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ㅡ>깜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소피가 내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전하? 어디가 안 좋으세요?”
“몸이 좀, 안 좋아. 아직.”
“아, 그러시구나. 제가 너무 무례한 방문을 드렸네요.”
소피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혹스러워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당황한 기색을 감추는 것뿐이었다. 소피는 나의 건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예의 바르게, 소피답지 않게 이야기한 뒤 자리를 떠났고 나는 홀로 남아 마른세수를 했다. 아무리 마른세수를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방금 본 사람은 소피 같지 않았다.
나는, 보지도 않은 소피의 아들, 폴인지 델인지 하는 그 아이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 여섯 번째 앞장. 악의라는 독 ♡
“안녕, 자기.”
내 앞에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아름다운 얼굴이 미소 짓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깜빡거리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상대를 슬쩍 밀어냈다. 상대도 버틸 생각은 없었는지 순순히 밀려났다.
“잉그리드, 아침부터 웬일이야.”
초겨울 아침이라 그런가, 목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목을 누르면서 말하는데 마법사들 특유의 화려한 복장을 한 잉그리드가 활짝 웃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꼬마 약혼자와 밥을 먹더니 다시 자는 거야?”
“난 새벽에 들어왔다고.”
잉그리드는 왕립 학교 시절부터 친한 친구의 방에 들어오는 데 서슴없는 타입이었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불평을 토하자 그녀가 높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래도 꼬박꼬박 일어나서 식사를 같이 하다니 지극정성이에요, 각하. 지고지순한 부인이 되겠어.”
“잉가,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냥 좀….”
“가엾잖아? 불쌍하잖아? 내가 없으면 혼자인 아이인데? 뭐 그런 말을 할 거야?”
잉그리드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턱을 괸 채 얄밉게 물었다. 대공 전하를 상대로 그런 무엄한 소리를 할 수야 있겠는가. 팔짱을 낀 채 얄미운 잉그리드를 바라보다 “안 나갈 거야?”라고 물었다. 잠옷 차림이니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잉그리드는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냥 갈아입어도 되잖아? 학교에서 많이 봤는데.”
아, 마음대로 해.
잉그리드는 좋은 사람이지만 그녀와 말로 실랑이를 벌이는 건 늘 피곤한 일이었다. 그냥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게 제일 편하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은 나는 잉그리드의 앞에서 옷을 벗었다. 내가 옷을 벗는 제스처를 취해 보이자 멀찌감치 서서 우리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시녀들이 재빨리 다가와 내 옷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잉그리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공작 각하시네! 옷도 혼자 못 입어?”
자꾸 나를 타박하는 잉그리드 때문에 시녀들은 기분이 좀 상했는지 잉그리드를 흘끔거렸다. 존경받는 마법사이기는 하지만 잉그리드는 엄연히 평민이었다. 내 시녀들은 나름대로 출신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작위를 받을 수는 없어도 귀족의 방계로 태어난 사람들이었으니 당연히 완전히 평민인 잉그리드의 말이 고까울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어도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대마법사에 제일가는 약초사, 게다가 나의 친구이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상한 건 어쩔 수 없다는 분위기. 잉그리드의 눈에 확 날이 섰다.
“왜? 시녀 주제에 다들 내가 짜증 난다는 분위기네?”
잉그리드가 한 손을 펼쳤다. 그 하얀 손바닥에는 새빨간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히이이익. 시녀들이 비명을 삼키며 내 앞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고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들에게 당장이라도 불벼락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아이고. 나는 한숨을 쉬며 잉그리드를 바라보았다. 학창 시절 때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어쩔 수 없는 성격 때문에 잉그리드는 학창 시절 정학도 몇 번 받은 적이 있었다. 사실 그녀가 졸업한 건 참 기적 같은 일이었다.
사실 그 기적은 자연스럽게 발생했다기보다는 나를 비롯한 학우들의 노력으로 일어난 것이지만 우리 모두 잉그리드의 졸업을 위해 애쓴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는 의리를 확실히 지키는 사람이었고 우리는 그만큼 그녀에게 친구로서의 보살핌을 받았기 때문이다.
“잉가, 우리 집 태워 먹으면 전부 청구할 거야.”
“…….”
“너처럼 돈 많이 쓰는 마법사가 감당할 수준이 아닐 거라는 것만 말해 두겠어.”
잉그리드는 마법사에 약초사이다 보니 어마어마한 재룟값이 들었다. 마법 연구에는 돈이 든다. 대부분의 마법사는 마법 연구를 위해 스폰서를 모집하지만 잉그리드는 저 성격 때문에 스폰서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마법 연구에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녀는 화려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늘 돈에 쪼들렸다.
칫.
잉그리드가 아픈 데를 찔렸는지 입을 비죽거리면서도 손바닥 위의 불꽃을 없앴다. 나는 내 다리에 얼굴을 묻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시녀의 어깨를 도닥거려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내 친구가 좀….”
“얄밉다? 재수 없다?”
잉그리드가 내 말을 이었다. 기분이 많이 상했는지 조그만 이목구비가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잉그리드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말을 이었다.
“짓궂어. 놀랐나 본데 옷은 내가 알아서 입을 테니 가서 좀 쉬도록 해, 두 사람 다.”
내 말에 시녀들이 우물쭈물하면서도 내 방을 나섰다. 내가 입어야 할 옷들을 내 옆에 있는 긴 의자에 가지런히 걸쳐 두면서도 빨리 나가고 싶은 기색들이 역력했다. 어지간히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문이 탁 닫히자 잉그리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늘 생각하는데 실리, 너는 귀족이 안 되는 게 나았을 거야. 정말 안 어울려.”
“또 그 소리야?”
“왜 너희 부모님은 나를 낳지 않으셨을까? 나라면 이 엄청난 재산을 아주 한 푼까지 쓰임새 있게 좋은 데 잘 쓰고….”
그녀가 말하는 좋은 데란 말 그대로 그녀가 생각했을 때 좋은 곳이라는 의미다.
“저런 버릇 없는 시녀들은 당장 매질을 했을 텐데!”
잉그리드가 화를 냈다. 매질을 해서 당장 버릇을 고쳐 놓았을 거라는 잉그리드의 말을 들으며 옷을 입고 있자니 그녀가 흘끗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막 옷을 다 입었을 때 그녀는 빗을 들고 있었다.
“이리 와.”
미안하기는 한지 머리를 빗겨 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내 머리를 손질하는 재주가 없는 편이니까. 사실 몇몇 여기사들처럼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싶은 생각도 있는데 워낙 시녀들의 반대가 심해 그럴 수가 없었다. 드레스 차림이 우아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잉그리드는 내 머리카락을 잘 빗겨서 예쁘게 땋아 주었다. 군데군데 가늘게 모근서부터 땋아 내린 뒤 마지막에 모든 머리카락을 하나로 다시 복잡하게 땋는, 소위 말하는 여자 엘프 사냥꾼 머리 모양이었다.
“이 머리가 어울릴 줄 알았어.”
잉그리그가 뿌듯하게 웃어서 나도 그냥 웃었다. 거울로 보는 나는 평소에 보던 평범한 나였지만 잉그리드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냥 머리 땋은 나인 거 같은데. 내가 거울 속의 나를 보며 뭐가 다른 건지 찾으려고 애쓰는 동안 잉그리드가 나지막이 말했다.
“로스텔로지.”
“응?”
“확인했어. 대공 전하께 누군가가 로스텔로지를 드렸어. 장기간 미량 섭취하셨고 독성이 몸에 쌓이셨지.”
거울 속의 잉그리드는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거울을 사이에 두고 시선을 마주했다. 양쪽 다 아까와는 달리 웃음 한 조각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의 두 사람. 한 명은 마법사이고 한 명은 기사인, 성인이 되어 자기 몫의 짐을 양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어떤 약이야?”
“정확히는 약초야. 잘 쓰면 약초가 되지. 하지만 로스텔로지는 취급법이 아주 까다로워. 왜냐하면 사실은 강력한 독초거든. 게다가 그건 단독으로 쓰이면 무조건 독초로서밖에 쓰일 수 없어. 그건 아주 강한 약초를 쓸 때 중화하는 목적으로 쓰는, 특수 약초야. 웬만큼 약초를 다뤄본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를 물건이지.”
“의사는 알겠지?”
“…매우 유능한 의사라면, 어쩌면.”
매우 유능한.
그 말이 귀에 쓰게 걸리는 건 오르센이 아주 유명한 의사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기간이긴 했지만 궁의를 한 적이 있을 정도로 그 명성이 드높았었다.
“섭취한 기간은 어느 정도야?”
“4개월 정도로 추정돼.”
하지만 조금 이상한 건 테인이나 로즈메리는 오르센이 약초를 안 쓰고 사혈을 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는 것이다. 오르센은 약을 전혀 쓰지 않았다며 그들은 그 점에 있어서 오르센을 매우 경계했었다. 둘 다 오르센이 준 물건을 포장째로 뜯지도 않고 보관할 정도로 아주 날카로워져 있었는데, 정작 오르센이 전하께 약을 먹였다고? 어떻게, 무슨 수로? 그는 전하께 얼마든지 약을 먹일 수 있는 위치인데 그냥 드시라고 하면 될 것을 다른 방법을 굳이 강구하여 먹였다는 게 조금 위화감이 느껴졌다.
“의사를 만나 봐야겠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리자 잉그리드가 나를 흘끗 보더니 말했다.
“아, 하나 더. 사혈한 의사는 아마 로스텔로지를 준 의사는 아닐 거야.”
“뭐?”
당연히 오르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잉그리드에게 보충 설명을 요구하는 눈짓을 보내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로스텔로지는 혈액에 남아. 그러니까 로스텔로지로 사람을 죽이려면 사혈을 하면 안 돼. 그 의사가 사혈을 한 건 옳았어. 내가 없었다면 결국 사람을 죽였다는 점에서는 로스텔로지나 사혈이나 똑같았겠지만 이번 경우는 그가 사혈을 했기 때문에 혈액을 잃으면서 로스텔로지의 독성도 같이 잃었고, 그 응급 처치 다음에 내가 투입되어서 전하께서 사실 수 있었던 거야. 운이 좋았던 케이스지.”
소가 뒷발로 개미를 잡아도 이것보다 놀랍진 않겠네.
나는 밝은 햇살이 비추고 있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아침이었지만 어딘가 스산하게 느껴지는 건 내 기분 탓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