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깜
크라이스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어떤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지. 그 시선은 노골적으로 나를 확인하고 있었다. 내가 저 말을 믿고 있는지 어떤지. 내 부하가 계속 비겁해지는 걸 보는 게 마음이 좋지 못해서 소피아가 터뜨린 김에 입을 열었다.
“오르소 백작 부인이 살롱에서 그랬다더군. 올해 왕궁에서는 사냥을 못 할지도 모르겠다, 국왕 전하께옵서 무척 심란하신 일이 있으시어서 사냥을 하실 여유가 나실지 알 수 없다… 고. 부모님 금슬이 좋은 모양이야, 크리스.”
“그, 그건,”
“돌아온 왕세자를 죽이면서 사냥을 하는 건 너무 잔인해 보이지. 사냥은 못 하지, 그 경우. 오르소 백작가는 왕세자 전하께서 돌아가실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더군.”
“…….”
“나도 사교계에 친구 정도는 있어.”
사실 깔려 있다.
입장도 특수한 편이다. 기사이면서 여성이라 나는 양쪽 사회에 다 능숙하게 편입해야 했다. 나는 남성들과도 잘 어울리고 여성들과도 잘 어울려야 했다. 코르셋을 착용하고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춤을 우아하게 출 수도 있어야 했고 그 춤을 춘 상대와 결투를 하여 이길 수도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내 인간관계는 깊지는 않아도 얇고 넓은 편에 속했다. 남녀 양쪽으로 친구와 지인이 꽤 많았고 공작가의 후계자인 나를 모두가 특별하게 여겨 주었다.
오르소 백작 부인이 저 말을 뱉었을 때 하스트레드 성으로 온 편지만 일곱 통이었다. 다들 왕의 심란한 일이 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미 내 친척들이 수도 옌선을 휘젓고 다녔으니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누구는 내 심사를 떠보려 했고 누구는 나를 걱정해서 미리 경고를 주려고 했다. 각각 다른 이유로 내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정작 나는 보자마자 오르소 백작 부인이 말하는 왕의 심란한 일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내 상속권 문제 정도로 그 좋아하는 사냥을 마다할 왕이 아니었다. 국왕 부처에게 후사가 없는 것은 그들이 너무 유흥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국왕과 왕비는 유흥이라면 다 좋아했다. 카드놀이, 경마, 연극, 파티, 사냥, 검투 등등. 그런 그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사냥 대회 시즌이다. 왕궁부터 시작해서 온 저택의 사냥터를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는 사냥 대회 시즌에 참석하지 못할 정도의 일은 왕에게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정통성에서 왕을 압도하는 조카를 죽이는 일이라면 그 드문 일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 내 상속권 분쟁 따위로는 어림도 없지만. 내 상속권 분쟁은 아마 활을 쏘면서 듣고도 남을 인사다.
“주군, 저는 단지….”
“집안에 충성을 다했을 뿐이겠지. 알아.”
“…….”
“단지 이번의 경우 상충이 되었다는 게 문제야, 크리스. 너는 집안과 하스트레드의 이익이 충돌하는 경우 하스트레드를 배신할 수 있다는 거지. 이건 큰 문제야.”
크라이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마치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 같았다. 얼굴에 핏기가 사라진 그를 보자 소피아는 제정신이 돌아온 듯 나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그녀가 입을 달싹거렸다. 화가 나서 퍼붓기는 했어도 크라이스를 기사단에서 제명시키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던 그녀였다. 시킨 일은 완벽하게 해도 감정적으로 울컥하면 앞뒤 보지 않는 게 소피아의 흠이었다. 소피아는 종종 그 단점으로 손해를 보고 곤란에 빠졌는데 지금도 바로 그 곤경에 발이 묶인 셈이었다.
“주, 주군. 크, 크리스의 충성심을 아시잖아요. 잠깐 집안에 대한 감정이 커서 실수했을 뿐, 하스트레드를 배신하다니. 그런 건 아닐 겁니다. 주군, 아니어요.”
소피아가 서둘러 배신이라는 단어를 어떻게든 무마해 보려고 했지만 크라이스가 그녀의 말을 막았다.
“예, 제가 하스트레드를 배신했습니다.”
“변명할 말은 있어?”
창틀에 걸친 팔에 머리를 괴고 묻자 크라이스가 눈을 심하게 깜빡거렸다.
“없습니다. 단지, 저는 그게 하스트레드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현 입장에서 가까이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그걸 판단하는 건 너야, 나야?”
“…주군이십니다.”
“그럼 너는 어떤 행위를 한 거지?”
“제가… 월권을 했습니다.”
“그래.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해.”
나는 그렇게만 말하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우리를 실은 마차가 하스트레드의 타운 하우스인 이스트럼에 도착했을 때 크라이스는 내게 깊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이스트럼을 떠났다. 아마 오르소 백작가로 갔겠지. 제 어머니에게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원래 오르소 백작 부인은 입이 가볍기로 유명한데, 문제는 오르소 백작이 부인과 매우 사이가 좋아 비밀 유지를 잘 못 한다는 점이었다. 이건 치명적인 약점이었지만 반대로 오르소 백작은 비열한 종자인데 비해 오르소 백작 부인은 사람이 좋고 후덕해서 백작 부인의 인맥으로 오르소 백작이 출셋길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백작 부인이 반드시 백작의 약점만 되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무엇보다 백작의 예민한 성격과는 달리 백작 부인은 둥글고 유한 성미라 둘은 늘 화합이 잘 이루어졌다. 정확히는 백작 쪽에서 부인을 대단히 의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크라이스는 제 어머니에게 화가 나겠지만 그가 백작 부인에게 화를 내면 백작은 작은아들에게 화를 낼 것이다. 백작은 본디 자신의 부인이 뭘 잘못하든 간에 일단 감싸고 본다고 알려져 있는 대단한 애처가이므로.
“소피.”
이 층으로 같이 올라가며 소피아를 부르자 그녀가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주군.”
“리온에게는 말하지 마. 피곤해진다.”
내 말에 소피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크리스를 용서하실 겁니까?”
“크리스는 정말로 우리를 걱정해서 자신의 가문을 끌어들인 거긴 할 거야. 물론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하고자 하는 면도 컸겠지만. 그러니 그런 마음도 정상 참작은 해 줘야지.”
“그럼…!”
“며칠 시무룩하게 뒀다가 다시 부를 거니까 가만히 있어. 리온은 모르게 하고. 리온은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하스트레드 기사단의 부단장인 리온은 아마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길길이 날뛰면서 크라이스를 제명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는 용서보다는 씨앗을 파내 버려야 한다는 주의니까. 물론 내가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리온도 제 뜻을 꺾겠지만 그다음에 크라이스에게 주어지는 건 아주 교묘하고 끈질긴 괴롭힘일 게 분명했다.
“예, 물론이죠, 주군.”
“그래, 오늘은 푹 쉬어. 내일은 알현을 해야 하니까.”
“예, 예, 주군.”
소피아의 팔을 두어 번 다독이고 방으로 들어왔다. 마침 뜨거운 물이 마련되어 있는 걸 보고 옷을 벗은 뒤 물에 바로 들어갔다. 온몸이 노곤노곤하게 풀리는 것만 같았다. 물 안에서 잠시 리온, 소피아, 크라이스를 생각하다 이든을 떠올렸다.
[ “검은 가져가.” ]
남길 유언이라고는 고작.
[ “나랑 썩기엔 너무 좋은 검이잖아.” ]
기억해 달라는 말도 못 하고, 같이 묻어 달라는 말도 못 하고, 자신의 유해를 거둬 달라는 말도 못 하고.
[ “내겐 너무 아까운 검이었어.” ]
미안하다는 말도 할 수 없는, 모든 걸 빼앗긴 아이.
아아,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아버지는 왜 이런 일을 만드신 걸까. 도대체 내가 뭘 어쩌길 바라셔 가지고 이런 일을 만드신 거지. 그리고 왜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신 거지.
뜨거운 물속으로 천천히 머리를 담갔다. 뒷머리부터 얼굴까지 물에 잠겨 간다. 뜨거움이 머리를 꽉 채워서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을 지경이 될 때까지 나는 물속에 머물렀다.
♡ 세 번째 뒷장. 구원 ♡
왕궁에 오자마자 탑에 갇혔을 때 놀랍지는 않았다. 목이 안 잘린 것만으로도 운이 좋았다. 단지 탑에 갇히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속이 갑갑해졌다. 아주 오랫동안 이것과 다를 바 없이 살아왔지만 최근에는 사람답게 살았다. 좋은 잠자리에서 공부를 하면서 지냈다. 무엇보다도.
짚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실리가 떠올랐다. 하얀 셔츠를 입은 실리. 셔츠의 위쪽 단추를 풀고 있어 늘 실리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볼 수 있었다. 초자연을 기리는 목걸이였지만 단정하면서도 예쁜 목걸이였다. 여성용이었는데 실리의 물건치고는 조금 화려해 보이는 인상이기도 했다. 누구의 것일까. 선물을 받은 것이었을까. 물어보고 싶었는데 결국 끝까지 묻지 못했다.
잘 있어.
고마웠어.
너뿐이야.
그런 말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눈물이 솟아올라서 그냥 울어 버렸다. 이제는 울음을 참을 필요도 없다. 어차피 죽을 텐데 참아서 뭐 해.
내게는 너밖에 없어. 나도 알아,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걸. 하지만 내게는 너밖에 없는 걸. 너는 나를 구했고 내게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제공했지. 내 부모는 나를 시험했을 뿐이었지만 너는 나를 가르쳤지. 너는 내 옆에서 나와 같이 있어 줬어. 내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내게 좋은 분들이었겠지만 내 삶 바깥쪽에 계셔서 나는 닿을 수도 볼 수도 없었어.
내 삶에서 좋은 사람은 너뿐이었어.
내가 너를 배신해서 미안해. 그럼에도 검을 줘서 고마워. 네가 나를 용서해 준 건지 아니면 그냥 나를 동정한 건지 모르겠어. 어느 쪽이든 정말 고마워. 내가, 내가 너의 은혜를 아무것도 갚지 못한 채 죽게 되어서 미안해.
내가… 살아서는 못 갚으니까.
죽어서, 꼭 이 은혜를 갚을게.
눈물이 쏟아졌다. 미안해서 그리고 내 삶이 가여워서 숨을 쉴 틈도 없이 통곡이 흘러나왔다. 소리를 죽여서 울었다. 내 기척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감시병들에게 우는 소리를 들려주고 싶진 않았다.
죽으면,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선조들께 모두 말씀드려서, 꼭 이 은혜를 갚을게. 실리, 내가 너의 상속권을 방해하는 자들을 모두 처단해 줄게. 정말 미안해. 정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