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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32화 (31/94)

<☆32ㅡ>깜

“피오르게? ‘그’ 피오르게?”

의외의 이름이 나와 상념에서 퍼뜩 벗어났다. 누구? 내가 오르센을 바라보자 오르센이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그는 입을 열고 말하는 걸 멈추진 않았다.

“예. 피를 산다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습니다. 헤신트 피오르게였어요.”

“당신이 피를 그렇게 많이 뽑았는데 그 피를 모두 피오르게가 샀단 말이에요? 왜요? 상품으로 구입한 겁니까?”

리온이 이해할 수 없어 하며 물었다. 나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헤신트 피오르게. 그 거상이 왜 대공의 피를 구입한단 말인가. 물론 액막이로 대공의 피를 원하는, 그런 특이한 걸 바라는 귀족들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인이고 대공은 왕족이었다. 상품 하나 때문에 이런 위험한 다리를 건널 이유는 없다. 나중에 대공의 피를 팔았다는 걸 대공 자신이 알게 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모르, 셨습니까?”

오르센이 황당한 얼굴로 나와 리온을 번갈아 보았다. 왜냐고 묻는 우리가 이상하다는 듯이.

“대공 전하께서 피오르게의 금광을 가져가셨잖아요.”

“피오르게는 복수를 한 거예요.”라고 말하는 오르센을 보며 우리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나와 리온은 수도경비대 청사에서 나온 내내 침묵하고 있었다. 우리가 나왔을 때는 이미 밤이라 밤하늘에는 달과 별이 떠 있었고 거리는 각양각색 불빛들로 가득했다. 확실히 옌선은 수도이고 특히 남문은 가장 호화로운 상점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보니 온갖 야광석으로 상점들은 휘황찬란한 빛을 내고 있었다.

“정말, 의외네요.”

이스트럼에 도착해 말에서 내린 다음에야 리온이 한마디 했다. 나는 침묵하다 겨우 한마디, “그러게.”라고 대꾸했다.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뭐라고 해야 좋을까?

내 어린 약혼자는 나의 일로 도박을 했다. 그것도 유례가 없는 엄청난 재산을 걸었고 승리하여 그는 어마어마한 부자가 됐다. 원래도 부자였는데 지금은 옌선에서 제일가는 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이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걸고 갈 걸 그랬어요.”

“뭐?”

“북부 마물들의 왕이든 황제든 어차피 우리가 그놈을 끝장냈을 텐데 재산이나 왕창 걸어서 한 재산 두둑하게 챙길 것을요. 와, 이렇게 한 방에 돈을 버는 경우가 있습니까?”

리온은 이든의 수완에 넋이 나간 듯 감탄을 늘어놓았지만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리온에게 물었다.

“정말 걸 수 있어?”

“예?”

“걸 수 있냐고. 우리가 리히타트라인을 퇴치한다는 거에 재산의 반을 걸 수 있냐고.”

“당연히 저는 각하를 믿고 하스트레드를 아니까….”

리온이 웃으면서 말하는 걸 바로 자르고 물어보았다.

“변수는? 변수가 있을 수도 있잖아.”

“…….”

“물어보겠는데, 너는 정말로 출발하기 전에 우리가 리히타트라인을 죽인다는 것에 재산의 반을 걸 수 있었어?”

리온이 우물쭈물하더니 “반은 좀 그렇고 삼분의 일, 아니 오분의 일, 아니 십분의 일, 아니….” 하고 계속 말을 바꿨다.

그렇다, 우리의 전력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인 리온조차도 돈을 걸 수가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리히타트라인을 죽일 자신이 있었다. 우리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북부로 달려갔었다. 하지만 우리가 죽일 수 있다는 것과, 실제로 죽인다는 건 차이가 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과 그 일을 해내는 것의 차이는 아주 크다. 그래서 리온은, 특히 사람도 여자도 사랑하지 않고 오로지 돈만 사랑하는 리온은 돈을 걸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능력이 있지만 세상에는 변수라는 것 또한 있으니까. 예를 들어 북부 마물들을 다 잡았는데 거기에 리히타트라인이 없으면 어쩔 것인가? 리히타트라인이 도망가 버리면? 숨바꼭질을 하게 되면 유리한 건 리히타트라인이지 우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다수가 움직여야 하는 직립 보행의 인간들이었고 리히타트라인은 하룻밤 사이에 아득히 멀리 갈 수 있는 거대한 괴조였으니까.

그런데 이든은 자신의 그 어마어마한 재산 중 반을 도박에 쏟아부었다. 내가 해낼 것이라 믿고서. 이건 좀….

“그래도 이렇게나 믿어 주는 약혼자시라 든든하시겠습니다.”

리온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특유의 아부를 떨었다.

“소름 끼치는 일인데.”

리온은 믿어 주는 약혼자라고 말했지만 나는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내가 소름 끼친다고 말하자 리온은 뭔지 알겠는지 침묵으로 내 말에 동의를 표했다.

이든은 도대체 그 순간 뭘 봤단 말인가. 그에게 있는 건 잘난 재산밖에 없다. 그의 작위? 왕이 몰수하면 그냥 끝장날 이름뿐인 작위다. 그러나 재산은 몰수하기가 쉽지 않다. 작위는 왕이 내린 것이니만큼 그가 몰수할 때 상대적으로 조금 쉬울 수 있지만 재산은 그가 내린 것이 아니다. 이든의 재산은 외가로부터 왔고 따라서 왕은 명분 없는 강탈을 자행하게 된다. 그건 귀족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는 행위기 때문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든이 정말 믿어야 할 것은 작위가 아닌 재산이었다. 재산만이 그의 고유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고유한 것들을 늘려 가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냉큼 도박에 그 반을 걸어?

나에게 변수가 생겼으면 어쩔 뻔했는가.

“도박에 빠지신 걸까요?”

열세 살이면 충동이 잘 제어가 안 될 때기는 하지만 그분은 나름대로 이성적인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글쎄.”

그런 거면 진짜 골치 아파지는데.

피오르게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지만 고귀한 분이 본인 재산으로 도박을 하신다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분의 법적 보증인이지 대리인이 아니다. 즉, 나는 연대 책임을 지는 것 외에 딱히 권한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알아보겠습니다.”

리온의 말에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사람이 있느냐는 말도, 힘들지 않겠느냐는 말도 이 상황에서는 사치였다. 이든이 도박에 빠진 건지 아닌지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만약 도박에 빠진 거라면.

아, 그런 어두운 상황은 정말 닥쳤을 때 생각해 보도록 하자.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  여섯 번째 뒷장  ♡

폴 히옌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좀 심드렁해져 있었다.

소피가 나에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게 된 것도 실리가 나에게 안절부절못하며 청탁이라는 단어까지 쓰게 된 것도 다 이 머저리 같은 놈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곱게 보이지가 않았다. 도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안녕하십니까, 전하. 오늘부터 전하를 모시게 된 폴입니다!”

발랄한 인간이었다.

일단 마음에 드는 건 놈의 갈색 머리카락이 거의 빨강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그 색은 언뜻 보면 실리의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놈의 갈색 눈도 마음에 들었다. 색이 옅어서 아침 햇살을 받자 반짝이는 게 실리의 눈동자처럼 금색에 가깝게 보였다. 피부는 희었지만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뺨에 벌써 주근깨가 있다는 것이었다. 실리는 스물여덟 살이지만 얼굴에 티 하나 없는 사람인데.

그래도 조금, 실리를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 있는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해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테인과 로즈메리가 탐탁잖아 하는 모습을 보여도 전혀 꺼리지 않았다. 그는 테인, 로즈메리, 나를 보더니 활짝 웃었다.

“와, 여긴 얼굴 보고 뽑나 봐요. 저, 여기 들어와도 됩니까?”

“실리와 네 어머니의 청탁이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었지.”

내 뾰족한 말에도 폴은 역시, 라는 얼굴로 하하 웃더니 불끈 팔의 알통을 보였다.

“얼굴은 자신 없지만 힘은 자신 있습니다. 힘쓰는 일은 맡겨 주세요!”

…푸하하하.

결국 나는 웃어 버리고 말았다.

착하고 매력적이라더니 정말 그 말 그대로였다. 미워하기 어려운 사람이란 이런 사람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테이블에 턱을 괸 채로 물었다.

“다친 토끼 같은 거 보면 막 치료해 주고 싶고 그런 타입이지, 너?”

내 말에 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치료를 안 해 주면 어떡합니까?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가기엔 너무 가엾잖습니까.”

먹으면 되지.

식량이지 않은가, 라는 말은 입 안에서 삼켰다. 대공인 나조차 이렇게 생각하는데 폴은 당연히 다친 토끼는 치료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득 소피가 이 아들을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을지 알 수 있었다.

강인한 어머니의 보호 아래 폴은 정말 천진난만하게 큰 것 같았다. 세상의 잣대로는 전혀 그래선 안 되겠지만 나는 이 순간 폴이 너무 부러워졌다. 조금만 부러웠다면 그를 미워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너무 부러워서 미워지지도 않았다. 이 아무것도 모르는 깨끗함이 바보 같다기보다는 상쾌하게 느껴졌다.

“아니, 대공 전하의 시종이 힘쓸 일이 뭐가 있다고,”

로즈메리가 기가 막힌 듯 말했지만 나는 슬쩍 찻잔을 들어 로즈메리의 말을 막았다. 힘쓸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아이는 마음에 들었다.

“쓸 일이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결정해.”

힘쓸 일이 아니라 폴을 쓸 일이 있는지 없는지를 내가 결정한다는 뜻이었다. 폴은 내 말에 숨겨진 의미를 읽지 못한 것 같았지만 테인과 로즈메리는 바로 알아들었다. 둘은 희미하게 고개를 숙여 복종의 뜻을 나타내며 입을 다물었다.

“포리.”

“아…? 저를 부르신 겁니까.”

“그래, 널 포리라고 부르겠어.”

“강아지 이름 같네요.”

“응.”

강아지 이름 같다고 말하면서도 기분 나쁜 기색은 손톱만치도 없는 그와 그 말을 들으면서도 그저 유쾌하기만 한 나. 우리는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만나면서 이렇게 순수하게 아무 생각 없이 기분이 좋아지는 건.

“아, 혹시 사냥에 나가시게 되려나요?”

“사냥? 글쎄? 아직은 별생각 없는데, 왜?”

“저, 사냥개들이랑 금세 친해지거든요.”

매하고도요, 라고 말하며 폴이 환하게 웃었다. 접은 눈 사이로 금색인지 갈색인지 모를 옅은 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래, 재밌겠네. 나중에 사냥에 가게 되면 옆에 동행시켜 주지.”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또 실리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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