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배의 꽃-20화 (19/94)

<☆20ㅡ>깜

[  “세 가지다. 첫째, 자네에게 공작 작위를 내리겠다. 이로써, 하스트레드와 그로스랜은 ‘세실리아 지 사리안’의 종신 계약에 동의하게 된다. 즉 자네가 죽을 때까지 하스트레드는 그로스랜과 계약 상태인 거지. 급여와 급여 인상률은 일리드와 계약했던 그대로 하고.”

“…….”

“둘째, 세실리아 지 사리안, 하스트레드 공작은 이든 그로스랜과 약혼한다.”

“예에에?”

“둘은 약혼하고 또한 결혼한다. 자네들이 어떤 결혼 생활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어. 서로 다른 정부를 만들어 놀아나든 말든 마음대로 해. 단, 둘은 이혼하지 못한다.”

“아니, 그건 저에게만 하실 말씀이 아니고….”

“셋째, 세실리아 지 사리안, 하스트레드 공작은 이든 그로스랜의 보증인이 된다.그의 모든 법적 활동의 보증인으로서 연대 책임을 진다.”  ]

중재안 중 세 번째가 핵심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든이 무슨 짓인가를 벌인다면 그걸 빌미로 하스트레드까지 몰수할 셈이다. 이건 함정이다. 거절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 아는데도, 어떻게든 거절을 할 수 있음에도 그 후의 이든이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이든이 다른 사람 집 마구간에 있었더라면 단호히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 집 마구간에서 발견되었다. 참혹한 상태로. 식사를 못 해서 삐쩍 마르고 씻지 못해서 더러운 상태로. 그의 몸에 있던 수많은 채찍 자국들은 어쩌면 우리 집 하인들이 남긴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그에게 갚아야 할 죄가 있다.

그래서 거절하지 못했다.

내가 그리하겠노라고 말하자 왕이 이든을 데려오라고 말하며 한마디 했다.

[  “일리는 딸을 똑똑하게는 키웠는데 야무지게는 못 키웠군.”  ]

그 순간은 진짜 연초가 고팠다. 미친 듯이. 그때 생각을 하자 다시 연초가 당겨서 곰방대를 잡아 입에 물며 서신을 내려다보았다. 서신에는 이든의 생활이 자세히 쓰여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로는 늘 똑같은 말.

[  답장 기다릴게, 사랑해.

당신의 약혼자, 이든.  ]

사랑은 무슨….

머리가 아프다.

♡  네 번째 뒷장. 귀환  ♡

실리가 돌아온 것은 그녀와 헤어진 뒤 2년 반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나는 서신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써 보냈다. 사실은 매일 보내고 싶었지만 실리가 귀찮아할 것 같았다. 실리의 답장은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달에 한 번 정도 오고는 했다. 여러 가지를 자세하게 써 보내는 나와는 달리 그녀의 답장은 아주 담백했다.

날씨는 좋고, 자신은 건강하며, 기사단은 어디로 이동했다는 이야기였다. 다친 사람은 없고, 마수는 일망타진했다.

이 내용이 조금씩 단어만 바뀌어서 오고 있었다. 가끔 내 편지에 대한 대꾸도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시는 것도 좋지만 몸도 돌보세요, 같은 말들. 그런 편지가 올 때마다 나는 실감하고는 했다.

내 선생들은 다 간자들이구나.

내가 공부하다 쓰러지면 실리의 서신에는 어김없이 몸을 돌보라는 잔소리가 적혀 있었다. 무심한 듯 적힌 한마디지만 쓰러지기만 하면 그 말이 나오니 정보의 출처는 뻔했다. 하긴 모두가 다 첩자들이었다. 나는 실리의 이스트럼과 하스트레드에서 머물렀고 실리의 고용인들이 나를 돌보고 있었으니까.

그게 불쾌하다기보다는 안심되었다. 나는 실리의 요람에 머무는 기분이었다. 실리는 어느 때라도 나의 소식을 보고받고 있다. 그녀는 아닌 척하지만 사실은 아주 주의 깊게 나를 살피고 있고 내 안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괜히 기침만 해도 당장 다음 서신에는 날이 얄궂은 듯하니 옷차림에 신경 쓰라는 말 한마디가 보태어진 답신이 날아들었다. 그녀는 나를 결코 버려두고 있지 않았다.

“이르시아스 대공 전하.”

나는 대공이 되었다. 이르시아스 대공. 이르시아스란 고대에 나라에 아주 충성했던 사람의 이름이다. 그는 위인도 아니었고 뛰어난 자도 아니었으나 충성심만은 대단하여서 충정의 대명사로 많이 쓰였다. 그 이르시아스가 나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전하께옵서는 유례없는 학업의 성취를 보이고 계십니다. 그러니 지금 왕립 학교에 입학하셔도 충분히, 아니 누구보다 더 훌륭한 성과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나의 선생들은 내게 왕립 학교행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라는 건 안다. 나는 열세 살이고 이미 늦었다. 왕립 학교는 상류 사회에 뜻이 있는 자라면 당연히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대공으로 살아가야 하는 내게는 피할 수 없는 절차지만 내키지 않았다.

왕립 학교를 다녀 본 적은 없지만 그곳이 기숙 학교라는 건 안다. 기숙 학교에 다니게 되면 실리와는 더 멀어지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지금 나는 최소한 여기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고 그녀는 나를 신경 쓰고 있지만 왕립 학교에 가면 그녀가 나를 신경 쓸까?

겨울이 오면서 아침마다 서리가 내리고 있다. 하스트레드는 따뜻한 지방이 아니지만 실리가 있는 곳은 하스트레드보다 더 북쪽이다. 작년 겨울, 실리는 서신에 모든 게 잘 돌아가는 것처럼 썼지만 실제로 전해지는 소식은 그렇지 않았다. 많은 보급로가 눈 때문에 막혔고 그 때문에 외곽에서 마물과 싸우던 병사와 기사들이 마물이 아닌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 간 것이다. 하스트레드 기사단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실리의 능력 덕분이지 신의 가호나 보급 덕분은 아니라고 했다.

[  “실리는 괜찮지?”  ]

내가 이스트럼의 집사, 라이즌에게 물었을 때 그는 나 때문에 고단해진 얼굴을 감추지 않은 채로 있다가 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전쟁 중에 부모를 잃어 고아가 되었다는 그는 묘하게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  “죽음은 한순간에 다가오는 겁니다. 괜찮다는 보장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무리 성검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

라이즌이 그렇게 말했을 때는 어두운 밤이었다. 저택 안은 주황색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나는 왠지 라이즌에게 말을 시켜 놓고선 그가 아닌 그의 뒤에 있는 창을 보고 있었다. 이스트럼의 창들은 하나같이 다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대체로 북쪽에서 직접 조달해 왔다는 아름다운 모양의 창들이라고 했다. 복잡한 장식 틀이 유리를 아름답게 꾸며 주는 가운데 나무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이 어쩐지 불길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괜한 기분을 지우려고 애쓰면서 라이즌에게로 시선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왠지 모르게 시선을 움직일 수 없었다.

실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겠지. 나도 알지만 그래도 내게는 지위와 재산이 있다.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녀는 고아이고 나는 그녀의 약혼자다.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 될 사람.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은 가까이 있어야 한다. 멀리 있으면 죽어도 모르니까.

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몰랐던 것처럼.

“대공 전하?”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화병에 꽃을 꽂고 있던 시녀가 눈치 빠르게 다가왔다.

“또 머리가 아프셔요?”

“…….”

“집사님!”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약혼녀인 실리는 유명한 기사, 그것도 성검사인데 나는 툭하면 아팠다. 아무리 건강해지려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다.

시녀가 뛰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말릴까 말까 하다 그만두었다. 머리는 아팠다. 그리고 몸도 처지고 있었다. 푹신한 의자에 앉은 채 라이즌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라이즌이 평소와는 다르게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그가 얼마나 빠르게 달렸는지 시녀는 아직 그의 곁에 당도도 못 한 상태였다.

“대공 전하, 실례하겠습니다.”

통보와 함께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이마를 덮었다.

“물수건 만들어 와!”

라이즌의 말에 달려오던 시녀가 방향을 바꿔 다시 어딘가로 달려갔다.

“오르센 선생님을 모셔 와!”

라이즌이 소리치자 시종이 황급히 뛰쳐나갔다. 곧 멀리서 마차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시종이 마부와 함께 하스트레드 문장이 새겨져 있는 마차를 타고 옌선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 중 한 명인 오르센을 데리러 간 것이다. 오르센은 명망 있는 의사지만 평민이라 하스트레드 문장이 새겨진 마차로 데려가면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날아오곤 했다. 그는 자신이 받는 보수보다 그 마차 마중을 더 기뻐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언제부터 열이 나셨습니까?”

라이즌이 물어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언제부터 컨디션이 안 좋았을까. 아마 한참 되었을 것이다. 납치되고 나서 한두 달 뒤부터? 이미 그때부터 내 몸은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1년쯤 지났을 때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나은 상태인데,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 몸은 어딘가 망가졌다. 그걸 나는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비뚤어져 보이겠지. 아니, 그건 둘째 치고 또 이 간자들은 실리에게 전달하겠지. 실리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지난밤에 좀 춥게 잤나 봐. 이불이라도 찼나 보지.”

실리와 같이 있었던 시간은 얼마 안 되지만 나는 그 시간 내내 그녀의 눈에서 죄책감을 읽었다. 그녀는 늘 나를 죄책감을 가지고 대했다. 그녀의 부친이 나를 가둬 두었었다는 데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녀는 어쩔 줄 모르는 상태가 되어 나를 구하고도 미안하고 죄스러운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녀의 그 죄책감이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로 순진하게 느껴졌는데 그녀의 부친은 나를 납치한 사람도 아니고 나를 때린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부친, 선대 하스트레드 공작이 나에게 잘해 준 사람인가? 물론 절대 아니지. 하지만 그는 그저 나의 그 상태를 유지시킨 사람일 뿐이지, 나를 더 안 좋게 만든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별 원한이 없다. 정확히는 그보다 앞서 원한을 가질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에게 나눠 줄 원한 따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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