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ㅡ>깜
“소신은.”
실리의 얼굴을 보면 못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살렸을까 생각하면. 내가 울면서 그저 지옥에서 삼촌을 저주하겠다는 소리나 하고 있을 때 그녀가 얼마나 팔방으로 뛰어다니며 나를 구하려 노력했을까 생각하면.
“하스트레드에서 살면서 공부나 하다가.”
이건 다 거짓말이다.
“하스트레드에 도움이 되는 인간으로 죽었으면 합니다.”
나는 당연히 삼촌의 왕관을 받아 내야 한다. 그건 그가 나에게 토해 내야 할 빚이니까. 하지만 또한 나는 하스트레드에, 실리에게 진 빚이 있는 셈이다. 나 또한 토해 낼 것이 있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득한 빚이 생겨 버렸다.
그래서 반은 진심이 되어 버린 이야기였다. 내가 삼촌을 바라보며 말하자 삼촌은 내 얼굴을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눈을 깜빡이더니 “…진심 …이렸다?”라고 되물었다.
아,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그가 나의 거짓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지금 나의 진심을 보고 놀란 것이다.
나는 웃었다. 이건 진심으로 말할 수 있다. 나는 하스트레드에, 실리에,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왕이 되기 전에. 이 빚은 꼭 갚아야 하기 때문에.
그러니 진심을 담아 말한다.
“예, 전하. 소신은 하스트레드에 도움이 되는 인간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
“그것이 소신의 바람입니다.”
‘한동안’은.
아, 그래. 삼촌을 대하는 법을 알았다. 일정 부분 진심만 담으면 되는 거구나. 그럼 내 거짓을 진심으로 포장할 수 있다. 내 얼굴을 본 삼촌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가 오른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그 얼굴은 이윽고 실리에게로 움직였다. 실리를 바라보는 왕의 시선에, 실리는 무릎을 꿇어 화답했다.
“그래….”
삼촌, 아니 왕은 당혹스러워하다 턱수염을 엄지손가락으로 세게 몇 번 문지르고는 입을 열었다.
“그리 허락할 수는 없다.”
역시 이렇게 쉽게 되지는 않는가. 내가 눈을 감았을 때였다.
“너는 짐의 조카이다. 대공으로서 나라에 도움이 되어야지, 고작 하스트레드에 도움이 되어서야 되겠느냐. 나라와 짐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느니라.”
“알겠느냐.”라고 묻는 목소리가 아찔하게 멀었다. 안도감이 드는 한편 토할 것 같았다. 자신의 나라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그 말이 역겹고 구토감이 일어서.
나는 실리처럼 무릎을 꿇었다. 어지러워서 눈을 뜰 수가 없어 눈은 감고 있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경, 이든은 많이 피곤했을 것이네. 괜찮다면 경의 타운하우스로 데려가서 좀 쉬게 해 주게나. 이든에게 많은 것이 내려질 테지만 지금은 쉬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으니.”
그는 내가 안도감으로 탈력한 것이라 추측하는 듯했다. 다행이었다. 나는 그의 추측을 교정하지 않고 고개를 더 깊이 숙여 감사함만 표했다.
실리는 나를 어린애처럼 엉덩이를 받쳐 들어 안고 알현실을 나왔다. 누군가에게 안겨서 왕궁 복도를 걷는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누군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해 걷던 복도였다. 조금 전에도 삶이냐 죽음이냐 시험을 받으러 가기 위해 걷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실리에게 안겨 있었다. 실리의 어깨를 감싼 제복에선 희미하게 꽃향기가 났다. 무슨 꽃일까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왜 그랬어.”
내 질문에 실리가 웃었다.
“뭐가 말입니까.”
“왜 날 구했어.”
“…….”
“구할 가치 따윈 없잖아.”
지금 나를 안을 가치가 없는 것처럼.
나는 더럽고 냄새나는데 너는 내가 그럴 때마다 나를 안아서 옮겨 주지. 내가 더럽지 않은 것처럼. 내 냄새를 네 꽃향기로 지우지. 어떤 사람도, 설사 왕조차도, 내 부모의 원수도, 나를 죽이지 못하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너는 나를 지켜 주지. 나에겐 사실 그럴 가치가 없는데.
“확실히 전하 말씀이 맞군요.”
실리가 속삭였다. 왕의 말이 맞다는 말에 울컥해서 “맞기는 뭐가 맞아.”라고 내가 중얼거리자 실리의 웃음이 조금 커졌다.
“성격이 직설적이시라는 거 말입니다.”
“안 그래. 변했어.”
“제 검을 가져가라면서요.”
“…….”
“제 검을 가져가려면 전하부터 구해야지 별수 있겠습니까.”
실리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하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왜 나를 구했는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본궁을 나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댄 채 졸고 있었다. 잠이 계속 왔다. 거의 기절하는 것처럼 잤다. 생각해 보면 탑에 있는 내내 자지 못했다. 복수하겠노라고 이를 가느라 자지 못하고 그녀에게 미안해서 우느라 잘 생각도 못 했다. 모든 게 일단락되자 몸이 부서질 것처럼 피곤했다. 그녀에게 안겨 자는데도 심장이 지끈거릴 정도로 아팠다.
그녀가 나를 안은 채 마차에 오르며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말했다.
“오르센 씨를 이스트럼으로 불러.”
“어디가… 좋… 십….”
목소리가 멀어졌다.
“열… 있….”
더 멀어진다.
그리고 까무룩, 나는 정신을 완전히 잃었던 것 같다.
그다음부터는 정신이 없었다. 누군가가 내 몸을 만지는 것 같았다. 의사라는 걸 알 수 있었던 건 의사 특유의 냄새와 조심스러운 손길 때문이다. 의사는 내 몸을 만지고 나에게 무언가 처치를 했다. 내 겨드랑이 사이에 차가운 물주머니를 넣어 주고 혀 아래에 달콤한 향이 나는 액체를 넣어 머금게 했다. 물약은 어릴 때 몇 번 먹어 봤기 때문에 먹는 게 힘들진 않았다.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지만 정작 눈은 뜰 수가 없었다. 눈꺼풀 위에 요정이 누름돌이라도 올려 둔 것 같았다. 귀는 잘 들리는데 눈을 뜰 수가 없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말도 못 하고 눈도 못 뜨고 귀로 멍하니 세상의 소리를 듣기만 하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평소라면 무척 답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편안했다.
“대공 작위를 받으시는 것까지야 혼사가 결정된 이상 당연한 일이었습니다만 생각보다 대공 전하의 재산 규모가 커서 놀랐습니다.”
소피의 목소리다. 내 재산의 규모? 나에게 재산이라는 게 있었어? 멍하니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실리가 불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너는 전하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죄송합니다.”
“…….”
“하지만 주군, 이제 대공 전하께옵서도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수도가 다 이스트럼 같은 곳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지, 솔직히 이스트럼 같은 곳은 이스트럼밖에 없지요. 벌써 대공 전하 앞으로 초대장들이 쏟아지고 있는데요. 이제 사교계에 등장하실 테고 심지어 주군의 배우자가 되실 겁니다. 두 분은 한배를 타셨다고요. 전하께서 처신을 잘못하시면 주군께서도 위험해지십니다.”
“소피, 아무리 정신을 잃으셨다지만 전하 앞이다. 그만 좀 해.”
“전하도 아셔야 한다니까요. 그냥 열한 살짜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주군.”
“네 아이에게도 이럴 건가?”
실리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소피에게 아이가 있었구나. 하긴, 30대쯤 되어 보였으니 나만 한 아이가 있고도 남았다. 그럼에도 의외로 느껴졌던 것은 그녀가 사회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있는데 가정을 돌보지 않고 내내 내게 검술을 가르치고 실리의 옆에 머물 수 있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피가 고함을 질렀다.
“제 아이가 저 상황이면 저는 훨씬 엄하게 대했을 겁니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요!”
목숨이 걸린 일….
내 목숨이 걸린 일을 가지고 두 사람은 언쟁을 하고 있었다. 하…. 실리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 한숨을 깊게 쉬더니 “폴을 입에 담은 건 내가 사과하지.”라며 한 발 물러섰다. 폴. 나는 그 이름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폴. 소피의 아들 이름은 폴이구나.
“왜 마음이 약해지십니까, 주군.”
소피의 목소리도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안타까움과 함께 걱정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약해지지 않았어.”
“저 대공 전하를 위해서 하스트레드를 거시다니, 리온이 알면 정말 화낼 겁니다.”
“…….”
리온은 누굴까.
모르는 이름. 리온. 실리에게 화를 낼 사람. 나 때문에 실리에게 화를 낼 사람. 그리고 실리는 나 때문에 하스트레드를 걸었다. 나는 또 하나를 알게 되었다.
“저희 모두는 주군을 따릅니다. 그리고….”
“그만.”
실리가 소피의 말을 끊었다.
“하스트레드를 걸었다는 건 너의 지나친 말이다, 소피. 내가 건 건 하스트레드의 계약이지, 하스트레드가 아니었어. 하스트레드는 내 것이다. 그 누구도 내게서 가져갈 수 없어. 너희 모두가 하스트레드를 떠나도 그건 내 것이다.”
“…….”
“내가 곧 하스트레드니까.”
“사죄 올립니다.”
“나가서 반성하도록 해.”
곧 문소리가 들렸다. 소피가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소피와 같이 실리도 나갔나 했다. 그러자 나 때문에 저런 소리를 듣는 실리에게 미안하고, 그녀가 건 하스트레드의 계약이 뭔지 궁금하면서도 혼자 남겨진 게 조금 외로워졌다.
바람이 불었다. 어딘가에서 미풍이 불어와 내 이마 위를 덮은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기분이 좋은 것 같으면서도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한 감각 속에서 조금 외로워하고 있을 때였다.
손 하나가 내 머리카락을 슬쩍 빗어 올려 주었다. 싸한 향이 내 머리 위를 슬쩍 감돌고 지나갔다. 나는 이 냄새를 안다. 실리가 피우는 연초의 향이다.
실리가 내 옆에 있었다. 바람과 함께 나를 어루만지면서.
실리.
그녀를 부르고 싶었지만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체라도 된 것처럼. 어쩌면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나에게 있다는 그 생각보다 많은 재산을 실리에게 남기고 싶은데.
약혼녀는 부인이 아니니까 재산을 못 받지 않나….
눈을 뜨면 꼭 그녀를 내 상속인으로 지정해 놔야지. 그거라도 받을 수 있게. 나를 만나서 조금이라도, 뭐라도 이득이 있었다고 그녀가 생각할 수 있게.
“좋은 꿈 꾸시기 바랍니다, 전하.”
실리의 손이 부드럽게 멀어져 갔다. 하지만 그녀의 연초 향은 여전히 방을 떠돌고 있었다. 다정한 유령처럼 내 머리 위를 맴돌고 있어서 나는 조금도 외롭지 않게 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