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깜
가슴이 쿵쾅거렸다. 무슨 일이지? 누가 나에게 이런 쪽지를 보내는 거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식사를 그만두고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가 쪽지의 내용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부자연스러워 보일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 천천히 식사를 다 하고 괜히 느릿하게 걸어서 방으로 돌아간 다음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며 사람들을 물리고 나서 서둘러 쪽지를 꺼냈다.
[ 경애하는 왕세자 전하. ]
필체는 아주 힘이 들어간 강렬한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밑의 줄을 읽었다.
[ 외딴 성에서 고초가 얼마나 많으실지, 이 노신의 마음이 미어지는 듯하옵니다. 왕세자 전하께옵서 무사하시니 이는 이 왕국의 축복입니다. 속히 수도로 귀환하시어 정통성이 부여한 왕좌에 오르시옵소서. 신이 정하신 섭리를 이루기 위하여 신 우슨 외 여덟 명은 긴밀히 협조하고 있나이다.
마음이 결정되시면 이 쪽지를 건넨 시녀에게 뜻을 전해 주시옵소서. 일시를 정하여 주시면 하스트레드 성 후원 남동쪽에 있는 정자에서 뫼시겠사옵니다.
우슨, 라스필드, 로젠, 리워드, 아이언, 스이워, 소이아나, 블란예트.
8인 결사 올림. ]
8인 결사라는 여덟 명의 귀족은 각각 서명을 한 상태였다. 그들은 진지해 보였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왕좌를 되찾을 수 있어? 내 삼촌에게 그 죗값을 치르게 할 수 있어? 머릿속으로 온갖 잔인한 상상들이 떠올랐다. 교수형을 당하는 삼촌, 화형을 당하는 삼촌, 목이 잘리는 삼촌,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 얄미운 숙모도 생각났다. 모든 걸 잃고 노예가 되어 울부짖는 숙모를 생각하면 속에서 환희가 터졌다. 더 생각할 것도 없다며 펜대를 쥐었다가 멈칫했다.
그런데 나는 이 여덟 명이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데.
그들이 누군지, 그들의 진심이 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그런 방법이 있을까. 존재는 하는 걸까.
며칠간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미칠 것같이 기뻤는데 며칠 흥분을 가라앉히며 생각했더니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가장 이상한 건 이것이었다.
내 존재가 어떻게 다른 귀족들에게 알려진 거지? 여덟 명에게나 알려졌다고? 그렇다면 왕인 삼촌이 내 존재를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만약 그가 나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어떻게 나올 것인가. 아버지가 살아 계시던 시절에도 교육을 빙자해 나를 망치고 납치하고 결국 왕좌를 차지했던 그가 내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나올지 자명한 일이다.
내가 실리와 같은 어른이었다면 좀 더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뭔가 좋은 방안이 뚝딱 나왔을까?
방법이 없다.
이 내밀어진 손을 거절할 수도 없는데 잡을 수도 없다.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무얼 어찌해야 좋을까. 실리에게 의논을 해 볼까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 “피비린내 나는 길입니다. 걷지 마십시오.” ]
설사 저 여덟 명이 내가 바라는 대로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리는 나를 만류할 것 같았다. 그래서 실리에게 묻지 못했다. 실리가 나를 막으려고 든다면 나는 그녀를 뿌리칠 힘이 없다. 그녀가 나를 막고자 하면 아무것도 못하는 게 나의 현 상황인 것을.
잠깐, 그녀가 나를 막고자 하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해?
순간 머리에 불이 반짝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잘하면, 이 상황을 역이용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하고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잘할 수 있겠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잘할 수 없을까 봐 겁이 났다. 실리가 나의 이상을 알아챌까 두려웠고 다른 변수가 생길까 봐도 무서웠다.
하지만 나는 이 내밀어진 손을 무시할 수 없다.
그 너머에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이 눈도 감지 못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의 과오로 인해 돌아가신 두 분의 안면을 위해서라도 나는 물러날 수 없다.
그러니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 아래에는 내가 검술 수업을 받는 장소가 보였다. 후원의 나무 밑. 그곳을 보고 있으면 그 아래에서 목검을 휘둘러 주던 실리가 눈에 선했다. 그녀는 나와 같이 목검을 휘둘러 주었지만 사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목검 따위 손에 쥘 일도 없는 사람이겠지. 그녀는 성기사니까.
미안해, 실리.
나는 입 밖으로 꺼내어 이 사과를 할 수는 없다. 이렇게 사과하면 내가 한 일을 후회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당신의 아버지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든지와는 상관없이 당신은 정말 나에게 잘해 주었다는 걸 알아.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지. 내가 거기에 기대어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도 있어.
그러니까, 정말 미안해.
눈을 질끈 감았다.
♡ 세 번째 앞장. 비겁과 고독 ♡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웬 놈이냐!”
이런 대사를 내 성에 잠입해 들어온 복면인 3이나 4쯤 되어 보이는 놈이 뱉는다는 건 참 안하무인격인 일인 것 같다. 남의 성에 들어와서 웬 놈이냐, 라고? 이거, 정신 나간 놈 아니야?
“성주다.”
내가 불퉁하게 대답하자 복면인들의 눈이 커졌다.
“성주? 그, 그럼…?!”
“성기사 실리다! 전열을 정비해!”
다들 시끄럽게도 소리 질렀다. 평소 같으면 그들이 전열을 정비하든 무엇을 하든 느긋하게 기다리며 구경해 주었을 것이다. 검법이나 전열을 꾸리는 방식 같은 데에서도 그들의 정체를 알아챌 단서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마음이 조금 급했다. 내가 한밤중에 정원의 정자에 오게 된 건 이든의 요청 때문이다. 이든은 소피아가 가르치며 놀리는 것에 잔뜩 약이 오른 것 같았고 그는 내게 검술을 봐 달라고 청했다. 사실 누구를 가르치는 건 나보다 소피아가 훨씬 잘하지만 청을 받은 이상 거절하기도 어려워 그가 원하는 대로 한밤중에, 즉 소피아 몰래 만나기로 한 참이었다.
괜히 그가 이들에게 휘말리면 골치 아파진다. 인질이 있으면 내가 부자유해지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인질의 가치를 이 정체 모를 놈들이 아는 경우다. 그를 목적으로 한 경우라면?
슬슬 그의 존재가 왕궁에 알려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점이긴 하지. 아무리 보안을 철저히 하려고 해도 죽었던 왕세자가 살아 돌아온 문제다. 이 정보는 엄청난 값어치를 할 것이고 아는 사람 중 누군가는 그 값을 온전하게 제 것으로 만들고자 할 것이다.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전쟁이 아닐 때 사람을 죽이는 건 내가 즐기지 않지만.”
나도 모르게 변명조로 말이 나왔다. 복면인은 여덟 명. 이 정도라면 이든이 나타나 저들에게 인질로 잡히지만 않는다면 별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운이 없구나.”
내 말에 “우리를 얕보는군!”이라고 누군가가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죽이기로 마음먹은 이상 손속에 자비를 둘 필요가 없었다. 살려서 그들이 누군지 그들을 보낸 자는 또 누군지 알아내는 건 중요한 문제지만 이든의 안전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죽여!”
“그쪽으로 몰아!”
하스트레드에 잠입한 게 아니었던가? 놈들은 참 시끄럽게도 나를 잡아 죽이려 들었다. 나는 놈들을 어렵지 않게 피하면서 한 놈씩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목이 찔리고 팔이 잘리고 옆구리가 베인 놈들이 바닥을 뒹굴고 익숙한 피비린내가 진동을 할 무렵에 정자 아래쪽에서 작은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처음에는 놈들 중 누군가가 나를 잡으려고 그쪽에 숨은 줄 알았다. 그러나 놈들이라고 하기엔 그림자가 너무 작았다. 발 하나가 슬쩍 나왔을 때, 나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는 신발이었다. 정확히는 내 신발이다. 내가 어릴 때 신었던 신발. 몇 번 신지 못하고 성에 두었던 그 신발은 지금 이든의 소유였다.
이든. 이든이 왜 정자 밑에 숨어 있는 거지? 언제부터 숨어 있었던 거지?
검을 휘두르면서 생각을 정리해 봤다. 내가 먼저 정자에 도착했었고 그때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 뒤에 저 복면 쓴 놈들이 왔었고, 그사이에는 약간의 시간이 있었다. 이든은 그동안에도 저기에 있었던 셈이 된다. 그렇다는 건 처음부터, 내가 오기 전부터 저기 숨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마치 나와 복면인이 마주칠 걸 예상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저 더러운 정자 밑에 기어 들어가 있었단 말이지?
기분이 데굴데굴 굴러 진창에 처박혔다. 나는 지금 수단으로서 사용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아, 그래 여러 번 이렇게 사용되었지. 많은 사람이 나를 이런 식으로 사용했다. 그래, 그랬었지. 딱히 별다른 일은 아니야. 저 어린아이가 나를 이런 식으로 사용한다고 기분 상할 건 또 뭐란 말인가.
검을 휘두르고 몸을 움직이며 생각했다. 저 아이는 혼자고 여러 가지를 생각해야 하는 입장이다. 뭔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릴 만큼 굴린 끝에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거겠지.
아는데, 마음이 상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으허어억, 네 아비처럼 뒈져라….”
마지막 놈은 저주를 남길 힘이 남아 있었는지 한마디를 남기고 죽었다. 아버지처럼 죽으라고? 묘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처럼? 물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널리 퍼져 있었다. 아버지의 공식적인 사인은 심장 마비였지만 이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주사로 추정되지만 아마 정말 심장 마비였어도 사람들은 아버지가 저주로 죽었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아버지는 적이 많았다.
그렇지만 ‘네 아비처럼’이라? 마치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안다는 투가 아닌가?
들어야 할 게 있는 놈을 죽였군.
쯧, 혀를 찼다. 시신을 발로 툭 차 봤지만 이미 죽은 뒤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역시 그런가. 나는 시신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 단서라도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하스트레드 성에 잠입하면서 이런 경우를 분명히 염두에 두었던 터인지 그들은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