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ㅡ>깜
리온은 폴을 두고 ‘귀엽지만 쓸모없다’고 신랄하게 평한 적이 있는데 아마 상류 사회가 바라보는 폴은 대충 이런 느낌이 맞을 것이다.
“공부를 잘하는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애는, 진짜 착해요.”
소피아가 강조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싶어 내가 그녀를 올려다보았을 때였다. 내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 떨어진 순간 소피가 말했다.
“대공 전하께오서는… 시종이 필요하시지 않으셔요?”
“소피아.”
내가 질색하는 얼굴로 소피를 불렀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생각해 봤는데 폴은 시종에 참 잘 맞는 아이인 거 같아요. 착하고 바지런하고. …많이 배우거나 똑똑하진 않지만 전하께오서도 배워 가시는 과정이시니까 같이 배우면….”
“소피, 전하께오서는 이미 열세 살의 기본 과정을 지나가셨어. 폴은 온 어도 못 하잖아.”
고대어는 고사하고 그로스랜 표준어나 잘 읽고 쓰는지 의문이다. 착하고 매력적인 아이지만 그 외에는 딱히…. 대공 전하의 곁에 둘 만한 인재는 아니었다. 나는 내가 붙여 둔 시종과 시녀를 떠올렸다.
이든과 동갑인 남아 시종은 문무 전부 그 나이 이상의 성취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배우려는 의지도 기특할 정도로 강했다. 모난 데 없는 성격에 조용하고 차분한 천성, 게다가 아이답지 않은 신중함까지 겸비한 시종이었다.
시녀, 로즈메리는 열 살이다. 이든보다 세 살 아래. 조금 다혈질이긴 하지만 사려 깊고 총명한 아이였다. 신분에도 문제가 없는 데다 백작이 제 딸과 함께 키운 아이라 품위도 있었다. 사실 로즈메리의 문제는 백작이 그 아이를 너무나 어여삐 여기는 바람에 백작의 딸이 질투하게 된 게 발단이었다. 로즈메리는 아름답고 총명한 아이였고 백작은 그 아이를 잘 키워서 중요하게 쓰고 싶어 했다. 또한 좋은 곳으로 시집보내 주려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신보다 사촌을 더 똑똑하다고 여기는 것 같자 백작의 딸은 분노했고 온갖 짜증과 화풀이를 로즈메리에게 해소했다. 오갈 데 없는 고아인 로즈메리는 묵묵히 그 일들을 참아 내야 했지만 그녀는 그런 성격이 못 되었고 곧 백작의 저택에서 문젯거리가 되었다. 이게 그녀가 내게 온 배경이었다.
이 둘에 비해 폴은 확실히 수준 미달이었다. 로즈메리는 열 살인데도 자수, 꽃꽂이, 노래는 물론이고 간단하게 장부를 쓰고 읽는 법까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든. 이든은 어릴 때 고초를 겪은 탓에 몸이 약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셋 중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루고 있었다. 이 셋 사이에 폴을 넣는다니, 정말 어불성설이었다.
“주군.”
소피아가 드물게 침울한 얼굴을 하고 나를 불렀다. 아아.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침통한 신음을 삼켰다. 이런 얼굴로 소피가 부탁을 하면 안 들어주기가 어려워지는데.
“저는 죽을 수도 있잖아요.”
소피의 말은 청승맞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매우 현실적인 울림을 담고 있었다.
“제 남편인 조이스는 좋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외로움을 좀 타죠. 그는 제가 죽으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할 거고 새로운 여자를 만나게 될 거예요. 저는 그걸 나쁘게 생각하진 않지만.”
사실 소피가 남편 조이스에 대해 늘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나를 비롯한 기사단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조이스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는데 소피는 기사였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많은 곳을 떠돌아다녔고 조이스는 성에 남아 있어야 했다. 소피가 작위를 받고 안주하는 성격이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녀는 그런 성미도 못 되었다. 그녀는 더 많은 걸 보고 싶어 했고 기사로서 더 높은 성취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건 그녀의 꿈이었고 조이스는 그걸 만류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분명 조이스에겐 좋은 여성일 거예요. 전 그걸 확신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제 아이들에게도 좋은 사람일까요. 그건 아무도 모르죠.”
“…….”
“좋은 계모에 관한 미담은 한두 가지밖에 없지만 나쁜 계모에 관한 이야기는 수천 가지가 있고 저는 조금 보험이 필요해요.”
옳은 소리다. 심정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보험이 필요한 게 너만은 아니잖아.”
나른하게 목욕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걸 들어 버렸다. 마음이 싱숭해져 뜨거운 물에서 나가고 싶어졌다.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자 소피가 옆에 있던 큰 타월을 내게 건넸다. 받아서 몸을 닦으며 말했다.
“내가 보험이 필요한 모두를 돌봐 줄 수 있진 않아.”
소피가 듣기에는 참 차가운 말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진중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운한 것 같기도 했고 불쾌한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지만 화를 내진 않았다. 특별 취급할 수는 없어. 선을 긋는 내 말에 그녀는 그저 눈을 내리깔고 “실례했습니다.”라고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옌선으로 돌아오는 내내 소피의 아들, 폴에 대해 생각했다. 특별 취급을 할 수는 없어. 그렇게 말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딱 잘라지는 거였다면 나는 애초에 이든을 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든을 구하지 않는 게 사실 내게는 더 쉬운 길이었으니까.
초겨울의 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나는 왜 이든을 구했는가. 그가 가여워서? 어쩌면. 아버지의 죄 때문에? 그럴지도. 하지만 이든에 대해 떠올리면 늘 그의 얼굴이 생각났다. 아름다운 얼굴에 박힌 두 개의 눈동자. 자신의 존재를 세우고자 하는 그 필사적인 눈이 생각났다. 그래서 아마 나는 그에게 잘해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 내게 검을 돌려주려 했다. 그것이 결정타가 되어 나는 하스트레드와 나를 걸고 그를 구했다.
사실 내가 그를 구했다고 말하기엔 어폐가 좀 있다. 그를 구한 건 나만이 아니다. 그를 구한 건 그의 혈통, 그의 순간적인 임기응변, 자존심을 굽힐 줄 아는 현명함, 외가가 남긴 재산, 그의 피가 그에게 강하게 발현된 것, 무엇보다 정치적 상황 등이 모두 합쳐진 결과였다. 단지 누군가는 살아 움직여 일을 도모하며 그를 구하는 판을 짜야 했고 그게 나였을 뿐이다.
내가 그를 구했다기보단 어쩌면 그게 그의 운명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내가 폴에게 신경 쓰는 것 또한 폴의 운명이다.
이렇게 나의 특별 취급을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무수히 되뇌이며 옌선으로 돌아왔더니.
“뭐?”
2년 만에 보는 어린 약혼자 전하께오서는 사경을 헤매고 계셨다.
“언제부터?!”
갑옷을 거칠게 벗으며 묻자 나흘 전부터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흘 전. 내가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보고가 들어오지 못했던 것 같다. 갑옷을 벗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바로 이든의 상태를 확인했다. 정말 사경을 헤맨다는 표현이 적절한 게 헛소리를 하며 숨을 헐떡이는 중이었다.
“실리, 실리.”
그는 나를 부르고 있었다. 방 안에 모인 모두가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피부에 열꽃이 가득 핀 채로 나를 부르는 그는 아름다웠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오르센?”
내 입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옌선의 명의로 한 손에 꼽히는 오르센이 어깨를 움츠렸다.
“워낙 몸이 약하신 분이라.”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옌선으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으셨던 분이 아니냐?”
“본디 몸이 안 좋으신 분들은 이렇게 갑작스럽게 아프십니다. 게다가 송구하옵게도 어린 몸에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인 고문독까지 자리 잡아서….”
“…….”
“하, 하오나 곧 호전되실 것입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오르센이 어색하게 미소 짓는 걸 보다가 “그래.”라고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로즈메리가 눈치 빠르게 내 곁으로 와서는 “각하, 차라도 한 잔 올릴까요?”라고 물었다.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로즈메리 뒤에 있는 테인을 보자 그도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밤낮으로 달려오셨을 터인데 차 한 잔 드시어요.”
로즈메리가 애교 있게 내 팔짱을 꼈다. 보통의 시녀라면 어림도 없지만 열 살짜리 로즈메리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하고선 로즈메리는 나를 끌어당겨 일단 이든의 침실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나에게 정말로 장미차를 따라 주었다. 나의 서재에서 그녀가 장미차를 따라 주는 동안 테인이 내 앞에 서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내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자 그가 이윽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상합니다.”
테인의 말에 장미차를 한 입 머금었다. 좋은 향이었다. 전장에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날 정도로 우아하고 향긋한 향.
“뭐가 이상하지?”
“오르센 선생님 말입니다.”
나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계속 말해 보라고 테인을 재촉했다. 나도 사실 오랜만에 본 오르센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대공 전하께서 아프신 지 나흘이나 되었는데 내내 사혈만 하고 계세요.”
사혈을 나흘째 하고 있다고? 물론 많은 의사들이 사혈로 병을 치료한다는 걸 알고 존중한다. 하지만 나흘째 사혈만?
“아프신 이유가 뭐야?”
“모르겠습니다. 오르센 선생님께선 그냥 몸이 약하신 거라고만 하시니까요.”
나는 의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몸이 약한 사람에게 나흘 내내 사혈을 해도 되는 건가? 나흘 내내 피를 흘리면 건강한 사람에게도 안 좋을 것 같은데. 나쁜 피라서 괜찮은가?
기분 나쁜 예감이 귓바퀴를 쓸고 지나갔다.
“테인, 소피를 데려와.”
내 말에 테인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빠른 발걸음으로 서재를 나갔다. 로즈메리가 내 빈 잔에 차를 채우면서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각하, 오르센 선생님은 정말 이상해요. 자꾸 고문독 이야기를 하고.”
나도 그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고문독 이야기는 그렇게 쉽게 할 것이 아니었다. 대공인 이든에게는 약점이기 때문이다. 왕세자이기도 했던 이든이 고문독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건 그가 험한 일을 많이 당했다는 것이고 다시 말하자면 고귀한 출생에 비해 그런 행보를 지니지 못했다는 뜻이 되니까. 귀족을 상대하는 오르센은 이런 걸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인데 모두의 앞에서 태연하게 고문독 이야기를 하는 게 의아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