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ㅡ>깜
쇠창살 너머로 해가 뜨고 지는 걸 보고 있었다. 해가 세 번 내 손바닥보다 조금 큰 창문 너머를 지나갔다. 사흘. 사흘 동안 바짝 마른 빵과 약간 신맛이 나는 우유를 먹었다.
사흘째 되는 날. 해가 높이 떠올랐을 때 근위병들이 들어왔다. 그들이 나를 보면서 약간 곤란한 듯 어물어물하다가 조심스럽고도 진중한 태도로 말했다.
“모시겠습니다, 전하.”
오늘 아침만 해도 감시병들은 내게 우유와 마른 빵을 던져 주었었다. 태도가 그토록 좋지 않았었는데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걸까. 이게 좋은 신호일까, 아니면 최악의 신호일까. 목 근처가 서늘했다. 사신의 낫이 내 목을 스르륵, 건드리는 것만 같았다.
사흘 동안 씻지도 못해서 온몸이 지저분하고 불쾌했다. 그래도 결코 주눅 들지 않고 턱을 꼿꼿하게 들고 내 죽음을 맞이하리라고 생각했다. 결코 비겁해지진 않겠어. 약한 모습도 보이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왕궁 복도를 걷는 기분이 몹시 이상하고 낯설었다. 여기에 왔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났다. 대공저에서 살다가 1년에 한두 번 이곳으로 불려 와 시험을 보고는 했던 날들. 그때마다 걸었던 복도.
오랫동안 이 왕궁을 그리워했다. 이곳에 돌아만 온다면 나를 괴롭혔던 모두를 찾아내서 잘근잘근 찢어 죽이리라고 맹세했다. 그때 나는 늘 이 왕궁의 복도와 알현실, 그리고 내가 가끔 머물렀지만 엄연히 나의 것이었던 왕세자 방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분루를 삼키는 밤이 수백 밤이었는데…. 정작 다시 걷게 된 왕궁 복도는 따뜻한 품 같다기 보다는 차가운 검처럼 느껴진다.
아니, 차라리 검이 더 따뜻했어. 이 복도보다는. 탑에 갇히면서 빼앗겼던 내 검이 떠올랐다. 내가 평생 처음 가져 본 내 검이었다. 소피에게 듣기로는 원래 실리의 검이었다고 했다. 실리가 어릴 때 썼던 검. 실리가 그녀의 부친에게 받은 검. 그녀를 성검사로 만든 검. 그 검이 내게 와서 나는 성검사가 되지 못하는 아픔을 위로받았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그 검을 받은 것만으로도 성검사가 못 되어도 괜찮다는 기분이 들었다.
실리는 모를 것이다. 내가 그 검을 받아서 얼마나 기뻤는지.
내가 그 정원의 정자를 나와 달빛을 받으며 홀연히 놓여 있는 그 검을 보았을 때 얼마나 나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었는지.
온전하게 호의로 대해 주는 사람을 만난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아니, 만난 적이 없어서, 나는 그런 사람을 대하는 법을 잊어버렸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실리에게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할 걸 그랬어.
검을 가져가라는 오만한 소리보다는 미안하다는 말이 더 나았을 텐데.
나는 늘 이 모양이다. 인생에 기회가 와도 그걸 잡지 못한다. 내가 왕세자일 때 나는 수많은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게 기회인지도 몰랐고 그저 놀고만 싶어 했다. 수영하고 맛있는 걸 먹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그렇게 해 주는 삼촌을 아버지보다 더 좋아했었다. 내 미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다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오랫동안 다짐했다. 그래서 내가 왕세자, 아니, 왕족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회가 오자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느라고 또 주변을 보지 못하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사과할 기회를 놓쳤다. 실리는 영원히 내게 사과받지 못하겠지. 그녀는 영원히 내게 모욕받은 채일 테고, 모욕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알현실의 앞에 서서 그 문을 바라보았다. 붉고 거대한 문. 사람을 미약하게 보이게 하는 그 거대한 철문은 여러 명의 병사들이 양쪽에서 매달려 밀어야 겨우 열렸다. 내 아버지가 계시던 권위의 가장 높은 곳에서 삼촌이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겠다. 내 시신의 빈 동공에 배신자의 얼굴을 가득 담고 죽어야지.
이를 악물고 알현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오, 짐의 조카가 왔군. 늘 그렇듯 여전히 아름다운 아이야, 안 그런가?”
오랜만에 보는 삼촌이 서 있었다. 그를 보면 화가 나거나 혹은 죽이고 싶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에게 시선이 머문 건 잠깐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움직였다. 그의 앞에서 붉은 머리를 단정히 땋아 올린 실리가 웃고 있었다.
“예, 전하.”
실리는 오늘 평소와는 달리 화장을 좀 한 상태였다. 눈가는 갈색이었고 입술은 평소보다 더 붉었다. 뺨도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뒷걸음칠 뻔한 걸 겨우 참아 냈다. 실리는 예쁜 사람이었고 나도 알고 있었지만….
“전하, 사흘 만에 뵙습니다.”
햇살을 받으며 웃는 그녀는 너무 아름다웠고 나는 냄새나고 더러운 내가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참기 어려워졌다. 귀가 모욕감으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또 그녀는 아름답고 당당하고.
나는 또 더럽고 초라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다. 지금은 도저히 말할 수가 없어. 내가 너무 초라하고 삼촌은 눈앞에 있다. 내 부모를 죽이고 내 자리를 강탈한 그가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이해한다는 듯이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 미소는 마치 조금만 참으라는 듯해 보여서 당혹스러웠다. 왜? 왜 마치 나에게 뒤가 있는 것처럼, 미래가 있는 것같이, 그런 시선을 보내고 있어요?
“나름대로 어울리는 거 같기도 하고.”
삼촌의 말에 실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가당찮다는 태도를 취하자 삼촌이 정말이라며 웃었다. 그 웃음이 참으로 가식적이었던 것이 눈은 웃고 있지 않았고 5년 만에 살아 돌아온 조카를 걱정하는 모습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용서하지 않겠어.
“어떠냐, 조카야.”
삼촌, 아니, 내가 타도해야 할 ‘왕’이 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인자한 척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의 약혼녀를 보는 소감이.”
약혼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악혼녀라니 누구를 말하는…. 설마.
실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자 그녀가 민망한 듯 코끝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반응 전부였다.
그녀가 나의 약혼녀?
…생각해야 한다.
아무런 감정도 느끼면 안 돼. 여기에 삼촌이 있다. 그러니까 생각만 해. 그녀가 내 약혼녀가 되면 무엇이 좋은가. 나에게는 무엇이 이로운가. 또 무엇이 불리한가.
이로운 건, 많다. 그녀는 내가 아는 유일한 ‘좋은 사람’. 그리고 그녀는 이 나라의 최고의 신붓감이기도 하다. 여기서 가장 좋은 건 삼촌이 나를 죄인으로 취급할 생각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가 나를 죄인으로 혹은 사형수로 취급할 생각이었다면 그녀와 결혼하는 걸 허락할 리 없으니 이건 나를 왕족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제스처가 된다. 하지만 단점은….
“이든.”
삼촌이 불러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을 보고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실수였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아까보다 훨씬 더 차가워져 있었다.
“왕이 하문하면 신하는 대답해야 하는 거란다.”
자비로운 척하는 말에 구역질이 났다. 순간 실리의 검에 시선이 닿았다. 저 검을 빼 들어 삼촌의 심장에 꽂아 넣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어림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실리의 검술을 몇 번이고 봤었다. 그녀는 나와 똑같은 동작을 행했지만 사실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소피아조차 그 기본 동작들을 넋 놓고 바라보곤 했었다. 완벽함. 소피아는 그렇게 말했다. 저렇게 완벽하고 단정한 검을 본 적이 없노라고. 그녀는 나를 손쉽게 제압할 것이고 나는 개죽음으로 생을 끝내게 될 것이다.
그럴 수는 없지.
지하에서 통곡하실 내 아버지가, 내가 죽은 줄 알고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원한이 내 가슴에서 불타고 있는데.
나는 천천히 미소를 머금었다. 처음은 어려웠다. 그러나 한 번 머금는 데 성공하자 별거 아니게 되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전하’, 좋아. 그 자리, 내가 지금은 내어 주지.
그러나 당신은 나에게 그 자리를 돌려줘야 할 거야. 피투성이가 되어서.
내 대답에 삼촌은 만족한 듯, 나를 본 이후 처음으로 진심의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리안이 제 아내가 된다면 저에게 크나큰 영광이나.”
삼촌의 앞에서 실리라고 부르고 싶진 않았다. 그건 그녀가 내게 허락한 이름이었다.
“제가 어떤 이름으로 그녀를 맞이할 수 있겠는지요?”
나에게 어떤 자리를 줄 거냐고 묻자 삼촌이 웃음을 터뜨렸다.
“참 당돌한 아이야. 어릴 때도 저렇게 직설적이었네. 성격은 여전하군. 하스트레드에서도 저랬나?”
삼촌의 말에 실리가 눈을 초승달처럼 곱게 접으며 웃었다.
“하스트레드에서는 선하고 다정하신 분으로 저의 고용인들이 무척 좋아하는 객이셨지요.”
“원래는 좀 까다로운 아이였는데.”
“성향은 변하는 법이니까요, 전하.”
실리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실려 있었다. 성향은 변한다. 사람도 변한다. 그렇게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문득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삼촌에게 내가 위험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내가 순종적으로 변했으니 삼촌이 안심해도 좋다고 나를 변호하는 중이었다.
그제야 나는 이 방 안의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사흘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그동안 실리는 나를 살리려고 애썼던 것 같다.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살리려고 애썼고 자신의 결혼을 내걸어서 나를 구했다. 나는 죄인에서 왕족으로 부활했고 거기에는 실리의 힘이 컸음이 분명하다. 실리는 지금 그녀 자신을 담보로 걸고 나를 보증하고 있었다. 삼촌은 나를 꺼림칙하게 여기면서도 나를 인정해 주려 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던 것일까. 그건 도저히 짐작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전하. 저는….”
나는 실리를 바라보았다. 실리의 반짝이는 금안을. 고대부터 금은 아주 소중한 것으로 여겨졌다. 변치 않는 것. 모든 소중한 것들을 가늠하는 기준. 그것이 실리의 눈동자에 맑게 녹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