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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27화 (26/94)

<☆27ㅡ>깜

원래 하려던 말은 뭐였을까?

조금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보다는 실리가 이곳에 있는 게 기뻤다. 이건 꿈이 아니라 진짜 같았다. 내 손목은 얼얼하고 약초 냄새는 지독하니까. 나는 내가 왜 누워 있었는지 한참을 생각한 끝에 쓰러졌던 것을 기억해 내고 웃었다.

“또 당신이 나를 살린 거야?”

내 말에 실리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니라 잉그리드였습니다. 그녀는 순례 여행 중이라 제 아버님 부고를 몇 달 전에야 들었다고 합니다. 마침 옌선에 와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만날 수 있었고, 그녀가 전하를 살려 드린 겁니다.”

나는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살려 드린 겁니다.’ 실리는 분명 그렇게 이야기했다. 또 당신이 나를 살린 거야? 나는 반쯤 농담으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었지만 실리는 농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내가 죽어 가고 있었어?”

의외였다. 나는 가끔 쓰러졌고 오르센은 내가 어릴 때 고초를 많이 겪어서 몸이 약해진 탓이라고 했다. 그런 줄만 알았는데.

“오르센은?”

잉그리드라는 마법사인지 약초사인지가 나를 돌본 거면 오르센은? 오르센은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그는 이스트럼의 주치의이면서 동시에 나의 주치의이기도 했다. 나에게 매달 거액을 타 가는 의사는 뭐 하고 있었기에 실리의 조문객이 나를 살린 거지?

그 조문객이 없었다면 난 어떻게 되는 거였다는 건데?

어이가 없어서 오르센에게 화를 낼 생각으로 이 상황을 따져 물으려 했는데 실리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조금 난처한 기색이었다.

“오르센은…. 일단은 수도경비대에게 연행되었습니다. 내일쯤 감옥에 가 볼 생각입니다.”

“수도경비대에? 왜?”

오르센은 좀 자만심 넘치는 의사이긴 하지만 그는 그래도 멀쩡한 사람이었다. 수도경비대에 끌려갈 만한 불한당이 아닌데 무슨 일일까?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묻자 실리가 곤란한 얼굴로 한쪽 뺨을 문질렀다. 왜 곤란해하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투성이라고 여기면서 나는 몸을 일으킨 채 조금씩 엉덩이를 움직여 실리에게 가까이 갔다.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고 싶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불편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특유의 힘 빠진 웃음을 지으면서 내 어깨를 가만히 털어 주었다. 먼지도 없는 어깨를 털어 준다는 건 뭔가 말하기 전에 생각을 하겠다는 것 같은데….

“오르센은 도박에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도박이라는 말에 속으로 찔끔했다. 나 또한 도박에 큰 재산을 걸었다. 실리는 아마 알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 그래?”

“예.”

“그런데?”

말을 더듬은 건 한 번뿐이었다. 곧 자연스럽게 그런데, 라고 물어볼 수 있었다. 실리는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내 태도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말을 천천히 이었다.

“도박으로 많은 걸 잃었어요. 그는 예전부터 살던 집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세를 살고 있었어요. 도박으로 집을 잃었던 겁니다. 부인과 아이들은 그를 떠났고 사실 그는 약초 하나도 살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받은 돈은 전부 빚을 갚는 데 쓰거나… 혹은 다시 도박을 했죠. 그래서 그는.”

내가 아플 때마다 나에게 사혈을 하던 게 생각이 났다. 그리고 약초를 사 오라며 내 시종 테인을 닦달하던 기억도. 로즈메리가 대부분의 의사는 약초는 가지고 다니는데 오르센 선생님은 게으르고 뻔뻔하다고 욕했던 것도 생각났다. 그게 돈이 없어서였던 건가? 그래서 사혈을 그렇게 많이 했던 건가, 생각했을 때였다.

“그는 대공 전하의 피를 팔았습니다.”

팔… 아?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내 피를?

“역대 이든이라는 이름을 지니신 고귀한 분들 중에서도 마력을 가지신 분은 드물었습니다. 특히 전하께서는 강력한 마력을 지니고 계시죠. 게다가 살아 돌아오셨고요. 그런 부분들이 소위 말하는….”

“…말하는?”

“액막이 부적으로서 인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 순간,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내가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수도에 돌아왔고 대공이 되었고 모두가 나를 만나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초대장은 쏟아지고 선생들은 내가 자신들이 가르친 학생 중 최고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타인에게 좌지우지되는 삶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었다.

우웨에엑.

구역질과 함께 순식간에 이불을 더럽혀 버렸다. 계속 토했다. 참아지지가 않았다. 심장이, 배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내 입으로 튕겨져 나올 것 같았다. 역했다. 모든 게 소름 끼쳤다. 손끝이 떨리고 등골이 오싹했다. 생리적인 눈물이 났다. 토하다 보면 눈물이 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실리는 당황한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토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기척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마치 연약한 살을 칼날 아래 들이댄 것처럼 긴장한 상태였다. 그녀가 나를 상처 줄 것 같았다. 왼쪽으로 가도 오른쪽으로 가도, 그녀가 나를 지켜보고 있어도 내게 누군가를 불러 줘도 나에겐 모두 상처가 될 것만 같았다. 나도 나를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그저 토하고만 있을 때.

그녀가 나를 끌어안았다.

“괜찮습니다.”

나는 그녀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녀는 밀리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힘주어 안은 채 내가 토하는 걸 하라란 셔츠에 그대로 받았다. 그녀의 피부도 더러워졌지만 그녀는 전혀 꺼림직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끌어안고 내 머리를 도닥거리며 “괜찮습니다.”라고 중얼거렸다.

내가 속을 완전히 비운 다음에 그녀는 나를 달랑 들어서 낮잠을 잘 때 주로 쓰는 긴 의자에 눕히고 내 시트를 손수 갈아 주었다. 공작의 무남독녀가 이런 일을 어디서 해 보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 멍하니 물었다.

“마치 해 본 사람처럼 잘하네?”

“왕립 학교 들어가면 다 자기가 해야 합니다. 규칙이죠.”

“진짜로 모두가 스스로 해?”

“사관학부는 그렇습니다.”

애매한 대답이었다. 사관학부가 아닌 쪽은 다르다는 이야기구나. 나는 왕립 학교에 들어가면 어느 학부로 들어가게 될까? 사관학부는 분명 아닐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내 피를 부적으로 산, 내 목숨을 액막이로나 취급하는 인간이 존재하겠지. 그들과 나는 같이 지내야 할 것이다.

“이리 오세요.”

실리는 내 옷을 벗기고 수건을 물에 적셔 와 나를 닦아 주었다. 그녀의 앞에서 약한 어린애가 된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앓고 난 직후인 데다 토하기까지 해서 힘이 없었다. 그저 몸을 맡기고만 있자 실리가 나를 닦은 뒤 옷을 갈아입히고 새 시트가 보송보송한 침대에 눕혀 주었다.

“이제 주무십시오. 잉그리드는 주무셔야 낫는다고 했습니다.”

“완전히, 돌아온 거야?”

“일단은 그렇습니다.”

“…리.”

그녀를 불렀다. 그냥 부르고 싶었다. 당신은 왜 내게 늘 좋은 사람일까. 그녀는 젖은 셔츠차림이었다. 그렇다는 건 내가 토한 걸 대충 입은 채로 빨아서 걸친 채 나를 돌봐 주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마 수건을 적시러 갔을 때 셔츠도 빤 것 같다.

왜 이렇게 좋은 사람일까, 당신은.

“예, 전하.”

“그냥….”

그냥 불렀어, 라는 말은 내 입 안에서 삼켜졌다. 내 정신도 까마득한 곳으로 떨어졌다. 실리가 조금 웃는 것 같기도 했지만 확실치 않다.

***

내가 말짱해졌을 무렵에는 옌선이 시끌시끌해져 있었다.

“경하드립니다.”

에메랄드 목걸이를 받아 이미 부인에게 건네기까지 다 한 뒤라 모든 것이 시들해진 리살이 내 도박의 성과를 보고도 심드렁하게 축하 인사를 했다. 나는 도박에서 어마어마한 재산을 일구게 되었는데 리살은 내가 나라를 돈으로 사도 자신의 재산이 아닌 이상 알 바 아니라는 식이었다.

“금광을 건 사람이 있었어?”

도박으로 딴 결과물들을 보다가 금광에 놀라 묻자 “미친놈이죠.”라고 리살이 대꾸했다. 상대의 작위를 흘끗 보니 작위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렇다는 건 리살은 이 목록을 이미 확인했다는 뜻이었다.

“아는 사람이야?”

“상인으로서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에요. 도박꾼으로서는 미친놈이고.”

“…그래?”

“여자가 나대는 걸 아주 싫어하기로 유명하고요. 아마 그래서 감정적으로 공작 각하께서 북부 마물들의 왕을 죽이지 못할 거라고 건 게 분명합니다.”

감정이야 어떻든 도박은 차가운 머리로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라고 말한 리살이 문득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나를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하께오서도 머리가 차갑지 못하셔서 도박은 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 이성적인 성격 아니야?”

“이성적이시기는요. 약혼녀가 공격당한다고 그 큰 재산을 도박에 걸어 버리셨잖습니까.”

“하지만 나는 실리가 해낼 걸 알고 있었어. 너도 알고 있었잖아?”

“아무리 알아도 큰돈을 거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전하.”

“나한테는 다르지 않아.”

‘여자가 나대는 게 싫다는 이유로 금광을 도박에 걸다니 이상한 사람이네.’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금광 서류를 보는 걸 보던 리살이 혀를 찼다.

“부인이 바람피우기 전까지만 해도 도박의 ‘도’ 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요.”

“부인이 바람을 피웠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바람을 피운 정도가 아니라 이혼하고 재혼을 했어요. 근데 그 재판이 또 세기의 재판이었는지라.”

“무슨 말이야?”

이혼 재판이 어떻게 세기의 재판이 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귀족들의 이혼이라면 또 그럴 수 있는데 이 경우는 다르지 않은가. 뭐, 이혼 자체가 쉽게 성립되는 것도 아니고.

“아직 어리신 전하께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요…. 금광의 전 소유주였던 피오르게는 물건을 구입하고 또 판매하느라 옌선을 떠나는 일이 잦았어요. 그리고 피오르게의 부인 멜라니는 옌선의 단골들, 그러니까 주로 귀족들의 상담을 도맡았는데….”

“도맡았는데?”

“로드카인 후작 각하와 그 뭐랄까… 친해진 거죠.”

친해졌다는 표현이 뭔지 모를 정도로 내가 어린애는 아니다. 내 얼굴이 차갑게 식자 리살이 아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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