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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13화 (13/94)

<☆13>깜

성을 떠나기 전 성의 태피스트리 앞에 섰다. 다른 성에서는 주로 신화나 조상의 업적 등을 기리는 내용으로 태피스트리를 짜지만 내 아버지는 유명한 연시의 내용으로 태피스트리를 주문하셨다. 아주 아름다운 태피스트리라 우리 성의 명물 중 하나였다. 성에 와서 태피스트리를 보는 사람들마다 감탄하고 몇몇은 자신의 성에도 비슷한 태피스트리를 주문했다. 하지만 하스트레드 같은 태피스트리를 가진 성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책을 좋아하셨지만 가끔 이 태피스트리 앞에 서서 가만히 태피스트리를 감상하시고는 하셨다. 그런 데 일절 관심이 없는 분이었는데 이 태피스트리만큼은 제외였다. 아주 아끼셨다. 시녀들도 하녀들도 이 태피스트리는 유념해서 다룰 정도로.

“공작 부인께서 안목이 참 높으셔요.”

시녀장이 말했다. 뭐?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가져오신 물건마다 얼마나 아름답던지, 감탄했다니까요. 특히 이 태피스트리는…. 다들 눈을 못 뗐었죠.”

“그래도 그분이 가장 아름다웠죠.”

아버지가 주문하신 걸로만 알고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가져오신 태피스트리였구나.

어머니는 아름답고 병약하셨다. 하스트레드에 시집오신 것도 이곳이 약초로 유명하고 그만큼 의학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호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약이라는 약은 다 써 보았지만 타고난 병약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는 어머니. 나를 낳을 때 난산을 겪었고 그 후유증으로 결국 몇 년 못 사셨다는 그분에 대해 나는 거의 들은 바가 없다. 그저 귀족 가문의 정략혼이라고 생각했는데.

부두로 향하면서 어머니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어머니의 초상화를.

나는 어머니를 별로 닮지 않았다. 이목구비를 좀 닮았을까. 붉은 머리와 금안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어머니는 허니블론드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계셨다. 누가 봐도 대단한 미인이었다.

나를 낳은 어머니의 기분은 어떠하셨을까. 사리안 가문에 딸을 낳은 것에 대한 죄스러움이 컸을까, 자식을 본 것에 대한 기쁨이 컸을까. 알 수 없다.

딸로 낳은 자식이 남자처럼 살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또 어떤 기분이실려나. 자랑스러우시려나, 통탄스러우시려나.

“…….”

부두에서 배로 오르려는데 마침 도착한 이든과 마주쳤다. 인사를 간단하게 할 생각이었던 나는 이든의 몰골을 보고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며칠 사이 나와 마주했던 첫날처럼 피골이 상접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먹지도 자지도 못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안쓰러워졌다.

실리.

이든이 입을 달싹거려 나를 불렀다.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전하, 하스트레드가 편안치 못하셨습니까?”

내가 말을 건네며 그의 어깨를 감싸고 배에 오르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치 울 것처럼. 나는 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가만가만 도닥이면서 그가 머물 선실로 안내했다.

“아니, 편안했어.”

“식사를 못 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조금… 조금 그랬어.”

“배에서는 더 힘드실 터인데.”

으으응, 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뱃멀미는 안 하니까.”

어떻게 그걸 알지? 내 얼굴에 의문이 드러났는지 이든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동안 많이 팔려 다니느라 배 선창에 처박혀 지냈으니까.”

팔려 다녔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서글펐다. 그리고 그건 아마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었으리라. 그가 누구에게 납치를 당한 것이든 그는 물밑에서 여러 거래의 품목이 되었다. 그러니 이리저리 움직이게 된 것이다.

“이제 정당한 자리를 되찾으시게 될 겁니다. 그리고 아무도 감히 그리하지 못할 겁니다.”

내 말에 이든은 “응.”이라고 중얼거렸다.

배는 일주일을 나아가 옌선에 도착했다. 옌선에는 이미 내가 온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나의 삼촌과 숙모들은 이미 자신의 성에서 나와 수도에 머문 지 꽤 되었다고 한다. 수도에서 왕족들과 교류하며 내 상속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주일 동안 나는 다시 이든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든은 배에서도 내내 식사를 하거나 자거나 하지 않을 때에는 공부에만 몰두했다. 그는 모든 것을 빠른 속도로 체득해나가고 있었다. 마법도, 검술도, 다른 공부들도. 특히 에티켓은 흠잡을 데가 없었는데 아마 태어나길 왕세자로 태어났고 대공저에서 자랐으니 아무래도 몸에 밴 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무척 불안했을 텐데도 잘될까,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런 질문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모두가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섭고 불안해서 계속 되뇌이는 질문인데 열한 살짜리가 이를 악물고 참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쓰였다

그렇다고 불안한 표현을 해도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냐면 그런 건 또 아니었다. 나는 그를 구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게 아니니까. 나와 그는 그저 연합하고 있을 뿐이다. 서로의 목적을 위해서. 그러니 그에게 기대도 좋다고 말하는 건 기만일 뿐이다.

옌선에 있는 왕궁 전용 부두로 입항하는데 갑판에 나와 나란히 서 있던 이든이 시선을 궁에 못 박은 채로 나직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예.”

“고마웠어.”

이든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그가 똑바로 왕궁을, 아니 운명을 직시하며 말했다.

“나한테 아무 이유도 없이 잘해 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야.”

“…….”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모르지만…. 내게 좋은 사람으로 남아 줘서 고마워. 만약에 내가… 탑에 갇힌다든가… 여하간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이든의 푸른 눈에 눈물이 조금 맺힌 게 보였다. 그래도 그는 온몸에 힘을 주고 있었다. 바닷바람은 거세지 않았으나 그를 향한 운명의 바람은 폭풍보다 거칠었고 그는 이제 모든 것을 그 작은 몸으로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죽음으로 가기 전, 유언을 내게 남기는 중이었다.

“검은 가져가.”

“…….”

“나랑 썩기엔 너무 좋은 검이잖아.”

그리고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얀 얼굴에 홍조가 가득 피어올랐다. 울음을 참느라 힘을 주고 있어서였다. 그는 기어코 한마디 더,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내겐 너무 아까운 검이었어.”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내겐 너무 아까운 검이었어.”  ]

이미 과거형.

이든은 죽을 만큼 노력했다. 먹거나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내내 공부만 했고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아무리 왕세자라고 해도 그는 어린애였다. 인생의 반을 끌려다니고 학대당한 어린애. 그 어린애가 나와 대등하게 거래를 논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것이었을까. 그럼에도 그토록 노력한 것일까. 왜? 희망이 없음에도 망설일 틈도 없이 노력을 지속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어쩌면 그건 소원을 비는 행위와 비슷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배에서 내릴 때 이든의 얼굴에는 눈물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고한 왕세자의 얼굴을 하고 배에서 내려 마차에 올라탔다. 이미 마차는 두 대가 도착해 있었고 하나는 왕족용, 즉 이든을 위한 마차가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헤어졌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어떻게 위로라도 해 주고 싶었는데, 괜찮을 거라고 다독이기라도 해 주고 싶었는데, 내게는 해 줄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전하, 곧 뵙겠습니다.”

소피아가 웃으며 말했다. 이든의 상황을 아는 소피아의 눈에 걱정과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르친 첫 제자가 교수형이라도 당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소피아의 장남과 이든은 동갑이다. 당연히 소피아에게 이든은 아들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든은 선하게 웃으며 소피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근위병들은 마차 문을 바깥에서 잠갔다. 이든이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피아가 울컥해서 입을 열려는 순간 크라이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자중해, 소피. 왕궁이야.”

“상대는 근위대고.”라고 크라이스가 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용병인 기사단과 근위대는 사이가 별로 좋지 못하다. 근위대는 우리가 충성심도 없이 돈만으로 움직이는 더러운 놈들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근위대가 실력도 없으면서 콧대만 높고 잘난 체하는 오만한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근위대가 우리보다 위일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계약된 신세이고 저쪽은 왕의 직속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위대는 전원 귀족이기도 하고.

이든은 창문 안쪽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냥 웃고 있었다.  그는 그리고 눈을 내리까는 것으로 우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그가 탄 마차가 먼저 떠나갔다.

“기분 더럽네….”

마차 안에서 크라이스가 중얼거렸다. 마차 안은 조용했다. 셋 다 무언가를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어린 왕세자는 죽음을 예감하며 떠났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해 주지 못했다. 그가 죄인처럼 호송당하는 걸 보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은 우리들은 셋 다 기분이 저조했다.

그때 소피아가 눈을 치켜떴다.

“왜 더러워? 왕세자의 거취를 팔아먹을 땐 언제고 기분이 도대체 왜 더러워?”

이런, 이런.

절로 눈이 감겨졌다. 소피아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아무 말 안 하니 같이 참았던 것 같은데 이든의 애잔한 모습을 보고 나니 완전히 폭발한 듯했다. 크라이스의 눈이 커졌다. 그의 회색 눈이 소피아를 죽일 것 같은 살의를 가지고 노려보았다.

“말 다 했어?”

“아니라고 해 보시지, 어디. 왕세자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게 수도에 알려져?”

“소피!”

“너 성격 진짜 특이한 거 알아? 네 아버지한테는 우리 쪽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고 우리 쪽에서는 근위대장 친분을 은근히 노출시키고. 이중 첩자라도 되니? 하나만 해, 하나만. 왜 그러는 거야, 도대체?”

소피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터뜨렸다.

“내가 무슨.”

“아닌 척하지 마! 주군이 모르신다고도 생각하지 말고! 내가 멍청이야? 주군이 무슨 동상이냐고, 이런 걸 모르게?! 왜 사람들을 다 머저리 취급해?! 너만 힘들고 너만 가여운 나머지 남들은 다 머리가 없는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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