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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31화 (30/94)

<☆31ㅡ>깜

“그, 저도 몸이 좀 허해서….”

그리그가 비굴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별명은 교활한 곰. ‘곰’인데, 자기 몸이 허하다고 말하는 육중하고 위협적인 거구를 보며 내가 아아, 라고 애매하게 대답했을 때였다.

“형, 양심은 어디 갖다 버렸어? 빨랑 찾아와. 그리고 양심 찾으면서 오르센도 데려오고.”

마침 지하 감옥 입구에 있는 취조실에 다다라 그 안으로 들어서던 리온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리그에게 면박을 주고는 취조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니, 자기 할 말만 하고 들어가면 어떡해. 내가 그리그를 바라보자 그가 커다란 손을 맞잡더니 거의 비비다시피 하며 말했다.

“저는 그냥 그리핀 눈알 몇 개만… 안 되겠습니까?”

“뭐 얻으면 리온을 통해서 보내주지.”

내 말에 그리그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 그,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보내 주시면 안 됩니까? 제가 아예 몸종을 하나 붙여 드릴 테니까!”

“몸종은 좀 곤란한데. 하스트레드는 빠르게 움직이는 집단이고 훈련되지 않은 자는 따라오기 힘들어.”

“그, 그럼, 그럼….”

그리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결국 ‘하스트레드에 아는 사람을 알아볼 테니 리온을 통해서는 보내지 말아주십시오. 저희 막내가 힘들어합니다.’라고 울상을 지었다. 알 것 같았다. 리온은 내게 그리핀 안구를 받아서 썩히다 슥 버려 버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리핀 안구는 희귀한 보양식 재료 중 하나지만 사실 하스트레드에서는 남아도는 물건이었다. 하스트레드에 처음 들어오면 그런 보양식들이 버려지는 게 아까워 챙겨 먹지만 곧 최상급 외에는 쳐다도 안 보게 되는 현실이 온다. 너무 많이 굴러다니기 때문이다. 대체로는 운 좋게 마을을 만나면 돈으로 마련해 나누거나 아니면 짐이 되는 데다 맛은 없기 때문에 버려지는 게 일상이었다.

“마음대로 해.”

내 말에 그리그가 “그럴까요?”라고 하더니 기분이 좋아진 얼굴로 사라졌다. 손수 오르센을 데려올 모양이었다. 픽 웃음이 났다. 재밌는 사람이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취조실로 들어오는데 리온이 나에게 경고했다.

“괜히 교활한 곰이라는 별명이 있는 게 아니니까 속지 마세요.”

“응?”

“저에게는 별 뜻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모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의도를 넣는 사람이에요. 방금 재밌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셨죠?”

리온의 눈에 경계가 가득했다. 나는 순순히 “맞아, 그렇게 생각했어.”라고 말하며 리온의 옆에 앉았다. 테이블 근처에 끈적한 것들이 있어 내 부츠를 더럽히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피인 것 같았다. 어지간히 열렬한 취조들을 하셨군. 내 부츠 끝에 묻은 피와 고름을 테이블의 그나마 깨끗한 부분에 비벼 닦는데 리온이 말했다.

“조심하십시오, 주군. 그는 필요하면 언제든 태도를 바꿀 교활한 인물이에요.”

나는 이럴 때 리온의 머릿속에 도대체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진다. 자신을 저렇게나 사랑하는 친형에게 이토록 차가울 수가 있나. 내 얼굴에 내 생각이 쓰여 있기라도 한 건지 리온이 쓰게 웃었다.

“사랑이 전부는 아니죠.”

“그래?”

“서른여섯 살짜리 동생을 직시하지도 못하고 아가라고 불러 대는 사랑이 무슨 사랑입니까.”

그건 좀 심하긴 했다. 나는 리온의 상관이었고 그는 상관 앞에서 자신의 동생을 아기 취급한 것이었다. 리온은 기사, 그것도 아주 유명하고 유능한 기사였으니 그건 그를 공식적으로 모욕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실 우리끼리니까 웃고 넘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가.”

잘 모르겠다. 내 아버지는 내가 성검사가 된 걸 무척 자랑스러워하셔서 성검사가 되자마자 차근차근 나에게 기사단을 넘겨주실 준비를 하셨고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기사단의 단주가 되었었다. 내가 하스트레드의 단주가 되었을 때 삼촌들의 반발은 정말 커서 삼촌 중 한 명은 나에게 검을 뽑으라고까지 했었다. 무려, 길거리에서 조카에게 결투 신청을 한 것이다. 뺨에 맞은 장갑의 감촉이 불쾌했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아버지는 늘 나를 어른 취급하셨기 때문에 나는 저런 기분이 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리그 노센의 동생에 대한 애정만은 진실이라서 그점에 조금 점수를 줘도 될 것 같은데, 아닌가? 내가 씁쓸하게 생각할 무렵 오르센이 취조실 안에 굴러 들어왔다. 그렇게 묘사하는 게 정확할 것 같다. 그는 정말로 데굴데굴 굴러 들어왔으니까.

“오랜만이야, 오르센.”

바닥에 나뒹군 오르센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내 인사에 고개를 들더니 히이이이이익, 하고 비명과 함께 숨을 삼켰다. 나는 그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우리, 할 이야기가 좀 있더라고. 그렇지?”

“그, 그게, 그게….”

오르센이 벌벌 떨면서 말을 더듬는데 리온이 그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오르센의 어깨에 턱 손을 올렸다. 멀리서 보면 친한 친구처럼 보일 것 같았다.

“말해 두는데요, 선생님. 제 기분이 별로 안 좋아서요.”

“노, 노센 부단장님.”

“혀가 쓸모없다고 생각하면 자르고 시작할 수도 있어요? 손가락만 있어도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거든요. …무슨 뜻인지 알아먹으시죠?”

리온의 말에 오르센이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센은 도박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혀가 잘린다는 협박을 잠시 잊은 것처럼 침묵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모습이 자신의 도박 이력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수치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내가 보기엔 오르센의 몸에서 소변 냄새가 난다는 게 더 수치스러워야 할 거 같았는데. 그는 리온의 협박에 겁을 먹은 나머지 흘려서는 안 되는 걸 좀 흘린 것 같았으니까.

뭐, 사람마다 기준은 다 다른 법이다. 나는 경비대의 병사가 가져다준 차를 홀짝거리며 리온광 오르센의 대화를 경청했다.

“도박을 왜 하시게 되었는지, 얼마나 했는지, 한 건지 안 한 건지, 도박사들 기준으로 그게 도박에 속하는지 놀이에 속하는지, 그딴 건 하나도 안 궁금하고 중요하지도 않다니까요. 제가 궁금한 건, 고귀한 혈액을 감히 액막이 부적 취급하며 주문한 연놈의 리스트예요.”

리온이 단검을 왼손으로 돌렸다 오른손으로 돌렸다 하며 휘황찬란한 손 기술을 선보였다. 오르센의 새하얀 머리는 더 하얘지는 것만 같고 그의 눈은 쉼 없이 리온의 단검의 움직임을 따라 같이 움직였다. 궁지에 몰린 생쥐도 저것보다는 여유가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동정심이 일진 않았다. 이든이 토했던 걸 생각하면 머리를 부숴 버려도 시원찮았다.

[  “나는 의사가 아니니까 말이야, 대공 전하의 상태에 대해 약초사로서의 견해밖에 말할 수 없어. 그걸 감안하고 들어, 실리. 제대로 된 진단은 의사의 몫이지 나의 몫이 아니니까 말이야.”  ]

이든을 진찰했던 잉그리드가 한숨을 쉬며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  “그래.”

“심화가 너무 깊어.”

“…….”

“고문독도 문제고 성장 과정에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그런 것들도 다 문제지만 그보다는 본인의 심화가 너무 깊어. 이 시대에 한(恨) 따위 다들 한두 개쯤 가지고 있는 거라지만, 강대한 마력에 한이 실려서 마력은 더 강해졌지만 몸에도 무리가 왔지. 대공 전하의 본래 마력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거야. 다른 이들이 뭐라고 말했을진 모르겠는데 솔직히 지금의 이 마력은….”  ]

잉그리드는 유감이라고, 눈으로 내게 위로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강해. 근데 알지? 마력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져. 그런데 고작 열세 살인 어린아이의 마력이 이렇게 강하다는 건 비정상적이야. 아무리 타고났다고 해도 열세 살이면 아직 마력이 응축되어 있어야 돼. 근데 이분의 마력은 이미 확장성을 띠고 있어. 그렇다는 건 이분의 심화가 대단하다는 거지. 자신을 보호하고 싶다는 열망이 마력을 일깨운 거야.”

“마력이 그 정도로 강해?”

“강해. 그래도 다행인 건 생 에너지까지 사용하진 않았어. 이렇게 한이 깊은 사람들 중에는 생 에너지까지 마력으로 바꾸다 요절하는 사람이 많거든.”  ]

잉그리드는 약초를 태워 이상한 향으로 대공 전하의 방을 가득 채우며 말했다.

[  “죽기 전에 심화를 풀어 주는 게 좋겠지만 이런 한은 남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저 운명 같은 계기가 있거나 혹은 자신이 여러 깨달음을 얻고 성장해서 그 한을 극복하거나, 그런 거지.”  ]

그렇게 말하던 잉그리드의 뒷모습은 거대하게 느껴졌다. 운명, 그 자체처럼.

운명을 느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내가 성검사가 된 건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건 내가 아무리 원하고 노력한다 해서 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는 신력을 가진 가문에서 마력을 가진 개인으로 태어나 두 가지 힘을 모두 얻었고 검을 좋아하기까지 했다. 정말 너무나 좋아했었다. 검에 미쳐 있었던 시기가 존재했었고, 심지어 그 시기가 꽤 길기까지 했었다. 운명이 나를 인도하듯이 나는 성검사가 되었다. 열다섯에 성검사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역대 가장 어린 성검사라고 나를 칭송했다.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다며 나를 칭찬했다. 하지만 그게 나의 재능이었을까? 내 재능은 나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을까? 모든 건 마치 그렇게 되도록 정해진 것처럼 흘러갔었다. 나는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했다. 그리고 여기에 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도 운명이고 내가 성검사가 되는 것도 운명이었다고 치자면, 나의 인생에 굵직했던 사건들이 모두 운명이라고 한다면, 나는 운명이라는 걸 거스를 수 없을 것 같다. 그건 너무 절대적이고 강력하기 때문에.

그만한 계기가 있어야만 이든의 심화가 풀린다니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 어린 대공 전하께서는 이미 많은 고통을 겪으셨는데 여전히 그의 고통은 심장 속에서 지옥불처럼 끓어오르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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