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ㅡ>깜
소피는 리온이 자신을 끌고 나가려 하자 의아한 듯한 얼굴을 했지만 순순히 움직였다. 아마 내 표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머릿속이 이미 과거에 반쯤 잠겨 있었기에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은가 보다, 여긴 것 같았다.
둘이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
2년 전.
나는 지하에 계실 아버지께서 아시면 그곳에서도 펄쩍 뛰실 만한 일을 저질렀다.
이든을 왕궁으로 보낸 날 밤, 나는 신전에 가서 고해를 했다. ‘이든’이라는 이름의 왕족을 데려온 것, 그리고 그가 지금 왕의 곁에 있다는 것. 두 가지를 고해하고 고해실을 나왔다. 지은 죄야 많았지만 나는 사실 고해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 신전이 누구를 위해 움직이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 신전은 대표적인 반왕파 대신관 라스나티프의 손 안에 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내 고해는 그녀의 귀에 들어갔다. 고해의 특성상 그녀는 아는 척도 하지 못하고 내게 묻지도 못한 채 다음 날 나의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해 댔다. 스파이, 마법, 신력, 무력까지 모든 것을 동원했고, 나는 순순히 그녀의 그런 발악에 넘어가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 대부분을 얻어 냈다. 물론 내가 허락하는 선까지만이었지만.
그녀는 알게 되었다. 죽었다던 왕세자는 현재 탑에 갇혀 있으며 목숨이 오늘내일한다는 것. 마력까지 가지고 있는 정통성을 보유한 왕세자. 반왕파인 그녀가 놓칠 리 만무했다. 그녀는 반왕파 라인에 이 다시없을 정보를 나눠 주었고 물밑에서 난리가 났다. 사흘 만에 왕은 나를 불렀다.
[ “왜 그랬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군.” ]
왕의 하문에 내가 웃자 그가 ‘웃지 마, 정들어.’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이미 아는 눈치였고 나는 오리발 내밀려고 했던 작전을 포기했다. 괜한 짓으로 왕의 드높은 자존심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으니까.
[ “자네는 짐과 반목할 생각인가?”
“아닙니다, 전하.”
“하스트레드가 공작이라고 해도 고작 1대밖에 안 된 작위야. 짐이 그 작위를 몰수하는 게 어려울 거 같나?” ]
왕이 으르렁거렸다. 나는 가능한 한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려 노력하면서 대답했다.
[ “아닙니다, 전하.”
“그런데? 왜 감히 짐의 뒤통수를 쳤지?” ]
으르렁거리는 것도 뒤통수를 쳤다고 말하는 것도 그는 왠지 기분이 상한 것 같지 않았다. 도리어 약간 상쾌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의외라고는 생각했다. 기분이 많이 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를 아주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건넌 다리였다. 위험한 다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든이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 “나랑 썩기엔 너무 아까운 검이잖아.” ]
평생을 뒤숭숭한 기분으로 사느니 그냥 옳은 걸 해 버리는 게 속 편할 거 같아서 한 짓이었다.
[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 저는 전하와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뭐?”
“저는 하스트레드의 주인입니다. 하스트레드는 주인이 바뀌었고 전하께옵서는, 매우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새 주인과 계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스트레드는 자유롭고 저 또한 자유롭습니다.”
“…하, 지금 말장난을 하자는 것인가?”
“전하.” ]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웃었던가? 아니면 진지하게 말했던가? 아마 웃었을 것이다. 습관이니까.
[ “전하께옵서는 하스트레드 공작 작위의 주인은 바꾸실 수 있으십니다. 작위의 주인은 전하의 신하니까요. 그러나 하스트레드 기사단의 주인은, 하스트레드의 주인은 저입니다. 하스트레드의 주인을 바꾸실 수는 없으십니다.” ]
내 친척들이 왕의 곁에서 살랑거리고 있는 걸 나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왕이 내 친척들과 나 사이에서 저울질하며 가장 좋은 거래를 가늠해 보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하스트레드는 강력한 기사단이고 다시 말하자면 무척 값비싸다. 왕은 이 기사단을 어떻게 하면 수중에 넣을 수 있을까, 혹시 이번 상속권 분쟁으로 수중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계산하고 있었다. 나도 그 정도는 안다. 아무리 정치에 관심이 없고 검이나 휘두르던 삶을 살고 있었다 하더라도 공작의 후계자로 살아왔으니까.
[ “실리, 짐은 하스트레드를 존중한다. 당연히 하스트레드가 그대를 주인으로 여긴다면 짐 또한 그것을 허할 것이다.” ]
그가 허하고 불허하고 할 문제가 아니라고 분명히 했지만 그는 자신이 허락할 문제라고 말하고 싶어 했다. 나는 말없이 웃었다. 내가 동의하지 않자 그는 진심으로 기분이 상한 듯했다. 그의 뺨이 불만스럽게 움직였지만 그뿐, 그는 나와 하스트레드의 주인을 정하는 방식에 대해 논쟁하려 들진 않았다.
[ “하지만 하스트레드는 가주의 자리를 두고 서로 입장 차이가 있는 것 같던데.”“없습니다.”
“짐이 아는 것과는 다르군.”
“제가 곧 하스트레드이기 때문에 입장 차이는 애초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전하, 입장 차이가 있다고 여기신다면 저의 하스트레드와 그들이 하스트레드라고 주장하는 집단의 차이를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하시길 원하신다면….” ]
나는 하스트레드를 분열시켜도 상관없다. 어차피 주요 전력은 전부 내게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 말에 왕이 불쾌한 낯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정말 하스트레드가 쪼개져도 괜찮았다. 그러나 왕이 그러라고 한 순간 하스트레드는 분열되고 정예 전력만 남게 될 것이다. 그건 하스트레드의 전력에는 큰 손상을 미치지 않으나 하스트레드의 이름에는 큰 손상이 되고 왕의 군대 사기에는 영향을 준다. 피해를 보는 건 다름 아닌 왕이 된다.
게다가 왕은 그 순간 나의 손을 들어 주지 않은 게 된다. 우리는 좋은 사이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고 나는 다른 나라와 계약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공작 작위가 없다면 이 나라에 내가 얽매일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본질적으로 용병 집단이다. 물론 이 나라에 터전을 이미 두었기 때문에 수많은 것들이 아쉽고 아깝고 소속된 단원이나 관련된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하스트레드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왕이 하스트레드를 가지려고 든다면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소임이다.
하스트레드의 분열은 하스트레드와의 장기 계약이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와 동일한 선상에 있다. 왕은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왕좌의 손잡이를 내려쳤다.
[ “불쾌하군! 감히 짐 앞에서 건방을 떠는가?!” ]
남의 집안싸움을 뒷전에서 이리저리 간섭하며 기사단을 통째로 먹어 치우려고 했던 분이 자존심은 엄청 챙기시네.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게 참 유감이다.
[ “송구합니다.”
“자네를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지켜봐 온 짐 앞에서 감히 ‘다른 나라와 계약할 수도 있다’고 하는 건가?” ]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지켜봐 왔으면서 모든 걸 잃을지도 모르게 둔 건가? 하긴 당신의 주특기 아니던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켜보면서 모든 걸 빼앗는 것’은.
그 순간에는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아무리 나라도 웃기 힘든 순간이라는 게 있다.
[ “그저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전하. 아니면 하스트레드의 주인 자리에 정말 다른 이가 앉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까?”
“…….”
“…….” ]
갑자기 왕이 웃었다.
[ “아니,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짐이 자네 아닌 다른 이를 하스트레드의 주인으로 생각할 턱이 있나. 일리드와 짐의 우정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네.” ]
아, 이제 우정으로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이 되는 건가. 어떻게든 빚을 지워 보겠다는 심산이 눈에 훤히 보였다.
[ “하지만 자네는 여자이고 또 젊고 그러다 보니 공작 작위를 내리는 것에 여러 의견이 갈리는 건 사실이야. 아무리 나라고 해도 모두의 의견을 무시해서야 좋은 왕이라고 할 수 없지. 하여 여러 가지를 감안한 중재안을 제안할까 하네.” ]
말이 중재안이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나도 호기롭게 하스트레드는 그로스랜을 떠날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실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스트레드 기사단의 기사들은 다들 제 식구가 있다. 그리고 기사단에는 기사가 아닌 인력도 대단히 많다. 그들을 다 데리고 어느 나라로 가야 할까. 그리고 기사단의 수많은 딸린 식구들의 생계는 또 다 어떻게 책임져야 할까. 사실은 결코 쉬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스트레드는 중요하다.
실제로 그로스랜에 익숙해져서 다들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3대에 걸쳐 그로스랜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도 그렇고 대부분 내 세대의 사람들은 그로스랜의 말을 모국어로 배웠고 그로스랜의 문화를 모국의 문화로 가지고 있는데 어디를 가든 그로스랜만하겠는가.
왕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노여워하는 것이다.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결정일지 잘 아는데 감히 그걸 내뱉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긴 했다. 우린 떠날 수 있다. 엄청난 데미지를 입겠지만 하스트레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우린 떠날 것이다.
오직 단 하나의 이유. 하스트레드를 지키기 위해서만은, 가능한 일이다.
하스트레드의 기사이기 때문에 가지는 명예가 있고 부가 있다. 안정이 있다. 하스트레드 기사의 식구이기 때문에 가지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자유민이다. 왕조차도 우리를 완전히 함부로 할 수 없다. 귀족들은 평민들을 제 노리개처럼 가지고 놀아도 하스트레드 사람들에게는 그럴 수 없다. 하스트레드 기사단의 사람들은 자유민이기 때문에. 귀족 같은 명예도 부도 없지만 우리에겐 자유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하스트레드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수할 수 있다. 이 자유가 얼마나 드물고 소중한 것인지 잘 알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