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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21화 (20/94)

<☆21ㅡ>깜

하지만 실리는 미안해한다. 그리고 나는 나를 구한 유일한 사람이 내게 죄책감을 가지는 걸 별로 보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아프다는 이야기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

“약을 드셔야겠습니다.”

“약이든 사혈이든 뭐든 좋은데 실리한테는 말하지 마.”

내 말에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그들의 주인은 실리이지 내가 아니니까. 나는 혀를 차고 눈을 감았다. 내 짜증이 머리끝까지 닿은 것같이 보이자 시녀가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걸었다.

“전하, 따뜻한 수프를 대령할까요?”

그 시녀는 시녀들 중에 유일하게 어린 시녀로 올해 열 살인 로즈메리였다. 내 또래가 없는 것을 신경 쓴 실리가 마음 써서 데려온 시녀로 어느 백작의 친척이라고 했다. 작위는 없어도 나름대로 귀족 혈통이라 그런지 피부가 하얗고 발음도 귀족 억양이었다. 로즈메리는 내 전용 시녀로 내게는 전용 시녀와 시종이 둘 다 있었다. 실리가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게 남성과 여성 시중이 둘 다 필요하다고 보았고 나와 비슷한 또래의 두 명을 붙여 놓았다. 나로서는 아이 취급받는 것 같아 별로였지만 사람들은 실리의 배려가 하늘에 닿은 수준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아니면 포도주를 데워 올까요?”

시종인 테인이 물었다.

데운 포도주가 더 끌렸다. 이스트럼의 가정부인 루스 베르트는 데운 포도주를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다. 그녀가 만든 데운 포도주는 달콤하고 계피 향이 났다. 늘 마시고 나면 잠이 왔고 자고 일어나면 몸은 가뿐해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  “아가씨도 이걸 좋아하셨죠.”

“주인님. 주인님이라고 해야지, 베르트. 실리는 하스트레드의 공작이야.”

“네, 네, 주인님이시죠, 이제. 하지만 저는 그분이 태어났을 때부터 봐 왔는 걸요.”  ]

상냥하게 웃으면서 베르트가 내어 주는 데운 포도주는 실리가 어릴 때 좋아하던 것이라고 했다. 성검사가 된 실리지만 정작 그녀는 감기에 잘 걸리는 편이었다며 데운 포도주를 자주 마셨다고 베르트는 말했었다. 나는 그녀가 어린 실리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게 좋았다. 내가 모르는 어린 실리. 내 나이 때 실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나도 실리처럼 성장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착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  “실리는 나와는 달리 건강하잖아. 성검사고.”

“아가씨는 물론 건강하시죠. 강철처럼요. 하지만 강철도 무리하면 상해요, 전하.”  ]

실리는 무리하는 걸까.

베르트가 만들었다는 데운 포도주를 홀짝거리면서 모두를 내보내고 혼자 생각했다. 2년 동안 한 번도 수도나 하스트레드에 못 돌아오는 게 일반적인 상황인 걸까. 나를 구하려다 삼촌의 미움이라도 산 거면 어쩌지. 그래서 함정에 빠진 거면….

이런 생각 하지 말아야지.

쓸모없는 생각이다. 그녀가 함정에 빠진 거면? 내가 구하러 달려라도 갈 수 있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녀의 무사를 기도하는 것뿐이다.

***

꿈을 꿨다. 현실과는 조금 다른 꿈이었다.

그녀가 출정하기 며칠 전, 그녀는 나를 데리고 옌선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의상점에 갔다. 라르투르 의상점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의상점 주인의 이름이 라르투르였다. 옌선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곳답게 규모가 엄청났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건물 3층인 데다 엄청나게 컸고 1층은 모조리 다 유리로 벽을 대신해 안쪽의 상품을 진열해 두었다. 진열해 둔 옷들은 여성복 반, 남성복 반이었고 모두 다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건물은 우아한 원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손님을 가려서 받는 것 같았다. 어떤 손님들은 1층의 진열창이 있는 매장에서 물건을 골랐고 어떤 손님들은 안쪽의 정원이 있는 별도의 객실에서 물건을 골랐다. 안쪽의 정원을 감싸듯이 배치된 건물은 카드의 스페이드 모양처럼 장식적인 원형을 이루고 있어 무척 아름다웠다.

“건물이 정말 예쁘죠?”

동행했던 소피가 물어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피가 내 귓가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원래는 모 백작 부인의 거처였는데 사치를 너무 하시다가 타운하우스를 라르투르에게 뺏기셨어요. 그래서 라르투르가 자기 가게에 맞게 조금 바꾼 거예요.”

그러고 보니.

나는 그제야 이 거대한 옷 가게가 진열창과 몇 가지를 제외하면 사리안 가문의 타운하우스, 이스트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트럼만큼이나 아름다운 타운하우스였다. 내가 이스트럼과 비슷하다고 하자 소피가 “눈썰미도 좋으시지.”라며 웃었다.

“같은 건축가가 지었어요. 귀족들은 선호하는 건축가가 다 거기서 거기니까요.”

“유행하면 죄다 우르르 몰려가죠.”라고 소피가 이죽거리는 사이 옷 가게의 직원이 우리를 마중 나왔다. 마차 앞에 옷 가게의 직원들이 죽 늘어서고 나서야 나는 실리와 함께 마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공작 각하.”

중년의 여성, 하지만 옷을 무척 잘 입었고 외모도 아름답게 꾸민 여성이 양손을 짝 소리가 나게 맞대며 실리를 맞았다.

“트레이시를 잊으신 줄 알았사와요.”

“라르투르 여사, 오랜만이야.”

“트레이시라고 부르셔요, 라르투르는 무슨.”

“2년 만인가?”

“3년 8개월 만이어요, 섭섭하게.”

아.

실리가 식어 빠진 목소리로 신음했다. 라르투르는 녹을 것 같은 애교를 부리고 있어서 나는 좀 당황했다. 여성이 여성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애교를 부리나?

“인사 드리지. 이르시아스 대공 전하시다.”

실리가 나를 깍듯한 태도로 소개했다. 라르투르가 “어머!” 하고 너무나 반가워하더니 내게 우아하게 절했다.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실리가 “전하, 일어나라 해 주십시오.”라고 속삭였다. 그제야 나는 내가 배웠던 예법들이 생각났다. 왕궁에서는 칼같이 잘 지켰는데 옷 가게 앞이라 예법을 지킬 곳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일어나라, 라르투르.”

“황공하옵니다, 전하.”

나의 당혹스러움을 알았는지 실리가 적절하게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라르투르에게 손을 내밀어 옷 가게의 주인을 에스코트하면서 “전하께서 그대의 옷을 보시고자 하셔서 모시고 왔지.”라고 말을 꺼냈고 라르투르는 소녀처럼 기뻐했다.

그리고 우리는 라르투르의 옷 가게를 헤집고 다녔다. 나는 옷을 골라 본 적이 없었다. 생애 처음 하는 일은 낯설었다. 실리도 낯설어하는 것 같았다. 뭘 사야 되느냐고 묻자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그냥 마음에 드시는 걸로….”라며 말끝을 흐렸다. 결국 소피가 나와 그녀의 옷을 몇 벌씩 골라 주었다.

“나는 필요 없다니깐.”

“필요가 없긴요. 수도에 오신 김에 얼굴이라도 비추셔야 할 가문이 몇 갠데요.”

“몇 개인데?”

실리가 묻자 소피가 금붕어처럼 뻐끔거렸다. 실리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한마디 했다.

“너, 잘 모르면서 리온이 하는 말 그냥 따라 하는 거지?”

“티 났습니까?”

“엄청.”

소피가 고개를 푹 숙이자 실리가 웃었다. 그녀는 “어쨌든 얼굴도장이라도 찍어야 할 파티가 몇 개 있긴 해.”라며 소피를 달랬다. 그때 한 직원이 와서 실리에게 나붓하게 절하고는 “각하.” 하고 싱긋 웃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그다음 일을 예상하지 못했었다.

“대공 전하께서 참으로 외모가 천지개벽할 듯 아름다우십니다.”

“아, 뭐.”

실리는 내 외모에 대한 과한 칭찬을 떨떠름하게 받았다. 천지개벽이라니 과해도 너무 과하다 싶었던 것 같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뭐라는 거야.’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할 지경이었다.

“각하. 저희 라르투르의 의상을 전하께 소개 올려도 괜찮을런지요?”

그때만 해도 나는 실리가 내 보호자라서 그녀에게 물어보나 했고 실리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실리는 “그래, 뭐.”라고 중얼거렸고 나는 그대로 납치당했다.

그 상태로 라르투르의 모든 장소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내 나이 또래를 위한 옷은 물론이고 더 나이 많은 사람들의 옷까지 다 입어 봐야 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화를 내고 싶어도

“오오, 이렇게 아름다우시다니.”

“제가 이 모습을 보려고 이 옷을 만들었나 봅니다.”

“아아, 신이여 감사합니다. 저에게 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말도 안 되는 과찬과 경탄을 내뱉는 걸 보고 있자면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누구는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누구는 커튼을 잡은 채 바닥으로 미끄러지는 등 다들 너무나 연극적인데 진심이라는 게 무서웠다.

“리, 나 힘들어.”

수십 벌인지 수백 벌인지를 갈아입다가 한마디 했다. 실리의 ‘실’자는 너무 힘들어서 내 입 안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리, 라고만 불렀는데도 실리는 나를 돌아보았다. 내 안색을 보더니 그녀는 아아, 하고 멋쩍게 웃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아름다우셔서 넋을 놓고 바라만 봤네요.”

그녀의 옆에 있는 소피가 헉, 하고 정신을 차렸다.

“어머, 진짜 진짜 잘생기셨네요.”

“내 얼굴을 처음 보는 것처럼 말하지 마, 소피.”

“아니, 아니, 물론 저는 전하의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렴요. 그런데, 아, 여기서 옷을 제대로 입으시니까… 와…. 아주 그냥 기품이 철철… 와…. 아, 역시 라르투르라서 그런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라르투르 옷이 훌륭해서라고 말하는 소피를 물끄러미 쳐다봤더니 그녀가 과장되게 손사래를 쳤다.

“아이, 전하. 당연히 전하의 얼굴은 고우시고도 훌륭하시고도….”

“그만둬.”

무슨 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럴까요?”

소피가 활짝 웃더니 실리의 옷을 고르려고 들었다. 몇 벌 골랐다. 실리가 나를 길고 안락한 소파에 앉히고 괜찮냐며 안색을 살피는 사이, 그 눈 깜짝할 사이에 소피는 드레스를 몇 벌 팔에 걸치고 나타나서는 실리에게 입어 보라고 종용했다. 실리는 내가 걱정되고 또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내가 반나절이 넘게 옷을 갈아입는 동안 한 벌도 옷을 입어 보지 않은 실리가 신경 쓰였다. 그녀는 출정을 앞두고 있는데 이런 데서 나를 구경하는 데 시간을 허비해도 괜찮은 것이었을까.

내 불편함을 읽었는지 실리가 “그래, 뭐, 파티에 가긴 해야 하니까.”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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