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ㅡ>깜
그날 오후, 전날 수도에 도착한 리온을 호출해 수도경비대로 향했다. 리온은 “하루는 쉬고 싶었어요.”라고 중얼거리면서도 평소보다 훨씬 편안한 차림으로 내게 들렀고 나와 함께 성의 남문으로 향했다. 거기가 바로 수도경비대 본청이 있는 곳이었다.
“수도경비대에 오실 때마다 꼭 저를 동행해서 오셔야겠습니까?”
리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연하지. 나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도경비대장, 그리그는 리온의 첫째 형이었다. 물론 나는 공작이고 하스트레드 기사단의 단주이니 그냥도 여러 볼일을 볼 수 있지만 리온이 동행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그 일이 진행되는 속도나 분위기는 정말 천지 차이로 달랐다.
“리온! 왔다고!”
다소 육중한 몸매의 그리그가 성벽 위에서 마구 달려 내려오며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정말 형제 사이에도 이 단어를 써도 된다면 짝사랑이 애달플 지경이다.
“아, 형. 오랜만이야.”
리온은 퉁명스러웠다. 2년 만에 보는 형일 텐데…. 그렇게 생각하다 나는 아니지, 하고 생각을 바꿨다. 그것보다 더 오랜만에 보는 형일 수도 있다. 리온 성격에 옌선에 올 때마다 식구들을 보러 갔다는 보장이 없었다.
“형은 여전히 건강하네. 잘생겼고. 형수님도 언제나처럼 상냥하고 아름다우시지?”
돈도 걸려 있지 않고 의욕도 없을 때 나오는 책 읽는 투의 아부가 흘러나왔다. 저렇게 숨 쉬듯이 아부하는 것도 정말 재주야. 내가 속으로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때 그의 형은 감격한 듯 아직 말에 타고 있는 리온을 벌떡 안아 내리며 “내 동생! 여전히 다정하구나!” 하고 부둥켜안았다. 그 포옹에는 절박한 애정이 느껴졌지만 정작 리온은
“아아, 그래, 그래.”라며 성의 없이 제 형의 등을 두어 번 도닥거리더니 형을 밀어냈다. 그냥 밀어낸 정도가 아니라 정말 힘을 써서 확 밀치는 바람에 그리그 같은 거구가 아니면 땅에 나뒹굴었을 것이다.
“미안해, 형. 숨이 막혀서 말이야.”
와, 늘 봐도 정말 거짓말이 하나하나 성의가 없어.
“아니야, 내가 미안하지. 너는 왜 이렇게 반쪽이 되었니? 식사는 했니? 하스트레드에서 식사가 맛이 없어? 누가 너 괴롭히니?”
누가 리온을 괴롭히겠는가. 리온에게 괴롭힘당하는 사람은 많지만.
도대체 이 형제 상봉은 언제 끝나나 하는 기분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리온이 나를 가리켰다.
“형, 늘 그렇듯 형이 또 못 본 체하고 있는 우리 주군이셔.”
하하하하하, 그리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나를 보면서 호탕하게 웃음 짓더니 내게 예법대로 절해 보였다.
“공작 각하,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입니다, 노센 경비대장.”
그리그 지 노센. 노센 백작가의 장남이자 후계자이며 수도경비대의 경비대장을 맡고 있는 남자였다. 수도의 치안에 있어 실권을 장악한 그는 ‘교활한 곰’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다. 노센 백작가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강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그는 선왕 때도 지금의 왕 때도 요직을 겸하고 있을 정도로 처신에 밝은 사람이기도 했다.
“우리 애가 살이 좀 빠진 것 같습니다, 각하.”
막냇동생 리온에 대한 절절한 사랑만 아니면 정말 셈이 밝고 영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리온이 걸리면 그는 팔푼이가 되었다. 사실 이건 노센 백작 가문 사람들 전체의 특징이었다. 리온이 지금은 조금 잘생긴 정도지만 어릴 때는 요정보다 더 깜찍하고 천사보다 더 아름다웠고 애교까지 있는 데다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온 집안이 리온 때문에 살고 리온 때문에 죽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노센 백작가는 막내아들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집안이 되어 버렸다.
정작 그 막내아들은 백작가의 과보호가 지겹고 귀찮고 그저 돈이 최고인 삶을 살고 있기에 하스트레드 기사단에서 노센 백작가는 정말 딱한 집안으로 통했다.
“리온이 살이 빠졌나요?”
빠진 거 같기도 하고 찐 거 같기도 하고… 한마디로 큰 변화는 모르겠다는 뜻이다. 내가 되묻자 그리그가 버럭 화를 냈다.
“이 반쪽이 된 얼굴이 안 보이십니까, 각하!”
“형, 나 커리어에 지장 있어.”
리온이 귀찮은 얼굴로 손을 손수건 흔들 듯 팔랑거리며 대충 제 형을 말렸다. “하지만 하지만!” 그리그가 리온에게 더 말하려 했지만 리온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제 형을 입 다물게 했다.
“형, 오르센이라고, 의사 나부랭이가 있는데.”
“의사?”
“응. 대공 전하 피 뽑아서 팔아 버린 간 큰 새끼 있잖아.”
그리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아아.”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나는 사실 그리그가 동생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그 순간부터 용건을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이 생각은 리온도 하고 있을 것이다.
교활한 곰.
그 별명은 괜히 붙은 게 아니니까.
“걔랑 이야기 좀 하려고.”
“우리 리온이 이야기하고 싶으면 당연히 해야지. 근데 면회장에 사유를 뭐라고 써 줄까?”
그리그가 물었다.
“취조. 피 팔아먹은 거에 대해서 좀 물어보려고.”
“그건 범죄니까 경비대에서 할 거라 면회장엔 못 쓸 거 같은데. 다른 거 뭐 쓸 만한 거 없을까?”
뒷말은 리온에게 한 게 맞지만 앞말은 나를 보면서 한 소리였다. 범죄는 경비대에서 처리한다. 엄밀히 말해 용병인 기사단은 뒤로 물러나라는 경고였다. 뭐, 나도 딱히 피를 누구에게 팔았는지가 궁금한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대공 전하에게 다가오는 위협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거지. 물론 이렇게 말하면 그리그 노센은 경비대를 믿으라고 말하겠지만 경비대를, 그리고 그리그 노센을 어떻게 믿겠는가. 경비대에는 사람이 너무 많다. 모든 계파의 인간이 다 있을 테고, 그리그 노센과 노센 백작가는 유명한 중립파로 입장을 정하지 않은 인물들이다. 어느 날은 내 아군이 될 수도 있지만 다음 날 내 적이 될 수도 있다.
“형.”
리온도 그리그가 왜 이러는지는 알기 때문에 인상을 팍 구겼다.
“어, 어?”
“내가 그딴 사소한 거까지 신경 써야 돼? 그건 형이 좀 알아서 해도 되잖아.”
리온도 제 형을 후리는 걸 하루 이틀 한 게 아니기 때문에 다짜고짜 신경질을 부렸다. 결국 그리그가 졌다.
“…그, 그럼. 물론이지! 형이 알아서 할게. 알았어. 오르센, 그 의사 말이지? 그 의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거지?”
“어.”
“알았어, 기다리고 있으렴.”
그리그가 경고는 여기까지네, 라는 얼굴로 물러나는 순간 리온이 표독스럽게 한마디 했다.
“형, 나 가서 자야 돼. 빨리 데려와.”
“알았어. 우리 막내가 원하는 대로 형이 바람처럼 데려올게.”
그리그는 나에게는 차가웠지만 동생에게는 진정 호구였다. 이 맛에 리온을 안 데려올 수가 없다니까. 나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성벽 안쪽의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길은 낮에도 어두웠다. 성벽에는 금이 간 것도 보였다. 낮인데도 횃불을 걸어 놓았는데 그 때문인지 기름 냄새가 지독했다. 그리고 그 기름 냄새도 지우지 못하는 여러 오물 냄새가 허공을 떠돌았다. 지하로 갈수록 기름 냄새보다는 오물 냄새가 더 심해졌다. 배설물이나 혹은 피 냄새 같은 것들. 못 씻은 사람들에게서 나는 냄새들. 찍찍. 어딘가에서 쥐가 울더니 후다닥 달려갔다.
나는 이런 곳에 면역이 없는 편이었다. 이런 일은 대부분 부하들이 처리해 왔다. 그리고 내 기사단은 출정을 나가는 입장이다 보니 포로는 식량을 거덜 내는 존재일 뿐이라 선호하지 않는 편이었다. 우리는 주로 마물을 죽이고 사람을 죽일 뿐이지, 죄인을 관리하는 일은 드물었다. 사실 전리품도 우리와 같이 움직이는 왕의 병력이 따로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평소에는 다 같은 기사인 듯 행동해도 중요한 부분에서는 용병 취급 받았고 우리도 그게 편했다. 우리는 용병이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었다. 물론 안 떠나는 게 우리도 좋긴 했지만 그래도 떠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엄청난 차이니까.
“리온, 그런데 집에는 언제 올 거니?”
리온에게 딱 달라붙길 원했지만 리온이 질색하는 관계상 조금 떨어져 걸으며 그리그가 물었다. 그는 리온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리온도 그가 모든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갈 때 되면 가겠지.”
“어머니께서 너를 그리워하며 밤마다 눈물짓고 계시단다, 아가.”
아가.
나는 그 단어에 헛웃음을 지을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노센 가문에서 리온의 존재는 성역과 같아서 잘못 발을 디디면 성전이 일어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리온이 시큰둥하게 응수했다. 그리그가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막냇동생의 말을 기다렸다. 리온이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거대한 석문 안으로 들어서며 어깨를 으쓱였다.
“서신에 잘 지내신다고 쓰셨던데. 허리가 아프시다고 해서 약초도 좀 보내 드렸더니 잘 들으시는 거 같고.”
“그 약초가 너한테서 온 거야?!”
“어. 아니 뭐 정확히는 주군께서.”
리온이 나를 가리키는 바람에 공기인 것처럼 조용히 쫓아가던 나는 흠칫 놀랐다. 나, 나? 내가 눈으로 물었지만 리온은 못 본 체하며 다시 등을 돌려 앞을 바라보고 걸었다.
“우리 주군께서 잡으신 플래티넘 바실리스크의 핵이야.”
“그렇게… 그렇게 귀한 걸.”
“아니 뭐, 우리 사이에서는 좀 남아돌아. 주군께서 워낙 보이는 마물이며 늑대 같은 해물(신의 창조물 중 인간에게 해가 되는 창조물)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셔 가지고.”
“…와. 그 정도야?”
“어, 좀.”
그리그는 오늘 나를 본 이래 처음으로 내게 긍정적인 시선을 보냈지만 그리그의 약간 앞에 서서 걷는 리온의 옆얼굴은 귀찮고 지겹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길을 가다가 해물들이 있으면 대체로 잡는 편이었는데 나의 이런 버릇 때문에 기사단의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기사단 사람들도 같이 잡아 주고는 했는데 요즘은 내가 해물을 잡고 있으면 또 시작이라는 얼굴로 마치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이 갈 길을 가고는 했다. 그리고 나와 해물을 잡는 건 크라이스와 소피아 정도밖에 없었다. 이게 다 리온의 업적이었다. 리온이 이동 속도 떨어진다고 크라이스와 소피 외에는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말라고 엄하게 단속하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나는 좀 피로해졌지만 기사단의 이동은 제 속도를 유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