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ㅡ>깜
리온의 집안은 굳이 말하자면 중도파에 가까운데, 권세 있는 집안이면서도 적당한 처세를 할뿐 딱히 왕에게 친밀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리온의 집안을 ‘외줄 타기 장인’이라고 비꼬기도 했는데 그 정도로 훌륭한 처신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들은 왕에게 너무 가까워지지 않으면서도 왕의 적들과 교류하지도 않았고 마치 유흥만 즐기는 집안처럼 보이면서도 모든 이들이 성실하게 자신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 남들과는 다른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각자 다 생존 방식이 다른 거니까.
회의가 끝나고 곰방대를 무는데 리온이 싱긋 웃었다. 홀을 나가지 않는 걸 보니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크라이스도 할 말이 있기는 마찬가지인 듯 홀에 남았지만 “꺼져.”라는 리온의 말에 그는 칫,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리온의 말이 험해진다는 건 기분이 별로 안 좋다는 의미다. 냉정한 타입이지만 화나면 무섭고 잔소리도 심한 편이라 괜히 몸이 뒤로 빠졌다. 아,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내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었는지 리온이 크라이스가 나간 문을 꽉 닫고서 나를 돌아보았다.
“주군.”
“응?”
“정말로 왜 대공 전하를 구하신 겁니까?”
역시 납득 못 했군.
“어느 정도는 진심으로 상속권 문제가 있었어.”
“그건 다른 방식으로도 풀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하스트레드를 굳이 걸어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어요.”
“…….”
“애초에 하스트레드가 없이는 그분들이 원하시는 작위도 재산도 없는데 무슨 수로 그걸 그분들이 유지하시겠습니까. 하스트레드는 주군의 것이었고 그건 불변이었습니다. 저를 멍청이로 보지 마세요.”
“하스트레드는 내 것이지만 내 삼촌들은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기사들은 물론 나를 따르지. 하지만 그 가족들 중 일부가 회유되었어.”
“…누가? 누구의 가족입니까?”
“말하면 넌 달려가서 쥐 잡듯 잡을 텐데 내가 어떻게 말해 주겠어.”
내 말에 리온이 격렬하게 혀를 찼다. 지금 당장 달려가서 따지고 싶은데 상대를 몰라서 답답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말해 줄 수는 없었다. 기사들은 나를 안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은 가까이서 봐 왔다. 하지만 기사들의 가족들? 그들에게 나는 그저 스물여섯 살의, 귀하게 자란 아가씨일 뿐이었다.
아, 연초 맛있다. 연초는 몸에 좋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제들 같은 경우에는 연초를 끊는 사람들도 왕왕 있었다. 그들은 이 나른한 감각을 쾌락으로 정의하고 금욕적인 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고는 했다. 그리고 성검사인 나에게도 신력의 유지를 위해서 금욕적인 생활을 할 것을 권하며 연초를 끊으라 했다.
이걸 어떻게 끊는담. 이렇게 맛있는데.
“주군.”
“안 돼. 그리고 그들이 잘못한 것도 아니야. 요즘 같은 세상에 살길 좀 여러 방면으로 알아봤다고 모가지가 댕강댕강 잘려야겠어?”
“제가 언제 목을 자른다고 했습니까?”
“그럴 것 같은 눈이야.”
“에이, 잘못 보셨네요. 저의 사슴과 같은 눈망울을.”
“제대로 본 거 같은데.”
“아니에요. 제 눈을 보세요, 이 순진하고 맑은 눈을.”
리온이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회색 눈을 보며 쓰게 웃었다. 맑기는커녕 음험하기 짝이 없는 눈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너의 말에는 동의 못 하겠으니까 관둬. 내 표정에 쓰인 말을 보고는 리온이 혀를 찼다.
“배신자는 초장에 잡아야 합니다.”
누가 누구를 배신한 건가.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잘 모르겠다. 그래? 그 사람들이 나를 배신한 건가? 내 입장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내 입장에서 잘 생각이 들지 않는다.
죽음의 목전에서 살아온 탓일까. 나는 늘 내가 회색 지대에 서 있는 기분이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하게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고 그 뜻을 관철하며 나아가는데, 적을 처단하고 아군을 포용하는데, 나는 언제나 땅도 물도 아닌 곳에 서서 반쯤 잠기고 반쯤은 아닌 채로 모든 것을 관망하고 있다. 스물여덟. 하스트레드 공작.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건 아는데.
왜 나는 이러는지.
문득 이든이 생각난 건 그의 나이가 열셋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처음 사람을 죽인 나이. 그 나이에는 지금 나이쯤 되면, 서른에 가까워질 때쯤에는 인생이 모두 명확해질 줄 알았는데.
나만 홀로 부유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참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늘 그래 왔듯이 나는 연초 연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배 속 끝까지 나른한 연기를 마시고 연기 속에 한숨을 숨겨 흘려보냈다.
리온이 뭐라고 말을 하려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의 충성심을 안다. 돈만 아는 수전노가 유일하게 충성심을 갖는 상대, 그게 바로 나다. 하지만 나는 종종 생각한다. 나의 무엇이 너를 충성하게 하는가. 일리드 사리안의 딸이라서? 성검사라서? 그 무엇이 너희의 목숨을 걸게 하는가. 나에게 그런 가치가 있는가. 나는 그런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모르는 척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가치가 있는 척, 강하게 턱을 들고 모든 것을 마주 보아야 한다는 걸 아는데.
“주군?”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리온이 나를 불렀다. 나는 마지막 연초 연기를 들이마시고는 곰방대의 재를 털면서 웃었다. 아마 오늘 밤은 연초가 평소보다 조금 더 필요했나 보다. 마지막 연기까지 머금고 나니 평소와 같이 괜찮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내가 묻자 리온이 나를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리온.”
“예.”
“지도를 가져와.”
어차피 리온이 여기에 있으니 이야기를 끝내자.
“예?”
“앞으로 한 달. 이 전쟁, 끝낸다.”
곰방대에서 마지막 재가 떨어졌다. 나는 나른하게 웃었다. 어느 정도 격전지들을 정리하였으니 이제는 몰아칠 때다. 마물들의 둥지까지 완전히 제거하겠다고 마음먹은 차였다. 이번에야말로 북부에서 마물들의 싹을 잘라 내겠다. 내 얼굴을 본 리온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머물렀다.
“모든 것은 주군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리온이 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만으로 덧붙였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웃었다. 전쟁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마음이 편안했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같은 얼굴로 웃을 수 있었다.
***
7차 마물 토벌을 마무리 짓는 데는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계획은 최대 한 달까지 예상하고 있었지만 운이 좋았다. 모든 것은 마치 약속한 것처럼 차례차례 이루어져 3주 만에 우리는 북부 마물들의 왕, 리히타트라인의 둥지까지 도착했다. 리히타트라인. 드래곤이 되지 못한 그 마물은 드래곤 행세를 하며 주변 마물들을 결집한 상태였다. 인간의 관점에서 그 마물들의 집결지를 ‘둥지’라고 표현해야 하지만 사실 그곳은 작은 마을이라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모든 게 있었다. 대장장이에 농장까지 마을을 이루는 최소한의 것들은 모두 갖춘 상태였다.
“조금만 더 지났으면 도시로 마주할 뻔했네요.”
마물들의 피를 뒤집어쓴 리온이 내게 가까이 오며 말했다. 그는 아주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근처에 버려진 유적들을 해체했군. 군데군데 석벽이 보여.”
“시발, 이젠 마물이 석벽으로 만든 집에서 지내는 겁니까? 사람도 목조 주택에서 지내는데?!”
크라이스가 마물의 심장을 찌른 칼을 힘주어 빼내더니 우리 쪽으로 와서 불평을 토했다. 마물들과 싸우는 것보다 마물들이 석벽으로 된 집에서 살고 있는 게 더 불만인 듯했다. …사실 집이라기보다는 거의 성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 성이 석벽으로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군데군데 풀로 기워져 있어서 그렇지.
“그리핀이 온다!”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소피가 등에서 석궁을 꺼내 달려드는 그리핀들을 향해 쐈다. 몇 발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리핀들이 화살을 피하는 사이 석궁을 꺼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리온과 크라이스 같은 주요 전력들은 검을 바로 잡고 떨어지는 그리핀들을 처리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키이이이이익! 괴물의 울음이라고 하기에도 사람의 비명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운, 이상하고 기묘한 울음소리가 온 세상을 채우는 듯했다. 나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러고 있었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다들 두리번거렸지만 소리가 너무 커서 어디서 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펄럭, 펄럭. 날갯짓 소리와 함께 바람이 몰아쳤다.
“리히타트라인입니다!”
고유 명사, 즉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마물은 드물다. 리히타트라인은 몇 안 되는 이름이 있는 마물이었다. 리히타트라인. 온 어로 ‘저주받은 자들의 선지자’.
` “화를 낼 생각이었는데.” `
하늘을 가득 채웠다고 말할 법한 크기였다.
리히타트라인. 드래곤이 되지 못한 마물은 드래곤보다도 큰 것 같았다. 거대한 검은 마물은 하늘에 떠 있었다. 노란 눈이 우리를 굽어보고 있었는데 눈동자가 움직일 때마다 등골이 오싹했다. 눈이 너무 컸고 너무 밝았다. 마치 달 두 개가 떠 있는 것 같았다. 가느다랗게 일그러진 달 두 개가.
` “의외의 인물이 왔군. 성검사 실리, 아닌가.” `
말을 하는 방식이 인간과는 조금 달랐다. 소리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기사 중 몇 명이 말을 뒤로 물렸다. 본능적인 공포에 지고 만 것이다.
“내 이름이 마물에게까지 알려질 정도로 대단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나는 말 위에서 팔짱을 낀 채 웃어 보였다. 리히타트라인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괴물인지는 상대해 보기 전에는 뭐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았지만 마력이 강대하다는 건 알겠다. 그러나 여기서 조금이라도 내가 움츠러드는 조짐이라도 보이는 날에는 모두의 사기가 꺾이게 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나는 이런 일에는 겁이 나지 않았다. 사실 겁이 난다는 걸 언젠가부터 잊은 것 같다. 언제부터였는지, 이미 기억도 나지 않는다.
죽으면, 죽는 거니까.
단지 그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