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ㅡ>깜
` “그렇게 여러 종족들을 도살했으니 악명이 드높지.” `
“내 입장에서는 좀 다른데? 도살이라니, 애초에 살아 있는 것들인지도 모르겠는데.”
사람들은 인간과 마물이 만나면 바로 칼부림이 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하급 마물일 때 이야기다. 상급 마물과 만나면 대체로 이렇게 입씨름부터 시작하게 된다.
` “드래곤의 앞에서 무엄하구나, 실리.” `
리히타트라인이 위엄에 찬 태도로 말했다. 리히타트라인이 무슨 마물인지에 대해서는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여러 논쟁이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드래곤 피가 좀 섞인 거 같긴 하다. 아마 하프 아닐까? 나머지 반은 뭘까? 나야 마법사가 아니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봤을 때는 덩치가 큰 마물일 거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나는 리히타트라인의 모습을 자세히 뜯어보면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친한 척 부르는 게 더 무례해. 너와 내가 무슨 사이라고 실리야, 실리가.”
` “…뭐라고 불러 줄까?” `
“하스트레드 공작.”
아무렇게나 대답하면서 리히타트라인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분명 옌선에 돌아가면 마법사들이 내게 모습을 묘사해 보라며 몇 날 며칠 동안 양피지를 들고 쫓아다닐 게 분명했으므로.
` “인간들이란. 하여간 다들 이렇게 헛된 명예에 집착하지.” `
“드래곤인 척하는 너보다는 낫지. 난 최소한 진짜 공작이긴 하거든.”
리히타트라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런, 여기가 밟아서는 안 되는 곳이었나 보다.
` “검을 뽑아라, 보잘것없는 인간 검사여.” `
“내 검을 뽑을지 말지는 네가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 덤비든가 말든가나 결정하도… 읏!”
거대한 바람이 불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리히타트라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날갯짓을 하며 분노하고 있었다. 불이라도 뿜을 듯해서 오른손을 뻗었다. 손끝에 감도는 마력의 기운은 대지의 기운이 가장 강했지만 아무래도 리히타트라인에게선 불의 마력이 강하게 느껴졌던 고로 성검을 물의 형태로 소환했다.
` “성검이니 뭐니 해도 결국 마력검 따위일 뿐이다!” `
“너도 마물 따위일 뿐이고. 서로 잘 만났네.”
보란 듯이 웃어 보이자 놈이 내게 돌진했다. 옆으로 빠져도 워낙 덩치가 있는 데다 놈이 몰고 온 바람이 워낙 강해서 옆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몇 번이나 우리의 대치는 반복되었다. 놈은 날갯짓을 하고 발톱을 휘둘렀다. 이빨은 위협적이었다. 몸통 박치기는 빗맞기만 해도 아마 저승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물 주제에 마력이 없는 거야?”
인간과 소통을 할 수는 있어도 정작 공격 마법은 사용할 수 없는 건가? 나의 비웃음에 놈이 화가 나서 몸을 좌우로 마구 떨어 댔다. 그러자 바람이 불었다. 마력을 운용할 수는 없어도 그 몸 자체에는 마력이 서려 있었다.
“주군! 도발하지 마세요!”
리온이 위협적으로 느꼈는지 내 옆으로 굴러와 나지막이 한마디 했다. 모두들 비슷한 심정인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역시 웃겨서 견딜 수가 없었다. 드래곤을 자칭하며 마물을 규합한 북부 마물들의 왕이 정작 마력을 운용할 수 없다니. 마력을 운용할 수 없다면 그게 무슨 드래곤이야.
“드래곤이 요즘 너무 우스워진 거 같….”
` “죽이겠다!” `
리히타트라인이 고함을 질러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도 가끔 내가 이상한 성격이라고는 생각하는데 나는 진심으로 웃음이 났다.
“아까부터 그러려고 힘쓰고 있는 거 아니야?”
네가 날 봐준 게 아니라 그냥 못 죽이고 있는 거잖아. 내 말에 놈이 나에게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대포알이 날아드는 것 같은 속도였다. 간발의 차이로 피하면서 나는 땅을 박차고 하늘 높이 뛰었다. 놈은 덩치가 너무 커서 도약을 강하게 해도 아주 간신히 놈의 머리 위까지 뛰어오를 수 있을 정도였다. 성채만 한 크기의 놈의 머리 위까지 마력을 다 써서 뛰어오른 다음 성검을 온 힘을 다해 붙잡고 수직 낙하했다. 성검의 칼날이
리히타트라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직으로 갈랐다.
` “크아아아아아앙…!” `
아주 이상하고 기묘한, 비명이라기보다는 굉음에 가까운 소리가 온 천지를 진동했다. “주군!” 익숙한 목소리들이 나를 소리 높여 불렀다. 내 몸이 리히타트라인의 몸에 완전히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리히타트라인의 몸이 반쪽이 나면서 양쪽으로 콰아앙, 넘어지고 그곳에 서 있는 건 나 하나밖에 없었다. 리히타트라인의 자주색 피와 이상한 체액, 그리고 내장들을 뒤집어쓴 채 서 있는 나를 보면서 기사들이 앞다투어 달려왔다. 그들 중 몇몇은 내 모습에 놀라서 그대로 주저앉은 이들도 있었지만 상급 기사 중엔 없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크라이스였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피에 독은 없었습니까?!”
“천! 천을 가져와!”
리온이 고함을 질렀다. 거대 마물 중엔 염산처럼 모든 것을 녹이는 피를 가진 종류도 있었기 때문에 다들 사색이 되어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건틀릿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리히타트라인의 피에 그런 효과는 없어 보였다.
“됐어, 괜찮아.”
내 말에 크라이스가 눈을 부라렸다.
“부식은 안 될지라도 독성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여기서 천으로 좀 닦는다고 해결될 게 아니잖아. 갑옷을 벗을 때 조심할 일이지. 너희들이 같이 피를 묻혀서 될 일은 더더욱 아니니까 물러서.”
내 차가운 어조에 다들 엉거주춤 물러섰다. 나는 허리춤에 단도를 꺼내 리히타트라인의 목을 자르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왕에게 바쳐야 할 전리품은 필요하니까. 북부 마물 왕의 목만큼 전리품으로서 적당한 게 또 뭐가 있을까.
반으로 잘린 목을 양쪽 다 잘라서 앞에 던져 놓자 리온이 하급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잘 꿰매 놔.”
왕은 분명 리히타트라인의 목을 선전용으로 써먹을 테니 우린 이걸 예쁘게 꿰매 가져가야 했다. 마법사들이 썩지 않도록 마법을 걸어 주긴 하겠지만 그래도 몇몇은 저걸 가지고 빠르게 수도로 귀환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마력 운용은 전혀 못 했어도 리히타트라인의 몸 자체에는 마력이 강하게 서려 있었다. 죽었다고는 해도 마법사들의 마법이 아주 잘 들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은 자고 내일부터는 달려야겠군.”
내 말에 크라이스와 소피아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리온은 기사단을 챙겨서 돌아와야 하는 만큼 남을 것이고 소피아와 크라이스는 이런 경우 나와 함께 이동하는 주요 인원이었다.
성으로 돌아오자 소피아와 크라이스, 그리고 그들의 밑에 있는 하급 기사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우리는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급 기사들과 그들의 종자, 즉 기사 후보생들이 짐을 꾸리는 동안 나는 욕조에 몸을 담갔고 크라이스는 모두를 확인하러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소피아가 나를 찾아왔다.
“주군.”
소피아가 나를 보자마자 귀족의 예법으로 절했다. 아아. 나는 과장되게 신음했다. 평민 출신의, 귀족의 예법하고는 담을 쌓은 소피가 굳이 귀족의 예법으로 내게 인사한다는 건 귀족으로서 내게 볼일이 있다는 뜻이고 대체로는 별로 좋은 일은 아니었다.
“아직 말씀을 올리지도 않았습니다, 주군.”
“뭔지는 몰라도 내가 싫어할 이야기일 거 같은걸.”
“…제가 아직 말씀을….”
“이제 해 봐. 뭔데?”
내 명령에 소피아가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었다. 의도적인 애교였다. 그렇다는 건 내게 애교를 부려야 할 정도로 지금 할 부탁이 크고 무거운 것이라는 의미였다.
“맙소사, 소피. 뭘 부탁하고 싶어서 이래?”
욕조에 젖은 다리를 올리고 어깨까지 담근 채로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옌선으로 갈 거잖아요, 주군.”
“그렇지.”
“그, 폴 기억하시죠?”
“네 장남 폴이라면 당연히 알지.”
“폴이 지금 마침! 옌선에 있거든요.”
소피아가 손뼉을 짝 쳤다. 아주 작위적이었다. 내가 어이가 없어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헷, 하고 웃었다.
“폴을 옌선으로 오라고 했어? 네 영지에서 옌선까지는 길이 좋지도 않은데 왜?”
머릿속으로 소피의 영지에서 옌선까지 오는 길을 지도로 좀 그려 보았다. 길이 참 험했다. 그로스랜은 나라들 중에서도 유독 지역 차가 많이 나는 곳이었고 수도인 옌선은 ‘꽃의 도시, 요정들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웠지만 번화한 큰 도시들과는 달리 작은 마을들의 상태는 참혹했고, 수도에서 멀어질수록 그 상태도 심해졌다. 국가 질서가 제대로 개입되지도 않아서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끼리 재판을 열었는데 그러다 보니 마을마다 법이 다 달랐다. 종교도 다르고 관습도 다르고 말들도 조금씩 달라서 툭하면 마을끼리 전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마을 어귀에서는 흔히 교수형을 당한 사람들의 시신이나 교수형 장면, 혹은 화형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이 보기에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소피는 특히나 아이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부모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옌선으로 굳이 폴을 데리고 오려 하지 않았었는데.
“폴이, 뭐랄까. 주군, 제 아이이긴 하지만 애는 착하잖아요.”
“응?”
“애는 착한데… 애는 진짜 착하거든요. 그런데, 좀 뭐랄까. 검에 대해서는 재능이 없고.”
으음. 나는 미묘하게 웃으며 미간을 좁혔다.
소피아의 장남, 폴 히옌만큼 많은 스승을 거친 아이도 참 드물 것이다. 하스트레드의 온갖 기사들이 폴에게 검을 좀 가르쳐 보겠다고 열성을 쏟았었다. 오죽하면 나조차도 폴과 이틀 정도 검에 대해 이야기해 본 적이 있을 정도니까.
소피아의 아들은 셋이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폴이 가장 소중하고 익숙했다. 그래서 기사단원들은 폴에 대해 참 많은 관심과 나름의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 소피아가 어렵사리 받은 남작 작위와 영지를 이어 나가야 할 폴이 완전히 평민 아이와 똑같다는 것 때문에 기사단 내에 있는 많은 귀족 가문 출신 자제들이 진저리를 치면서 아이를 가르치려 들었다. 크라이스, 리온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많은 기사들이 달라붙어 폴의 교육에 이러쿵저러쿵 참견했고 결국 소피아는 질려 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며 모두의 간섭을 잘라 버리고는 폴에게 최대한 자유를 허용했다. 그리하여 폴은 꽤 편안하게 컸다. 검도 다룰 줄 모르고 딱히 장부를 볼 줄 아는 것도 아닌 열세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