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ㅡ>깜
“많이 이상했었니?”
“네. 저랑 테인에게 선물을 하시면서 곧 나으실 테고 별거 아니니까 각하께 알리지 말라고 한다든가….”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런 일에 일일이 화를 낼 수는 없다. 나는 위에 있는 사람이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나 모르게 많은 것들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그들이 내게 언제나 솔직하길 바란다면 그건 무리한 요구다. 내 아버지는 나를 그렇게 가르치셨고 그래서 사실 나도 그들에게 그런 기대는 접어 두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건 좀 악의적인 냄새가 난다. 선물을 주면서 달래는 것 자체가 약간 어린애들이라 우습게 본 티도 났고 무엇보다 자신이 꺼림칙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없는 한 이런 일을 할 리가 없다. 오르센이 다니는 저택마다 선물을 뿌린다면 그는 파산할 것이다.
이상하다는 테인의 표현이 딱 맞았다. 이상하다, 정상적이지가 않다.
내가 2년 동안 나가 있는 사이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었던 거지? 미간을 좁힌 채 찻잔의 옆면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는데 소피가 서재에 나타났다. 그녀는 나타나자마자 얼굴을 확 찡그렸다.
“각하, 오르센이 도박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뭐?”
“크라이스가 그러는데 도박 중독자라고 합니다. 각하도 아시잖습니까? 도박 중독자들은….”
소피가 말을 끊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그녀의 말을 대신 이었다.
“도박을 하기 위해서라면 가리는 게 없지. 알아봐, 당장.”
소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늘 이든을 걱정했다. 얼마 가르치지 않은 제자지만 참 소중한 모양이었다. 아마 폴과 같은 나이에 워낙 겪은 고초가 험하다 보니 이든에게 마음이 가는 것일 수도 있다.
오르센이 무슨 짓을 했든, 폴의 거취는 생각해 봐야겠다.
♡ 다섯 번째 뒷장. 청탁 ♡
내가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달빛이었다.
그리고 파르스름한 달빛을 받으며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실리가 보였다. 2년 만에 보는 실리는 비현실적이어서 요정 같기도 했고 악령 같기도 했다. 살아 있는 사람 같지는 않아서 나는 그녀를 부르지 못했다. 부르면 그녀는 빛 가루만 남기고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혹은 이게 꿈이라서 깨어 버릴 것만 같았다. 둘 다 싫었다. 좀 더 그녀를 바라보고 싶었다.
보고 싶다고, 서신에 흘리듯이 쓴 적은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보고 싶다고 제대로 말해 본 적은 없었다. 그녀가 나의 그리움을 별거 아닌 걸로 치부하는 것도 싫었고 부담을 갖는 것도 싫었다. 그녀는 돌아오지 못한다. 북부 마물들의 왕, 리히타트라인을 죽일 때까지는. 마물 토벌이라는 건 대체로 큰 목표가 있고, 이번의 경우 그녀에게 내려진 목표는 리히타트라인 제거였다.
사람들은 리히타트라인이 드래곤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드래곤처럼 생긴 그리핀이라고 했다. 리히타트라인은 엄청난 괴조이고, 무지막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게 모두의 이야기였다. 성채만 한 크기를 가지고 있고 날갯짓 한 번에 집을 날려 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성검사가 문제가 아니라 실리가 인간인 이상 이길 수 없노라며, 옌선의 도박꾼들은 실리의 패배 혹은 죽음에 돈을 걸고 있었다.
[ “이렇게 큰돈을 거시겠다고요?” ]
실리에겐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나는 실리의 온전한 승리에 엄청난 돈을 걸어 두었다. 회계사인 리살은 질색했지만 나는 그를 협박했다. 만약에 실리에게 이 건에 대해 한마디라도 벙긋하는 날에는 회계사를 바꿔 버리겠노라고. 그리고 회유했다. 대신에 비밀을 지켜 준다면 리살에게 내가 물려받은 수많은 보석 중 에메랄드 목걸이를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리살은 임신한 부인에게 아주 좋은 선물을 하고 싶어 했고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이 말을 빼먹지 않았다.
[ “저는 하스트레드 공작 각하께서 무사히 전공을 세우시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이 일에 협조하는 겁니다, 전하. 각하께옵서 패배하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면 에메랄드 목걸이가 아니라 에메랄드 광산이었어도….”
“광산이었어도?”
“…광산이었으면 좀 모르겠네요. 에메랄드 목걸이 세 개를 내미셨어도 협조 안 했을 겁니다.” ]
광산에는 협조했을지도 모르지만 세 개의 에메랄드 정도로는 결코 협조하지 않고 말렸을 거라며 리살은 코끝을 찡그렸다.
[ “그럼 내가 엄청난 돈을 따게 되는 건데 왜 말렸어?”
“도박으로 재산을 불리는 일은 하시지 않는 게 좋습니다. 첫째, 품위 없는 일이고요.”
“품위라.” ]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었던가. 내 몸에 있는 수많은 흉터들을 떠올렸던가. 아니면 헛간과 마구간, 그리고 축사에서 살던 때를 떠올렸던가? 채찍으로 맞으며 땅을 기어 다니던 일을 떠올렸던가? 무엇을 떠올렸었는지는 잘 생각이 안 나지만 어쨌든 좋은 기억은 아니었었던 것 같다.
[ “둘째는 도박으로 일군 재산은 끝맛이 나쁩니다. 원한을 사기 때문에 결코 추천드릴 수가 없어요. 품위 있는 분들이 도박을 재미 이상으로는 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래?”
“예. 높은 자리에 있으실수록 많은 원한을 사시게 되지요. 원한을 줄이시는 데 최선을 다하셔야 합니다. 하스트레드 선대 공작께서도….” ]
아차, 하는 얼굴로 리살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이야기를 들었고 그를 빤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는 곤란해했지만 본인이 꺼낸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어서 결국 목소리를 낮췄다.
[ “저주사를 당하지 않았습니까.” ]
몰랐다.
죽은 줄은 알았지만 저주사로 죽은 줄은 몰랐다. 실리는 유일한 가족을 저주로 잃은 건가?
[ “범인은 찾았어?”
“저주사는 원래 범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뭐, 하스트레드 기사단 정도면 남들보다는 찾기 좀 나은 조건이지만… 그래도 저주사는 워낙 저주를 건 사람을 찾는 게 어려워서. 제가 알기로는 어떤 저주인지도 못 알아냈다고 알고 있습니다.”
“고통스럽게… 갔어?” ]
나는 사실 내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물을 수 없었다. 알아보려고 하면 알아볼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무서웠다. 고통을 받았다고 하면 어떡하지? 내가 없는 동안 아프고 힘겨우셨으면 어떡하지? 왕세자인 내가 죽었다고 하지만 시체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빠졌다고 알려진 호수가 크긴 했지만 수색을 못 할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다. 이제 나는 자식의 시신도 못 찾은 채로 죽었다고 인정해야 했던 아버지, 부왕께서 얼마나 왕권이 약하신 왕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2년간, 대공으로서 살면서 그런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외롭고 고통스러우셨다면 나는 너무 슬플 것 같다.
그걸 물을 수가 없어서 도리어 실리의 부친이 어떻게 죽었는지 더 궁금했다. 나처럼 고아가 된 실리. 나처럼 원수를 가진 실리.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원수가 누군지 알고 실리는 모른다는 점이다.
실리 또한 부친의 고통이 무척 괴로웠겠지. 내가 대답을 기다리자 리살이 고개를 저었다.
[ “주무시는 듯 편안한 마지막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저주사는… 대체로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지 않아?”
“아무래도 공작 각하가 무서웠겠죠. 성검사 실리는 유명하니까요. 하스트레드 기사단의 단주 자리는 각하께서 성검사가 되시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넘어갔지만 그래도 단주셨던 분이셨습니다. 하스트레드의 지독한 추적도 받아야 하는데 고통스럽게 돌아가시면 그 원한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이미 죽였잖아.”
“하지만 대공 전하께오서도 생각하셨죠. 저주사치고는 자비롭다고.”
“…….”
“상대는 자비를 베푼 겁니다. 물론 각하께서는 원수를 알아내시면 빚을 받아 내시겠지요. 하지만 상대도 이 자비를 베푼 것에 대한 값은 치러 주길 기대할 겁니다.”
“예를 들면?”
“자비겠지요. 하스트레드는 잔인해질 수 있는 집단이니까요.” ]
잔인해질 수 있는 집단이라고 리살은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내가 보는 실리는 그저 아름답고 단정한, 고결해 보이는 여기사라서 도저히 그녀가 좋은 사람이 아닌 잔인한 사람이 된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2년 만에 보는 실리. 꿈에서조차 실리는 잘 나타나지 않아서 이런 생생한 실리는 꼭 2년 만이었다. 턱을 괴고 그녀를 감상했다. 그녀는 조금 피곤해 보였고 안색도 창백했다. 원래도 하얀 얼굴이 평소보다 조금 더 희었다. 속눈썹은 길면서도 끝이 우아하게 올라갔고, 입술은 말린 장미색이었다. 그리고 목덜미에, 저건, 상처인가?
저런 상처는 본 적이 없는데.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을 때였다. 갑자기 허공에서 손이 잡혔다. 거칠게 잡혔던 손은, 그러나 순식간에 부드럽게 놓였다.
“전하, 일어나셨습니까?”
실리가 눈을 평소보다 조금 크게 뜨고 물었다. 눈동자가 어두운 곳에서 봐서 그런가, 평소보다 더 금빛이었다.
“실리?”
“예,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녀는 눈앞에 있었고 내 손목은 그녀가 잡아챈 탓에 조금 얼얼했다. 모든 게 현실처럼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내 방에서 약초 냄새가 지독할 정도로 많이 난다는 걸 깨달았다. 눈살을 조금 찌푸린 채로 “이게 무슨 냄새야?”라고 묻자 그녀가 웃었다.
“잉그리드가, 아, 제가 아는 마법사인데, 마법사로도 무척 유명합니다만 약초사로는 나라 안에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녀가 전하를….”
나를?
내가 실리를 보자 실리는 잠시 눈을 내리깔더니 말을 바꿨다.
“깨워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