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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34화 (33/94)

<☆34ㅡ>깜

마차로는 부족하다. 당장 달려가야 하는 마음이 너무나 절박해서 마차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차는 도시 안에서 느긋하게 달릴 것이고 나는 그러기엔 마음이 너무 절절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말을 타고, 지금, 요?”

로즈메리가 말리고 싶은데 말릴 수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나는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고 로즈메리와 테인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뒤를 폴이 뛰어오고 있었다. 그는 놀라서 좀 뒤처지긴 했어도 나의 시종이라는 본분을 잊는 사람은 아니었다. 바로 달려와서는 내 뒤에 따라붙었다.

“지금 밖은 좀 추운데요. 말을 타실 거라면 옷을 좀 두껍게 걸치셔야 할 걸요.”

폴의 말에 로즈메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아! 그렇죠! 맞습니다, 전하. 폴의 말대로 날이 무척 춥습니다. 일단 소녀가 외투를 가져올 것이니,”

“필요 없어.”

“전하아.”

로즈메리가 뒷말을 끌면서 애교있게 나를 달래려 들었다. 나는 평소에 로즈메리의 말을 좀 듣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았다.

설명해야 해.

그저 그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마구간에 가서 말에 올라타는 순간에도 그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야기해야 돼. 너를 웃음거리로 삼은 게 아니라고 꼭 말해야 해.

따뜻한 실내에 있었는지라 내 옷은 얇았다. 초겨울 바람이라 아주 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차고 무거운 바람이었다. 게다가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하자 바람은 거세어졌다. 몸이 달달 떨릴 정도로 추웠다. 손가락이 곱고 피부가 에일 것 같은 바람이었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그럴 시간 따윈 없었다.

“하스트레드 옌선 지부는 외궁에 있습니다!”

내가 무작정 말을 달리기 시작하자 테인이 고함을 쳐 목적지를 알려 주었다.

“왜 하스트레드가 궁에 있어?!”

“국왕 전하의 기사단이니까요!”

정확히는 왕과 계약을 맺은 기사단이라는 것이겠지만.

왕궁은 옌선에서 가장 높고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어디서나 왕궁이 보였다. 보이는 곳을 향해서 죽 달렸다. 도시에서 말을 전속력으로 달리자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누군가는 치일 뻔하고 누군가는 물건을 엎었다. 미안하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실리에게 가야 하는데, 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말을 세우시오!”

수도경비대의 경비병이 석궁으로 우리를 겨누며 소리치자 테인이 맞고함을 질렀다.

“이르시아스 대공 전하시다!”

테인의 고함에 경비병이 깜짝 놀라 석궁을 거두었다. 그사이 우리는 이미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요정들의 도시라 불리는 옌선은 초겨울에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말을 왕궁으로 직진으로 달리다보니 나는 허름한 주택들을 지나게 되었다.

“조심하십시오, 빈민촌입니다.”

테인이 내게 주의를 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을 세우지 말고 전속력으로 벗어나라며 그는 내 앞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달리면서 주변을 어쩔 수 없이 보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빈민들을 본 적이 없었다. 나 자신은 축사 같은 데서 빈민보다 더 안 좋은 대우를 받으며 살았지만 그래도 내가 머물던 곳은 결국 대저택들뿐이었다. 나를 확보하는 사람들 자체가 다들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하인들조차도 번듯한 옷을 입고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뿐으로 나는 배를 곪고 지내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난생처음 보는 셈이었다.

충격적이었다. 저게 집이라고? 거기에는 문도 없어서 안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지붕에는 짚이 얹혀져 있는 곳보다 없는 곳이 더 많았다. 나무 골조가 훤히 드러나 있고 그나마 얹어져 있는 짚도 썩은 것처럼 보였다. 주택은 목조였는데 나무들도 썩어 있었다. 거리에서는 심한 악취가 났다. 그리고 그 악취가 나는 좁은 거리에 사람들은 빼곡히 빨랫줄을 쳐서 빨래를 널었다. 일층도 이층도 삼층도 다 빨랫줄을 쳐서 빨래를 널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가난하면 집 앞에서 하늘을 볼 여유도 없어지는 건가.

하늘을 볼 자격도… 없는 건가. 돈이 많아야 넓은 하늘을, 광활한 정원에서 볼 수 있는 건가. 충격적이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앞서 가면서도 뒤에 있는 나의 낌새가 이상했는지 테인이 연방 뒤를 돌아보았다.

“괜… 찮아.”

내가 중얼거리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테인이 고함을 쳐서 다시 물었다.

“전하?!”

우리는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골목 곳곳에서 우리를 보고 있는 눈길들이 느껴졌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잘 차려입고 있는 우리들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건 어둠속에서 눈을 빛내는 짐승의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누가, 저들을 저렇게 만드는가.

“괜찮아! 빨리 벗어나자!”

같은 도시 내에서 어떻게 이런 격차가 일어날 수가 있지. 왜 일어나는 거지.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 차이 때문에? 하지만 헤신트 피오르게도 평민이었잖아. 평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격차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지?

누군가가 우리에게 돌팔매를 던졌다. 말의 발을 묶어두려는 것 같았지만 아슬아슬하게 우리는 피하는 데 성공했고 그대로 빈민가를 벗어났다. 벗어나자마자 우리는 말을 멈춘 채 서로를 바라보며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많이 무서웠다.

“나는… 저런 곳 처음 봤어.”

내 솔직한 말에 테인이 손을 뻗었다. 그는 나의 몸을 도닥거리는 게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는지 내 말의 갈기를 괜히 두어 번 만지고는 손을 거두면서 답했다.

“저도 말로만 들었습니다.”

“뭐라고 들었는데?”

놀란 탓에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나는 드디어 도시에서 지켜야 하는 속도대로 말을 몰 수 있었다. 어쩌면 왕궁이 가까워져옴에 따라 내 마음이 차분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실리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다. 아까는 무작정 해명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정작 왕궁이 가까워져 오니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진 까닭이다.

“이전에 어느 왕족이 빈민촌을 지나가려 했는데 왕족인 걸 알면서도 빈민들이 달려들어 그분을 죽이고 그분이 가진 모든 걸 빼앗았다고 합니다. 당연히 왕궁에서는 범인을 잡으려고 했지만 빈민들의 입장은 나만 안 잡히면 돼, 혹은 어차피 이렇게 사는 거 내일 따윈 없으니 죽게 되면 죽으면 그만이야, 라는 식이라서….”

“…….”

“다들 매우 비협조적인 데다가 옆 사람이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아서 저곳은 버려진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그저 안 가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테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나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생각했다. 내가 왕세자로만 살던 시절이었다면 나는 아마 빈민촌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저런 삶을 살아보지 않았던가. 도저히 남처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완전히 남이라는 걸, 나와는 종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내일 따윈 없으니 죽게 되면 죽으면 그만.

나만 안 잡히면 돼.

그런 빈민촌을 수도 한가운데에 저렇게 품은 채로 다들 살아가는 건가. 안 보이는 척하면서?

삼촌은, 왕은 뭘하고 있는 거지.

마음속 반발심에 곤란해졌다. 그건 마치 내가 고귀한 자가 아니라 저 더럽고 천한 자들과 같은 사람들인 것만 같아서. 하지만 사실은 이해할 수가 없어. 결국 나는 저렇게 살 뻔하지 않았던가. 실리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어느 대저택에 있는 저런 축사 혹은 헛간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결국 내 생은 저들과 다를 바가 없었겠지.

실리는 나를 구했다.

그렇다는 건 저들도 저들을 구할 누군가가 필요한 건 아닐까.

마음이 어두워졌다.

실리를 만났을 때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에 놀랐고 나의 옷차림이 얇은 것에 더 놀랐다. 그녀가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쳐주고는 나를 벽난로 가에 앉힌 뒤 무슨 일이냐고 물으며 따뜻하게 데운 와인을 건네주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도 아무 말도 못 했다. 내가 변명을 해야 하는 시간인 건 안다. 그런데 나는 빈민가를 지나면서 완전히 기가 질린 상태였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내가 달래야 하는데, 내가 너에게 잘못했다고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또 나를 달래고 보살피는 건 실리의 몫이었다. 나는 그녀의 어른스러움을 보며 아득해졌다. 나는 언제쯤 그녀를 품어 줄 수 있을까.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전하?”

내 옆에 앉아서 나의 빈 잔을 데운 와인으로 채워주더니 내 앞에 견과류와 말린 과일이 놓인 접시도 밀어 준 실리가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재촉했다.

“…아이프르가를 지나왔어.”

“위험한 일을 하셨군요.”

실리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려서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미안.”

마지막에 돌팔매질에 당할 뻔한 걸 생각하면 진짜 위험한 짓이긴 했다. 그녀에게 사과하자 그녀는 내 손등을 손가락 두 개로 도닥거리더니

“아이프르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냥 아이프르에서 있을 만한 일이 있었어. 그런데 거긴 너무….”

“너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더럽더라. 하늘이 보이지 않더라. 사람들이 험하더라. 무슨 말을 해야 그 분위기를 말할 수 있을까. 단어를 고른 끝에 그나마 가장 비슷해 보이는 단어를 꺼낼 수 있었다.

“절망적으로 보이더라.”

“…….”

“부왕께서 통치하실 때도 거긴 그랬겠지?”

내 질문에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던 실리가 천천히 대답했다.

“조금 덜했지만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덜했어?”

“정확히는 앤 왕비 전하께서 살아 계실 때 좀 나았었습니다. 왕비 전하께옵서는 자애로운 분이셨고 복지사업에 애를 많이 쓰시는 분이셨으니까요. 그때는 국가에서 빈민층을 위한 병원이나 보호시설 같은 것들이 더 잘 운영된 것으로 압니다.”

“지금은?”

“송구합니다만 지금은 그 시설들이 신전이나 마법사협회, 혹은 다른 자선단체로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어 그 시설들을 인수해간 것이다 보니 순수하게 복지사업을 펼치시던 왕비님에 비하면 돌아가는 혜택이 적지요.”

“왜 지금은 국가에서 복지 사업을 안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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