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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22화 (21/94)

<☆22ㅡ>깜

실리는 나와는 달리 옷을 갈아입는 데 훨씬 긴 시간을 소요했다. 물론 시간을 모두 합치면 내가 소비한 시간이 더 길지만 실리는 고작 한 벌을 갈아입으면서 내가 대여섯 벌은 갈아입을 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도대체 옷 하나 입는 데 무슨 시간이 이렇게 걸려? 내 얼굴을 본 소피가 “여성들은 화장이 있잖습니까. 머리도 복잡하고요.”라며 뭘 모른다는 듯이 개구지게 웃었다. 그런가. 하스트레드에서 날 가르쳤던 가정 교사 중 여성도 꽤 많았지만 그녀들 대부분은 화장을 거의 하지 않은 수수한 차림으로 다니는 사람들뿐이어서 나는 아주 먼 옛날의 기억을 끄집어내야 했다. 숙모는 어떻게 하고 다녔더라? 간신히 숙모의 옷차림을 생각해 낸 다음에 나는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숙모는 화려한 사람이었는데 좋게 말해서 화려한 거지 어린 내 눈에는 요란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 몰골이 되려고 이렇게 오랫동안 방에 갇혀 있는 건가 생각하자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실리는 붉은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하얀 셔츠에 가죽 바지를 입은 모습이 가장 잘 어울렸다. 여리여리한 목선과 검이 이루는 단정한 선. 그것이 어우러지는 세실리아 사리안이라는 사람의 모습. 나는 그게 좋았다. 그 어떤 여자와도 같지 않은 특별한 실리이기 때문에 그녀를 좋아하고 믿고 의지할 수 있다… 고 생각했다.

작은 방의 커튼이 열리기 전까진.

“와, 오랜만에 성장하신 모습을 보는데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소피가 웃는 목소리가 아득히 멀리 들렸다. 실리의 모습에서 눈을 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아름답게 바라보는 건 무례한 일이 아니지만 이토록 뚫어지게 바라보는 건, 아니, 어쩌면 나는 내가 노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건 확실히 예의범절에서 어긋난 일이었다. 가뜩이나 어린 약혼자라는 짐을 짊어지고 가게 된 실리의 앞에서 아이인 티는 가능한 한 내지 않아야 그녀가 힘들지 않겠지, 라고 라르투르에 올 때까지만 해도 분명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나로 우아하게 땋아 올린 머리는 목을 드러냈다. 머리카락은 생화로 꾸며져 있었고 옷도 머리에 장식한 꽃도, 구두나 핸드백조차 전부 흰색 혹은 연한 분홍색이었다. 실리의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는 그녀를 늘 전쟁의 여신처럼 보이게 했는데 지금 그녀는 순결함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진주 끈으로 된 핸드백을 팔목에 걸고 두 손으로 작지도 크지도 않은 부케를 들고 있는 모습은 여신…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신부와 같았다.

그 순간 나는 그녀가 나의 약혼녀, 그러니까 나와 결혼할 대상이라는 걸 깨달아 버렸다.

이 아름다운 여자가 차후에 나의 배우자가 된다.

“대공 전하께서 넋을 놓으셨습니다!”

소피가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놀리는 소리가 들리긴 들렸다. 그런데 여전히 멀었다. 강한 실리. 관대한 실리. 좋은 사람인 실리. 그래, 그런 실리를 알고 있었는데 이토록 아름다운 내 신부가 될 실리는 생각해 본 적도 없어서 나는 눈을 그저 깜빡이고만 있었다.

사람들이 소피의 놀림에 웃음을 눌러 죽이느라고 힘들어하는 것이 느껴졌다. 소피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대공인 내 면전에서 나를 놀릴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들이 웃었다고 하더라도 화가 나지도 그렇다고 같이 웃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 머리가 완전히 비어 있었다.

그녀가 출정하기 며칠 전의 일이었고, 나는 그녀가 출정하고 나서 꼬박꼬박 서신을 보냈다. 그녀는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고 단답식으로 답신을 보내어 내가 지치길 은연중에 기다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 보내고 싶은 걸 참으며 적당하게 간격을 유지해서 서신을 보내는 동안 내 마음속으로 여러 모습의 실리가 지나갔다. 수줍은 신부 같은 모습의 실리. 검을 휘두르던 전신의 화신 같던 실리. 나를 구하러 온 실리.

하지만 늘 마지막에 생각나는 건 왠지 세상사를 모두 체념한 듯이 피식 웃는, 나이를 모르겠는 실리. 할머니 같기도 하고 나보다 어린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그 웃음.

실리, 나는 늘 궁금해.

너는 왜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한 듯이 웃는 걸까. 나와는 달리 모든 걸 가지고 있었으면서.

***

“…부터, …프셨나?”

실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기꺼웠다. 2년이 넘게 실리를 보지 못했다. 나는 키도 컸는데 실리는 내 모습을 알지도 못하겠지. 그녀는 조금 더 나이 들었을까? 그럼 조금 덜 아름다울까. 아니면 더 아름다울까.

“…서, 괜찮으셨는….”

“오르센!”

“각하, 죄….”

목소리가 계속 멀어져 간다. 이마에 놓인 약간 시원한 손은 조심스럽고 사려 깊었다. 이 손이 실리의 것이라면 좋을 텐데. 잠에 빠져들기 전에, 늘 그렇듯 실리를 생각했다.

♡  다섯 번째 앞장. 귀환  ♡

나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다는 건 나도 안다.

왕은 내 도발을 권위로 응징했다. 내가 그의 계약자가 되자마자 그는 나에게 7차 마물 토벌을 명했다. 마물 토벌은 필요한 일이었지만 왕은 많은 군사력을 마물 토벌에 할당할 여력이 없는 상태였다. 몇몇 국경 지역에서 교전이 일어나고 있었고 국내 정서도 좋지 못했다. 그는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로 왕위에 올랐고, 사람들은 그가 조카를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고 수군거렸다. 아이들은 골목을 뛰어다니며 그에 대한 노래를 불렀다.

“조카야, 조카야. 밤하늘의 보름달이 크고 환한데 꿈은 아련히 머니 지금 일어나서 호수에 가 보렴. 요정이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에 작전 회의가 멈췄다. 우리에게 성을 빌려준 성주의 얼굴이 노래졌다. 그는 왕의 검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들의, 특히 나의 눈치를 심하게 보면서 물었다.

“혀, 혀라도 잘라 올까요?”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리온이 활짝 웃었다.

“깊은 배려 감사합니다.”

“그, 그럼….”

성주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정말 잘라 와야 하나, 그가 고민할 무렵 크라이스가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 혀를 쓸 데가 없는 게 좀 유감이네요. 저희가 편식이 좀 있어서 식인은 안 하거든요.”

‘우리가 식인종이야? 애들 혀를 가져다 뭐 하게?’라는 뜻을 담아 크라이스는 아주 우아하게 비난을 퍼부었고 모욕을 알아들은 성주는 얼굴이 또 노래졌다. 소피가 옆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크라이스를 흘끗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크라이스가 눈으로 묻는 것 같았다.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아냐, 잘했다고.’

소피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자 크라이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칭찬을 받아 기분이 좋은 듯했다. 그러는 사이 성주는 어쩔 줄 모르는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고맙지만 사양해야겠군. 회의나 계속하지.”

내 말에 성주가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각하, 저는 충정으로….”

“충정은 알겠는데 아이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혀를 베겠다는 건가?”

“예?”

성주가 눈을 동그랗게 떠서 나는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아이들이 무슨 잘못을 하였는데?”

“그, 그, 무엄한 노래를….”

“노래? 난 아무것도 안 들렸는데. 뭐, 들은 사람?”

내가 묻자 다들 ‘뭐가 있었나?’라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 또한 리온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우리의 제스처에 성주가 당황하면서도 안심한 얼굴로 “그, 그렇죠? 제가 요즘 귀가 어두워 가지고! 헛것이 자꾸 들립니다, 아이구. 찬물을 마시고 와야겠네요!”라며 서둘러 홀을 나섰다. 아마 아이들 입단속을 시키러 나가는 것일 테다.

성주가 나가고 나서 리온이 슬쩍 문을 열어 문틈으로 성주가 사라진 걸 확인한 다음 계속 그가 언제 돌아오는지 확인하면서 우리 쪽에 대고 말했다.

“큰일이네요.”

“뭐.”

“대공 전하의 존재가 알려지면 더 큰일 날 겁니다.”

“뭐어.”

“왜 대공 전하의 편을 드신 겁니까?”

내가 입을 열려는데 리온이 경고했다.

“뭐, 라고는 하지 마세요.”

홀을 바라보자 부하들이 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자에 바로 앉은 이도, 테이블에 걸터앉은 이도, 창턱에 한 다리를 올리고 앉아 연인에게 보낼 부적을 깎던 이도, 지루하게 목걸이를 빙빙 돌리고 있던 이도, 모두 다 나를 빤히 보면서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사실은 이게 제일 궁금했군. 당연한 일이었다. 혀가 빠지게 변방을 누비며 마물을 잡고 또 잡는 중이었으니까. 나는 기사단이 일을 무리해서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기사단을 일곱으로 나누면서까지 일을 진행했으니 다들 불안감이 가슴에 서렸을 것이다.

“다들 알음알음으로 알 테지만 내게 상속권 문제가 생겼다. 내 친척들이 나의 상속권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사람은 세 명 정도야. 그 셋은 나보다 먼저 왕을 알현해서 상속권에 대해 재고를 요청했지.”

“…….”

“마치, 우리가 그의 백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말에 부하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스트레드는 자유를 위해 모인 집단이었다. 나를 주인으로 여기지만 그들은 머물거나 떠나는 걸 자유롭게 결정한다. 하스트레드의 기사와 그들의 가족들은 누군가의 소유가 되지 않기를 선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건 모욕이었다.

“죽여 버리겠어.”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쯧.” 리온이 경고조로 혀를 차자 그 목소리는 곧 사그라들었지만 그 기분만은 홀 안의 공기 속에 너울거리고 있었다. 괜한 소리를 했나. 잠시 생각했지만 대공의 편을 든 이유를 설명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상속권 때문에 대공 전하의 지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정도로 해 두지. 자세한 이야기는 해 줄 수 없다는 점, 다들 이해할 거고.”

내가 말을 마무리 짓자 대체로는 납득이 된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리온은 애매모호한 표정이었고 크라이스는 얼굴을 아예 찡그리고 있었다. 크라이스야 집안이 친왕파라 저런다는 걸 잘 알지만 리온이 왜 저러는지는 그 속내를 파악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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