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ㅡ>깜
“로드카인 각하를 제가 아는데 인격자십니다. 쌍둥이이신 영애를 낳다가 후작 부인이 난산 끝에 돌아가셨죠. 그리고 이제 각하와 그 쌍둥이 영애를 이리저리 살뜰하게 보살핀 것이 멜라니 피오르게였던 겁니다. 그렇게 10년쯤 지나니까 영애 둘과 후작 각하께서는 멜라니를 집에 들여야겠다, 생각하신 거죠. 멜라니 쪽도 그러길 원했고요. 그래서 재판이 열렸는데, 좀.”
“좀?”
“아무리 피오르게가 돈이 많다고 해도 마음이 떠난 사람을 상대로 이혼 소송을 벌이는 건 데다가 상대는 로드카인 후작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후작과 멜라니는 이혼을 대비한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피오르게는 어느 날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거라서… 결국 처참하게 졌죠. 멜라니는 위자료까지 왕창 받고 이혼한 뒤 다음 해에 로드카인 후작 부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피오르게는 숙녀의 대외 활동은 이를 갈고 반대하는 사람이 되었고요.”
“그러니까 잘해 준다고 해서 다른 남자의 아내를 꼬셔서 자신의 부인이자 자기 아이들의 어머니로 만든 남자 보고 인격자라고 하는 거야? 내가 인격자라는 단어를 잘못 알고 있나 보네.”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도 내가 어처구니없는 화를 내고 있다는 건 알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왜? 꼭 같이 있어야만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 멀리 있어도 사랑할 수 있잖아. 도리어 그게 더 애틋하고 소중한 사랑 아니야?!
내 분노에 리살이 내 분위기만 살폈다. 그는 이윽고 눈을 깜빡이다 머리를 긁적이고 양손을 맞비비다 머리를 긁적이고 발로 바닥을 툭툭 치다가 머리를 긁적이는, 한마디로 계속 머리를 긁적이는 짓을 반복하다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전하.”
이 말을 할까 말까, 되게 고민되긴 하는데요, 라는 투였다.
“왜.”
“그, 각하 말입니다. 하스트레드 공작 각하와 전하께서 그 약혼하신 사이이긴 하지만.”
“…….”
“정략 약혼이고, 결혼하실지 어떠실지는 좀 더 두고 보셔야 하며 결혼하신다 하더라도 정략결혼하시는 사이신 겁니다. 제가 이 말씀은 어떤 의미로 드리는지 아시지요?”
안다.
하지만 나는 며칠 전 밤의 실리를 떠올렸다. 그녀는 토하는 나를 끌어안고 보살펴 주었다. 내 인생에 그렇게 해 준 사람은 없었다. 다시는 없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나의 충성과 사랑을 받을 자격이 되었다.
그녀 자신은 물론 어린애인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겠지만.
그래도.
“평민들처럼 결혼을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귀족 사회에서 결혼은 계약입니다.”
“멜라니 피오르게는 계약을 위반한 거네.”
“그녀는 그때 평민이었잖습니까.”
“평민들의 결혼은 계약이 아닌가 보지.”
“귀족들의 결혼에 비하면 좀 유동적이긴 하죠. 연애결혼도 꽤 많고요. 하지만 귀족 사회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전하.”
“그래도 아내잖아.”
그만 입을 다무는 게 나아.
그렇게 생각했다. 실리에 대한 내 마음을 더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계속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충동이 강하게 일어서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왜? 왜, 내가 실리를 좋아하면 안 돼? 그녀는 내 약혼녀잖아. 내 아내가 될 사람. 나는 그녀의 약혼자이고 우리는 부부가 될 거고, 우리는 영원히 함께….
“전하, 전하께서는 이르시아스 대공 전하시고 각하께오서는 하스트레드 공작 각하시죠. 서로 가진 게 많으십니다. 그렇다는 건 이익이 상충되는 때가 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부부라서 한배를 탄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의외로 저는 부부라서 서로 포를 겨누는 적함이 되는 경우를 더 많이 봤습니다.”
전부 그로스랜어였는데 이해를 못 하겠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 왜 부부가 다른 배를 타고 부부라서 더 적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리살은 내 얼굴을 보고 흠, 하고 웃었다.
“제가 너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길게 드렸습니다, 전하. 사죄드립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우리는 둘 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너는 이해 못 할 거야,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하자. 그런 뜻이었다. 나는 더 말해 보라고 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들어도, 밤을 새워 설명을 듣는다 하여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저택을 사고 싶어, 알아봐 줘.’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리살이 말하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손만 내젓고는 의자에 불량한 자세로 앉아 높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늦은 오후의 햇살은 실리의 머리카락처럼 붉은색이었다.
저택을 사는 건 어렵지 않겠지. 하지만 저택을 사서 자립하게 되면 실리와 더 떨어지게 된다. 그러고 싶진 않았다. 실리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실리는 공사가 다망했으니까. 요즘 그녀는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랴, 왕에게 불려 가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라고 들었다. 그럼에도 나와 아침 식사는 꼭 같이 해 주었다. 아침에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오후가 되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졌다.
어른이면 좋았을 텐데.
그럼 삼촌에게 농락도 안 당하고 왕세자가 될 수 있었겠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왕이려나. 내가 왕이면 나는 실리에게 더 멋지고 근사하고 무엇보다 당당한 남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몸도 약하지 않겠지. 이런 비실대는 몸 따위, 가질 필요도 없었을 테고….
저택을 사 봐야 실리에게 당당한 어른 남자처럼 보이는 건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매일 같이 있는 기쁨을 누리는 편이 낫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속이 쓰린 건 내가 어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어른이 되는 5년 뒤엔 괜찮아질 것이다.
아득히 멀지만, 언젠가는 올 그때에는 분명히.
***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대체로 아침 식사는 고요하게 시작되어 평화롭게 끝나고 실리는 한마디도 안 할 때가 많았는데 오늘은 달랐다. 시작부터 실리가 말을 하고 있었다. 신기해서 나는 그녀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았다. 매일 얼굴만 보며 조용히 식사하다가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까 너무 기뻐서 웃음이 났다.
“응.”
“사실은 부탁 …아니, 청탁입니다, 전하.”
단도직입적인 청탁이라는 말에 더 기뻐졌다. 뭔가를 해 달라고 조르는 여인이라니, 실리에게서는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스푼을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이런 실리를 자세히 보며 마음속 깊이 음미하고 싶었다.
“응, 말해.”
“시종을 하나, 더 들여 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청탁이야?”
로즈메리도 테인도 실리가 고른 시녀고 시종이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실리가 골랐는데 왜 이제 와 시종을 들이는 일이 청탁이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뜻이야? 내 얼굴을 본 실리가 곤란한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폴 지 히옌, 소피아의 아들입니다.”
“으응?”
“장남이죠. 전하와 동갑인, 아주 착하고 매력적인 아이입니다.”
왜 아직 본격적인 이야기가 안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까? 소피아의 아들에 나와 동갑인 폴 히옌이 나의 시종이 되는 게 왜 청탁이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실리의 말이 더 나오길 기다리고만 있자니 그녀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이가 배움이 그렇게 깊진 못합니다.”
“……?”
“솔직히 그로스랜 표준어를 정확히 구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을 못 하거나 이런 건 아닌데, 공부에 그다지 취미가 있는 아이는 아니라서요. 그런데 이 아이가 전하의 시종으로 좀 지냈으면 합니다.”
그로스랜 표준어를 정확히 구사하는지 어떤지도 모르지만 내 시종으로 뽑아 달라고? 그제야 이게 왜 청탁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새삼 실리의 공정함에 웃음이 났다. 그녀는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꾸린 장본인인데도 나에게 필요하지 않다 싶은 사람을 한 명이라도 끼워 넣을 때에는 청탁이라는 단어까지 써 가며 내게 부탁하는 거였다. 그렇다는 건 내게 붙여 준 모든 사람은 자격이 있는 사람들뿐이었다는 것이리라.
“어렵진 않은데, 왜?”
이런 일을 하는 걸 꽤 싫어할 것 같은 실리가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걸까. 그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소피아겠지. 윗사람의 시종이라는 건 상당한 특권이다. 남작인 소피의 후계자가 대공인 나의 시종으로서 어릴 때부터 함께했다는 배경이 생기면 무척 그럴싸해진다는 건 나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실리가 이렇게까지 해 줘야 할 문제인가?
내 의아한 얼굴을 본 실리가 부드럽게 웃었다.
“제가 소피에게 뭘 좀 해 주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나도 소피에게 뭘 해 주는 건 좋아. 소피는 나의 첫 검 선생이니까.”
나는 지금도 검을 배우고 있지만 사실 나와 제일 잘 맞았던 사람은 소피였다. 소피의 그 묘한 격의 없는 태도가 나를 편안하게 해 주고는 했었다. 그런 소피의 아들이라니,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실리가 활짝 웃는 걸 보니까 더욱 기뻐졌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소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오랜만에 보는 소피는 매우 드물게도 드레스 차림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소피아는 고혹적이고 아름다웠다. 아이가 셋이나 있는 어머니보다는 남쪽 나라의 무희가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격식 있는 드레스인데도 소피아 특유의 정열적인 느낌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양 볼에 홍조를 띠고 나타났다. 그러고는 나에게 너무나 감격한 얼굴로 “어떻게… 어떻게 말씀을 올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전하.”라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실리가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다면 소피는 실리에게 감사를 표하는 게 맞았다. 애초에 나는 실리가 아니었다면 소피 아들의 존재에 대해 생각도 안 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왜 소피는 내게 이토록 감격한 걸까.
뭔가가, 잘못되었는데.
“폴을 시종으로 삼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과분한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소피는 무척 기뻐 보였지만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아는 소피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늘 나를 격의 없이 대했고 나는 그런 소피가 좋았었다. 그런데 지금의 소피는 나를 대공으로만 대했다. 검을 가르쳤던 제자인 나, 실리의 약혼자인 나, 소피가 봐 온 나… 그런 나는 어디에도 없고 그저 그녀의 아들을 시종으로 삼은 대공만 존재하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