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깜
단지 몇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검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보았을 때 놈들은 정식 수련을 받은 기사라는 것. 검은 마력이 걸려 있는 높은 수준의 것이다. 즉, 놈들은 상당한 대우를 받는 기사다. 유력한 기사단, 혹은 고위 귀족, 고위 신관, 아니면 왕궁 소속이라는 의미가 된다.
왕궁 소속일 수도 있다. 그건 당연한 일이지만 아닐 수도 있다면 이야기는 더 커진다. 이든의 존재를 얼마나 알고 있다는 건가. 그런 경우에는 내 쪽도 좀 더 보안을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
하스트레드는 기사의 성이다 보니 결속이 강하고 보안도 잘되는 편이라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이든의 존재를 아는 사람을 하나하나 꼽아 보고 그들을 역추적해 봐야 할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든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몇 없고 그들 대부분은 내가 신뢰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이렇게 또 마음 무거워지는 일이 생기는군.
하늘을 바라보자 달이 흐릿한 게 보였다. 그래도 이든이 제 방으로 돌아가는 데는 별 무리가 없어 보였다. 애초에 정원에 불도 꽤 많이 켜져 있었고.
뭐라고 말을 하는 게 좋을까. 나오라고 할까.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내가 저 작은 왕세자에게 꽤 정성을 쏟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나답지 않은 짓을 많이 했었다. 그가 제 몸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 불안해하는 것이 가엾고 그럼에도 무언가를 해 보겠다는 의지가 기특해서 같이 검술 수련을 해 주기도 하고 했던 것이 무의미한 짓이었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특히.
나는 내가 가지고 왔던 어린이용 진검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어릴 때 쓰던 이 진검은 아버지께서 선물해 주신 좋은 물건이었고 내가 어릴 때 목숨처럼 여겼던 것이기도 했다. 이제 와서는 별 쓸모없어진 물건이지만 그래도 내게는 추억의 물건인데 이걸 이든에게 줄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가지고 나온 거고 내가 쓸 물건도 아니며 그 아이가 나를 어떻게 써먹었든 간에 그 아이의 고통은 사실이라는 걸 잊지 말자.
나는 검을 이든이 숨어 있는 정자 앞부분에 두고 내 방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마음도 입맛도 참 썼다.
***
“요즘은 그 전하와 같이 안 지내시네요.”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크라이스가 말했다. 의아하다는 듯한 어조였다. 새삼 내가 이든을 많이 신경 쓰고 있는 것이 티가 났었구나 싶었다. 말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소피아가 말했다.
“전하께서 많이 시무룩하던데요.”
“그래?”
“예. 어디서 끝내주는 어린이용 진검을 가져오셨던데… 주군께서 선물하신 거 아니십니까?”
선물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그걸 놓고 올 때 기분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그걸 입수한 경위도 생각해 보았다. 내가 떠난 뒤 홀로 그 더러운 정자 밑에서 나온 다음 놓여진 검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어떤 마음으로 그 검을 챙겨서 가져온 것인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선물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는 없는 것 같다.
“아니, 선물은 아니었어.”
“…무슨 일 있으셨어요?”
소피아가 물었다. 조심스러운 어조라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더니 그녀가 아니, 하고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전하께 선물받으셨냐고 여쭸더니 모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두 분 다 좀 이상하셔서….”
“내가 쓰던 검이거든. 선물이라고 하기엔 새것이 아니어서.”
내가 웃으며 말하자 아아, 하고 소피아가 넘어갔다. 그런 뜻이구나. 그녀는 “그렇게 좋은 검인데 새것이 아니라서 선물이 될 수 없다니요! 길이 들어 있기까지 하니 정말 좋은 선물이죠!”라고 소리를 높였다. 소피아의 이런 점이 좋다. 단순하고 명쾌한 점. 그에 비해 크라이스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쉽게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뭐, 왕세자 전하 입장에서는 선물이라고 하기엔 애매한가 보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소피아 앞에서 내게 무슨 일인지 캐묻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대답을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보단 밤에 처리하셨던 놈들 말인데요, 묘한 게 하나 있습니다.”
“묘한 거?”
“놈들 중 하나가 옌선 출입증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수도에서 온 놈들이라고는 생각했고 그래서 수도인 옌선 출입증을 가지고 있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뭐가 문제지? 내가 크라이스를 바라보자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인장이 호스티노 남작의 것이었는데 이 남작은 사실 근위대장과 아주 친합니다. 왕립 학교 시절 내내 단짝이었거든요.”
“어떻게 알지?”
“형이 당시 같이 왕립 학교를 다녔습니다.”
즉, 근위대장을 위해 출입증을 내준 것이다? 근위대장의 이름으로 출입증을 내면 너무 눈에 띄니까 절친한 친구면서 눈에 띄지 않는 남작의 인장을 빌었다?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문제는 이 이야기가 다 들어맞는 경우 복면인을 보낸 사람은 왕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빠르게 움직여야겠군.”
왕이 이든의 존재를 알아챘다면 여기서 이든을 교육시키고 어쩌고 할 여유는 없어진다. 왕이 여러 수단을 사용하기 전에 이든을 옌선으로 데려가야 했다. 모두의 눈에 띄게 만들어야 이든의 생명줄이 길어진다.
“오늘 밤에.”
내 말에 크라이스와 소피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둘 중에 누가 이든의 존재를 발설했을까.
가능성이 있는 건 아마도….
크라이스의 검은 눈동자를 흘끗 보았다. 크라이스 가문은 친왕파로 유명한 가문. 크라이스는 결코 가문의 뿌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배로 떠난다.”
빠르게 가는 데는 배만 한 것이 없지. 그리고 육로보다는 아무래도 기습을 당할 가능성이 줄어든다. 해군을 움직일 생각이 없는 한 기습을 하려면 해적인 척을 해야 할 텐데 산적인 척하는 건 어렵지 않아도 해적인 척하는 건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무엇보다 왕이 제 손발처럼 부리는 건 기사들이지 선원이 아니다.
아버지의 배를 타고 가면 그만인 나와는 달리 왕은 사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배가 없다. 크라이스의 검은 눈에 낭패감이 스치는 게 보였다. 아주 잠깐이지만 분명히 봤다. 그래, 역시 크라이스였나. 저쪽에는 이든의 존재를 알려 주고 이쪽에는 왕의 존재를 알리고. 자신의 존재감을 좀 더 높이기 위해 그는 발버둥 치고 있는 모양이다.
뭐라고 하자니 그 마음이 너무 짠하고.
이걸 내버려 두자니 버릇이 더러워질 거 같고.
같이….
“술이라도 마셔야 하나.”
한잔하며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는 시간을 가져 보자, 같은 짓을 또 해야 하나. 하아, 한숨이 나왔다. 나는 골초지만 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신력을 가진 자들의 특징 중 하나인데 몸에서 술이 잘 안 받는 편이다.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취해서 나뒹굴어 버린다. 중독성이 있는 것들은 모두 몸에서 거부하는데 내 경우 연초만은 제외. 아마 마력 때문일 것이다. 마력이 있는 자들은 술이나 연초 같은 중독성이 있는 것들에 아주 강하고 또 그것들을 즐기니까.
“술이요?”
크라이스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웬 술이세요? 그렇게 묻는 얼굴이라 그냥 웃었다.
“오랜만에 당기네.”
“웬일이십니까?”
“이럴 때도 있는 거지.”
“주군께서 말입니까?”
“뭐어.”
크라이스의 눈이 의심으로 번들거렸다. 휘하의 부하에게 저런 시선을 받는 건 마음에 상처가 된달까, 여하간 불편하다. 매우.
“소피.”
소피아를 부르자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충직한 눈. 나는 그녀를 향해 웃어 주었다.
“배를 준비해. 전부 맡긴다.”
크라이스의 시선이 내 등을 찌르고 있었다. 크라이스를 배제했다는 것이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상황을 계속 유출하고 있다면 그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소피아가 활짝 웃었다.
“예, 주군.”
소피아의 일은 완벽하고 깔끔하다. 그녀에게 맡기면 틀림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현재로서는 크라이스처럼 뒤가 찝찝하지 않다. 소피아가 웃으면서 “맛있고 드시기 편한 술도 준비하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소피아가 준비하러 먼저 나가고 나와 크라이스만이 방에 남았다. 크라이스는 뭔가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나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증거를 잡은 것도 아닌데 뭐라고 할 것인가. 크라이스 또한 내가 그를 배제했다는 걸 알지만 왜 그랬는지 파고들면 그가 곤란한 것도 매한가지.
“주군, 술도 소피아와 마시실 생각이십니까?”
크라이스가 불퉁하게 물었다.
“질투해?”
“무지하게 합니다.”
“나한테 잘해야지. 그래야 끼워 주지, 크리스.”
내 뼈가 있는 말에 그가 쓰게 웃었다. 그는 입을 달싹이다가 웃고 또 입을 달싹이다가 웃었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가슴에 올리더니 “제 마음을 몰라주시다니 서운합니다, 주군. 저는 주군의 노예인데요.”라고 과장된 제스처를 해 보였다.
우리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라이스가 말을 하지 않은 이유는 모르겠다. 나는 허무했기 때문이다. 이 거짓말들이 참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그뿐이었다.
밤이 왔다.
시녀장은 나를 끌어안고 “돌아오실 거죠?”라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 시녀들은 내가 돌아오길 바라는 듯했다. 주인이 바뀐다는 건 그들에게 엄청난 부담이다. 아무리 성격이 나빠도 아는 사람이 덜 무섭기 마련이다. 심지어 내 성격은 귀족치고는 무던한 편에 속하고 그게 아니어도 나는 직업상 성을 비울 때가 많으니 그들에게는 나쁘지 않은 조건의 주인이다. 따라서 시녀들의 내가 주인이 되길, 즉 작위를 쟁취하길 바라고 있는 듯했다.
그에 비하면 시종들, 즉 남자들은 회의적인 듯했다. 그들도 내가 주인이 되길 바라는 건 마찬가지지만 만약 그렇게 안 되는 경우, 지금 나를 지지하면 나중에 새 주인의 기분을 거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여전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