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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33화 (32/94)

<☆33ㅡ>깜

실리를 만날 때는 전혀 순수하지 않았었다. 온갖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때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기보다는 체념과 절망에 휩싸여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거 같기도 했다. 나는 그때 모든 희망을 놓은 채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할지 곤란할 지경에 부딪쳐 있었다. 그때 갑자기 들어온 실리는 나를 안아 올리고선,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렸다. 빼앗긴 나의 계절과 나의 숨을 되돌려 주었다.

그래서 나는 실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실리의 부친은 저주사로 죽었다고 했던가. 나는 저주사가 어떤 건지 모르지만 가끔 내가 저주에 걸린 것 같다고 느낄 때는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실리를 생각했다. 실리가 나에게 해 준 것들. 내가 실리에게 해 주고 싶은 것들. 실리라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무력한 나에 대해서.

열세 살의 실리를 생각하기도 했다. 열한 살의 실리도. 그때의 그녀는 어떠하였을까. 외롭진 않았을까. 그녀가 내게 준 검은 여전히 나에게 있다. 나는 그 검을 가지고 검술을 배웠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 검을 빤히 바라보았다. 보지 못한 작은 흠집이라도 발견해 내면 그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안쪽 어딘가에 닿은 것만 같아서.

그녀는 가족이 없다.

나도 가족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부부의 연을 약속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한 가족이 될 것이다. 운명이 될 것이다. 그건 너무나 완벽하게 느껴져서 가끔 두려워졌다. 누군가가 그녀를 빼앗아 갈 것만 같았다.

초조함이 들 때면 밤에 나가 수영을 했다. 그건 늘 아슬아슬한 기분이 든다. 뭔가가 잘못될 것 같은 기분이 최고조에 이르는 행동이다. 누군가가 내 목 뒤를 강타하고 나를 끌어내서 나의 모든 것을 빼앗고 나를 노예로 만들어 버릴 것만 같다. 그 공포 속에서 나는 수영을 한다. 그리고 방에 돌아오면 초조함도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공포를 이긴 것만 같아서.

아침 식사를 하러 가자 늘 그렇듯 실리는 먼저 식탁에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하얀 셔츠, 검은 바지, 부츠라는 간편한 차림이었다. 목에는 늘 걸고 다니는 예쁜 여성용 목걸이.

“실리.”

고요함 속에서 식사를 하다가 실리에게 말을 걸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예, 전하.”

“목걸이는 누가 선물한 거야?”

아무리 봐도 실리가 샀을 거 같은 디자인이 아니었다. 실리는 드레스 입는 걸 참 귀찮아했다. 그녀는 늘 있는 거 대충 입고 전에 신었던 거 대중 발에 끼고 후딱 파티에 가서 눈도장만 찍고 오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시녀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하스트레드 공작의 이름에 먹칠을 한다며 울고불고 빌었고, 결국 그녀는 새 드레스와 새 구두, 새 액세서리를 하고 공들인 머리에 화장을 받은 다음 유행에 맞는 모습으로 파티에 나가곤 했다. 그런 그녀가 저런 목걸이를 사기 위해 시간을 소비하거나 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픽 웃으며 “제가 고르지 않은 게 티가 납니까?”라고 물었다. 장난기 어린 목소리였다.

“응.”

대화가 경쾌해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어머니 유품입니다.”

그 순간, 나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유품… 이었구나. 그래서 계속, 몸에서 떼어 놓지 않고 차고 다니는구나.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물려주신 거구나. 잘 어울려. 역시 어머니시라 너에게 뭐가 잘 어울리는지 잘 아시네.”

분위기가 어두워지지 않길 바랐다. 실리가 과거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 느끼길 바라서 나는 서둘러 그녀의 어머니를 칭찬했다. 그런데 내가 뭘 잘못 건드린 건지 실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를 낳으실 때 난산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몇 년 못 사셨어요. 제 기억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십니다.”

“…….”

“이것도 물려주신 많은 것들 중 그나마 얌전한 디자인의 것을 골라서 제가 마음대로 하고 다니는 것일 뿐입니다.”

“나도 어머니 얼굴이 거의 생각이 안 나. 어머니와 아버지 곁에서 큰 게 아니니까.”

나는 내가 얼마나 불행한지 떠들었다. 당황했던 것 같다. 아마 그랬었던 것 같다. 머리는 마비되었고 입은 제멋대로 내 불행을 계속 읊조렸다. 내가 얼마나 불행한지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하는데 실리가 내 손을 잡았다. 그 손의 따뜻함이 마치 덴 것처럼 뜨겁게 느껴져 흠칫하고 놀랐을 때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잘 견디셨어요.”

그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힘듦을 이야기한 사람 앞에서 내 불행을 강조하고 그녀가 힘들어하는 순간을 빼앗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니, 나는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야.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야. 나는 그냥 당황한 거야. 내가, 내가 너에게 그런 말을 해 주고 싶었어. 힘들었냐고, 내가 너에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전하. 편안히 즐기십시오.”

실리는 내 손등을 도닥거리고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식사는 반 이상 남아 있었고 나는 내가 그녀에게 잘못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아마 이건 사과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사과받기 원하지 않을 테니까.

그녀가 원하는 건 그냥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라는 걸 그녀의 완고한 뒷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실리.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우두커니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내가 실수한 건 알지만, 그걸 사과하고 그리고 더 듣고 싶어.

하지만 실리의 뒷모습은 사라졌고 그녀는 그날부터 며칠 동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실리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나흘째 되는 날, 수도에 눈이 왔다. 눈이라고는 해도 함박눈은 아니었고 거의 서리에 가까운 눈이었다. 새벽에 잠깐 내린 눈은 기온을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는데 그래서인지 내 방에는 계속 벽난로에 불이 활활 타올랐다. 방 안의 공기가 답답해지자 시녀들은 내 방에 화병을 몇 개 더 추가했다.

바닥에는 하얀 모피가 깔렸고 의자들에도 전부 모피가 추가되었다. 내 시트는 가볍고 따뜻한 솜털 이불로 바뀌었고 침대 토퍼도 솜털로 된 것을 깔아 따뜻하고 푹신해졌다. 그걸로 모자라 사람들은 마력 보온돌을 몇 개나 내 침대에 넣어 주었다. 잘 때 따뜻하게 자는 용도였다. 작은 것들은 주머니에 넣어 들고 다니는 용도기도 했다.

“이 모피들은 모두 각하께서 손수 잡으신 것들입니다.”

라이즌이 물건을 하나하나 소개하더니 모피를 소개하며 퍽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새삼스럽게 모피들을 바라보았다. 물건을 잘 모르는 내 눈에도 모피들은 꽤 상급의 것으로 보였다.

“좋은 물건들로 보이는데.”

“그럼요, 이 하얀 모피는 눈호랑이의 것입니다. 각하께서 잡기 전에는 그게 아직 남아 있기는 한 건지 모두 의심하고 있었죠. 특히 체구가 작고 사납기로 유명한 눈호랑이들 중에서 이 정도로 큰 모피가 나오려면 체구가 어마어마하게 컸을 겁니다. 팔았다면 부르는 게 값이었을 거예요.”

“아아.”

“저건 표범사슴의 것인데, 아시다시피 그 사슴도 아주 사납죠.”

사납고 그만큼 희귀하고 높은 값을 받는 모피들로 가득한 내 방이었다. 모두 실리가 손수 잡았다는 모피들을 보며 나는 씁쓸해졌다. 내가 해야 할 몫이었다. 내가 그녀의 방을 이렇게 꾸며 줘야 하는 거였는데.

“그런데 실리는 어디 있어서 통 보이질 않아? 당분간 같이 식사를 못할 거 같다는 쪽지는 봤지만 그래도 꽤 오래 못 보네?”

태연한 척 말했지만 속이 말이 아니었다. 실리가 나한테 화가 난 건지 실망을 한 건지 둘 다인 건지 아니면 그보다 더 나쁜 상황인 건지, 그런 걸 알려면 실리를 봐야 할 텐데 그녀는 나에게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라이즌이 “곧 오시겠지요.”라며 내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평소와 같아서 나는 딱히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넘어갔었다. 도리어 문제를 느낀 상대는 라이즌이 아니라 로즈메리였다. 그녀는 조금 불안한 얼굴로 내게 차를 따르고 내 옷매무새를 만져 주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려다가 내 속이 워낙 들끓고 있어서 아는 체를 안 하고 넘어갔는데 밖에 다녀온 폴이 해맑게도 말했다.

“전하, 전하. 들으셨습니까? 피오르게가 감히 각하의 일을 가지고 도박을 하다 각하의 귀에 들어가서 곤욕을 치렀다고 합니다.”

“뭐, 라고?”

“헤신트 피오르게라고 유명한 상인이 있는데, 아, 주로….”

“알아, 알아. 피오르게. 그런데, 그 피오르게가 뭘 해서 어떻게 됐다고?”

“각하께서 왕명을 받아 북부로 마물 토벌을 다녀오시지 않았습니까. 그 건을 두고 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도박을 걸었다고 합니다!”

나는 침묵했다.

그 도박에서 제일 크게 걸었고 가장 많은 이득을 취한 자가 바로 나인데…. 실리가 화가 났구나. 하긴 화가 날 만한 일이었다. 내가 내 피를 액막이로 쓴다고 했을 때 토했던 것처럼 실리도 그녀의 목숨이 걸린 일을 도박, 즉 유흥거리로 삼는다는 걸 알았을 때 충분히 불쾌했을 것이다.

문제는 나는 그런 이유가 아니었는데.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버릇 같은 웃음. 나는 그 이후로 그녀의 웃음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녀는 얼마나 많은 일을 웃음으로 넘겨 버렸을까.

설명해야 돼.

내가 왜 그랬는지, 그녀의 목숨을 오락거리고 삼은 게 아니라는 걸 말해야 해.

지금 당장, 한시라도 빨리.

마음이 다급해졌다. 내가 몸을 일으켜 걷기 시작하자 밖에 있었던 재밌는 일들을 이야기해 주려던 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기를 두고 갑자기 사라지려는 나에게 당황한 것이다. 당혹스러워하는 사람은 폴뿐만이 아니었다. 테인과 로즈메리가 다급하게 내 뒤를 따라붙었다.

평소에 말이 없는 테인 대신 요령이 좋은 로즈메리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애교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행하십니까? 마차를 대기시킬까요?”

“말을 탈 거야. 실리를 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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