 돈 많은 사람들이 내고 혜택은 세금 한 푼도 못 내는 버러지들이 받으면 불공평하지 않겠습니까?”
버러지.
나는 그 단어에 크라이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람을 버러지라고 표현하는 그의 교양이 의심스러웠다. 실리가 아무 말도 안 했다면 처음으로 그녀에게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크라이스!”
하지만 실리는 경고조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크라이스는 내 담비털 코트를 내려놓으면서 실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난한 인간들에게 아무리 퍼줘 봐야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겁니다. 아무것도 남질 않아요. 아마 각하의 전 재산을 들이부어도 걔들은 치즈 한 조각도 못 먹은 듯이 굴며 아귀처럼 달려들 겁니다.”
“…….”
“그리고 고마운 줄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것들이죠. 저는 진짜 가난한 자들을 ‘착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문학들이 세상에서 제일 웃깁니다. 그 인간들처럼 탐욕스럽고 은혜를 모르는 것들도 흔치 않아요.”
탐욕스럽고 은혜를 모르는.
그 말은 나의 심장을 찔렀다. 마치 실리의 전공을 도박거리로 삼아 큰돈을 번 나를 지칭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 나는 여기에 할 말이 있어서 왔다. 나는 그녀에게 해명할 것이 있다. 나를 달래 달라고 보살펴 달라고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다 물러 줘.”
사실 물릴 사람은 크라이스밖에 없었다. 실리의 집무실에 있는 사람은 나, 실리, 그리고 크라이스뿐이었으니까.
“할 말이 있어.”
사과를 해야 했다. 그러려고 여기에 온 것이니까.
♡ 일곱 번째 앞장. 너를 지지한다 ♡
“나는… 그러려던 게 아니야.”
이든은 아주 절박해 보였다.
“그들은 당신이 리히타트라인의 목을 가져오지 못할 거라고 했어. 당신이 죽을 거라고 낄낄거렸단 말이야. 당신에게 돈을 거는 머저리 따윈 없을 거라고 했고 나는 당신을 지지하고 싶었어. 그뿐이야. 나는 절대로, 당신의 일을, 당신의 목숨을 유흥거리로 삼은 건 아니야. 무엇보다도….”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이 북받치는지 말이 빨라졌다. ‘아, 말을 끊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참 아름답다. 저 금발도 푸른 눈도. 세상에 많은 금발이 있지만 저토록 반짝이는 금발은 본 적이 없었고, 푸른 눈도 참 많지만 저런 보랏빛 도는 하늘을 담은 보석 같은 푸른 눈은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봤을 때도 레몬색 머리카락에 앵두색 입술이 참 달콤하게 보이는 것이 아름답다 생각했는데 열세 살이 된 그는 익어 가는 과일이 그렇듯 더 달콤한 아름다움을 갖춘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내 감사 인사에 그는 당황한 듯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진심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듯한 눈으로 내 얼굴을 뜯어보고 있었다. 나는 기분 좋게 얼굴을 내주었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내 인생에 나를 지지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자신이 가진 것의 많은 것을 걸고서, 공개적으로 나를 지지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전혀 다른 일인데도 나는 그 순간 열세 살 때의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 그때 그 자리에는 아버지도 같이 계셨다. 나는 내심 아버지께서 나를 구해 주시길 바랐다. 나는 사람을 죽이길 원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언젠가 사람을 죽이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소한 그것이 정당방위로 인한 것이길 바랐다. 아니, 당연히 그리되리라고 여겼었다.
열세 살, 그날은 날이 참 아름다웠다. 하늘은 높고, 구름 한 점 없었다. 사람들은 축복받은 날을 즐기는 것처럼 즐거워 보였었다. 그리고 나는 왕립 학교 사관학부의 수석으로서 검을 잡아야 했다. 내가 검을 휘두를 상대는 노예 검투사였다. 그는 그해 내내 짐승과 다른 노예 검투사들을 상대로 녹슨 검을 휘둘러 그 모두를 물리친, 원형 경기장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나와의 경기는 그에게 상품이었다. 나와의 경기도 이기면 그는 자유인이 될 터였다. 그가 얼마나 들떴었을까. 나는 상상도 못 하겠다. 열세 살짜리, 그것도 ‘계집애’를 이기면 되는 상황이었을 그가 달콤한 기대와 거대한 희망으로 얼마나 부풀어 있었을지.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아침에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학교에서 바로 경기장으로 가면 되는 것이었는데 아침에 학교를 빠져나가서 이스트럼으로 향했다.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사람을 죽인다는 것, 그걸 모두가 유흥으로서 바라본다는 것. 학교의 친구들은 내가 살인자가 될 거라고 수군거렸고, 나는 스스로 자부심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아버지가 도와주시길 바랐다. 내 얼굴만 보면 도와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 한 번도 그런 도움을 바란 적 없었는데 그때는 그랬다. 아버지가 내 얼굴을 보면 그만두라고, 아버지가 책임진다고 그렇게 말씀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다.
아침 식사 중에 나를 맞으신 아버지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나의 상태를 알아채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곤란한 얼굴을 보면서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싸우라는 것. 어떻게도 나를 구해 주실 수 없다는 것.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정신을 차릴 때까지 나는 아버지와 서로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구해 달라는 말도, 구해 줄 수 없다는 말도. 결국 내가 등을 돌렸고 아버지는 나를 잡지 않으셨다. 그렇게 나는 거기 온 적이 없었던 것처럼 학교로 돌아갔고 그날 오후 원형 경기장으로 향했다. 아버지께서 그때 나의 편을 들어 주셨다면 내 인생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모르겠다. 내 편을 들어 주셨다 하더라도 결국 내가 그 가엾은 노예 검투사의 목을 쳐야 하는 건 변함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그때 나를 가만히 바라보신 것, 아무 말씀도 못 하신 것,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앞에 내가 굳이 서서 그분을 힘들게 해 드린 것, 모든 게 내게는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이든이 그때도 나의 약혼자였다면, 실제로는 태어나지도 않은 때였지만 만약 그가 나보다 일찍 태어나 몇 살 위의 약혼자이기라도 했다면, 그는 나에게 그만두라고 말해 주었을까.
어쩌면 그렇게 해 주었을지도 모르지. 설사 결과는 똑같았다 하더라도 그 순간 누군가가 내게 그만두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한 번이라도 내 곁에 서 있어 주었다면 나는 어쩌면….
“실리?”
이든이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자 그가 내 곁에 와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내 옷자락을 조금 잡고서 조심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
“실리?”
이든은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나에 대한 걱정만으로 가득했다. 누군가가 나를 이토록 걱정한 적이 있었던가. 내 아버지조차 나를 이렇게 걱정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걱정은 타당하지 않다. 나는 강하고 누군가에게 걱정을 끼칠 이유가 없다. 심지어 열세 살짜리, 언제나 아슬아슬한 정치적 입장에 서 있는, 내가 보증을 서 줘야 하는 이든 그로스랜이라면 더욱 그렇다.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그런 것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걱정할 사람은 아니야.’라고 생각하고 넘겼을 것이고 사실 나도 그 생각이 맞다고 여겼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실리? 괜찮아? 실리?”
이든이 놀라서 내 옷자락을 조금씩 더 강하게 흔들고 있었다. 내 몸을 흔들지도 못하고 내 옷자락만 붙잡고 있는 어린 약혼자를 바라보다 한마디 했다.
“키가 크셨네요.”
처음 만났을 때가 2년 전이었다. 나는 그때 그를 안아서 마구간을 나왔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는 나와 키가 비슷해져 있었다. 그때는 한참 내려다보아야 했었는데.
“어? …어, 컸지.”
내 뜬금없는 말에 당황한 이든이 대답을 한 박자 늦게 했다. 그는 내가 머리라도 다친 건 아닌지 우려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웃으며 내 옷자락을 잡은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내가 힘을 빼자 그는 마법처럼 스르르 내 옷자락을 놓았다.
“요즘 로즈메리가 꽃차를 이것저것 끓여 주더군요.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맛이 좀 들었습니다. 같이 드시겠습니까?”
내가 묻자 이든이 환하게 웃었다.
“꽃차, 좋지.”
갑작스러운 티타임은, 그러나 완벽했다. 늘 그렇듯 별 대화는 없었지만 평화로웠고 우리는 조금 웃고 있었다. 이든이 돌아가야 했을 때 조금 아쉬움을 느낄 정도로 안온한 티타임이었다.
“갈게.”라고 말하고 말에 오르는 이든은 숙제를 끝낸 듯 편안한 얼굴이었다. 담비 털 코트가 그의 날씬한 몸에 맵시 있게 잘 어울렸고 하얀 얼굴에는 벌써부터 홍조가 피어올라 있었다. 꽃을 선물하고 싶네.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꽃을 든 소녀처럼, 그렇게 이든은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가 돌아가는 것을 배웅하고 집무실로 돌아오자 크라이스가 “아우.”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그는 이든이 가는 타이밍에 맞춰 내 집무실에 들어온 듯했다.
“깜짝, 놀랐네요, 정말.”
“아, 정말로 놀랐어.”
그 옆에서 리온이 목을 어루만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깜짝 놀랐다는 그의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아무래도 재밌었던 모양이다. 기사단의 사람들은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세상만사를 재미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조금 있다.
“욱, 욱….”
우리야 그럴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끌려온 한 인물에게는 별로 재밌지 않은 경험이었던 모양이었다.
헤신트 피오르게가 울면서 거의 토하려 들었다. 하지만 지금 토해서야 욕만 먹을 뿐이니 안간힘을 써 참는 듯했다. 실제로 그는 끌려왔을 때 한 번 토했다가 깔끔을 떠는 크라이스에게 상욕을 먹는 바람에 그때부터 어린애처럼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