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배의 꽃-10화 (10/94)

<☆10>깜

“하스트레드 경도 아버님의 유지를 잇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잖아.”

나는 치기 어린 게 아니다, 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의외로 그녀는 후우, 한숨을 쉬었다. 마치 정곡을 꿰뚫린 사람처럼.

“하스트레드 경?”

한참 동안 말이 없이 혀만 차고 있는 그녀를 보다 못해 한 번 더 부르자 그녀가 웃어 보였다.

“실리. 실리라고 부르십시오. 저는 아직 하스트레드 작위를 인정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세실리아 사리안일 뿐입니다.”

세실리아 사리안. 귀족의 존칭인 ‘지’를 내 앞에서 뺀 건 내가 윗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당연한 배려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녀는 나를 진심으로 왕세자로 생각해 주고 있구나 싶어서.

“그리고 물론 저 또한 자식 된 도리로서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단지 알 수 없는 것은.”

“……?”

“아버지의 뜻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그녀, 실리는 그렇게 말하고 곰방대를 물었다. 마음이 답답한 듯 깊게 들이마시는 게 보였다.

아버지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부왕께서는 내가 어쩌길 바라셨을까.

나는 태어나자마자 거의 삼촌, 로프넬 대공저에 있었다. 교육을 위해서였지만 삼촌은 내게 많은 자유를 허락했고 원하면 공부는 하지 않게 해 주었다. 나는 공부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지냈는데 정작 삼촌은 그런 나의 모습을 아버지와 어머니께는 알리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내가 교육을 잘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삼촌은 내가 1년에 두 번 아버지께서 내게 내리는 테스트를 잘 볼 수 있을 정도로만 내게 공부를 시키셨다. 기본적인 것들을 가르치고 문제를 미리 알아내어 해답을 외게 하는 식이었다.

지금은 그것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걸 안다.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지금 왕이 그 삼촌 로프넬 대공이라는 걸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는 아무리 어린 나라도 삼촌이 어떤 마음을 먹고 내 교육을 그따위로 진행했었는지, 그리고 한밤중에 수영을 하던 나를 납치한 게 누구였는지 잘 알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신 분의 뜻은 산 자의 임의대로 행해질 때가 많지요.”

그러지 말아야 할 텐데.

실리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진심으로 궁금하고 그 뜻을 행해 주고 싶은 것 같았다. 달빛이 그녀의 콧등에 머물렀다. 달빛 때문에 그녀의 코를 보게 되었다. 그녀의 코는 우아하면서도 극적인 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의 옆모습은 그녀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모습을 더욱 부각시켰다.

좋은 사람.

문득 그 단어가 생각났다. 실리는 좋은 사람이라는 단어를 쓰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죽은 아버지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나의 모든 것을 염려하고 배려하는 사람. 마력과 신력을 동시에 지닌 성기사면서, 그것도 젊은 나이에 대륙에서 이름을 드높인 기사이자 기사단장이면서, 그녀는 모두를 세심하게 보살피려고 애쓰고 심지어 애쓰는 티도 내지 않았다. 그녀는 그 모든 일을 마치 숨 쉬듯이 하고 있었다. 피식, 하는 특유의 웃음을 지으면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지?

성검사가 되고 싶었던 건 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혹시라도 또다시 내가 납치의 위협에 닥치게 되어도 나 자신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처럼 강하면 나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가셔야지요. 그런 차림으로 계시기엔 날이 춥습니다.”

실리가 곰방대의 재를 땅에 털더니 빈손을 내게 내밀었다. 손을 잡아 주겠다는 듯이.

“걸을 수 있다.”

턱을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예, 전하.”

실리는 웃으며 손을 거뒀다.

헉.

악, 소리를 겨우 삼키며 몸을 벌떡 일으키자마자 보이는 건 하늘거리는 커튼 사이로 보이는 희미한 아침 햇살이었다. ‘아, 내 방이군.’ 그렇게 생각하고 웃음이 났다. 여기가 ‘내 방’이라고? 아니, 내 방은, 내 정신이 생각하는 내 방은 감옥, 혹은 헛간, 축사, 아니면 버려진 마구간 같은 곳이다.

이 순간이 꿈일까 봐 겁이 난다. 내가 드디어 미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봐 무섭다. 그 마구간 토벽을 긁으면서 침이라도 질질 흘리며 꿈을 꾸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정말 어떡하면 좋지.

[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냐고!”  ]

나는 어젯밤 그렇게 외쳐 물었지만 실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피비린내 나는 길을 걷지 말라고 했을 뿐이다.

피비린내 나는 길.

그건 다시 말하자면 그녀는 그런 길을 걷고 있다는 뜻이잖아. 그리고 그녀 자신은 그 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왜일까. 왜 기사의 길을 피비린내 나는 길이라고 표현했을까. 그 길은 영광된 길일 텐데.

마법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 마법 선생에게 성검사가 되기 위한 조건을 물었다.

“성검사는 신력과 마력을 그 몸에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마력은 개인이 타고나는 것이지만 신력은 가문, 즉 혈족이 타고나는 것입니다. 집안에 신관이 없다면 성검사가 될 수 있는 확률은 극히 적다고 보시면 됩니다.”

“실리네 가문에는 신관이 있어?”

“많습니다. 가문의 높은 분들 중에도 계시고요.”

마법 선생은 순순히 대답해 주기는 했지만 내가 그녀를 실리라고 부르는 것에 좀 놀란 것 같았다. 그는 내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실리라고 부르는 걸 아주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내가 실리의 손님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일부러 물었다.

“세실리아는 자신을 실리라고 부르라 했지만 난 좀 이상해. 왜 세실이 아니고 실리야?”

그러자 마법 선생의 얼굴이 밝아졌다. 실리가 허용한 이름이라는 걸 알자 그는 마음에 짐이라도 내려놓은 듯한 태도로 대답해 주었다.

“할머님의 애칭이 세실입니다.”

“응?”

“할머님의 이름도 세실리아시거든요.”

아아, 그래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법 선생이 어쩌면, 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일리드’를 염두에 두신 걸 수도 있습니다.”

일리드는 후계자가 가질 이름이다. 그리고 일리드의 애칭은 대체로 일리. 실리와 비슷하니 아무래도 염두에 둔 거 아니겠느냐는 말에 나는 얼굴이 일그러질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일리드라는 이름을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그런 짓을 하겠는가. 어머니 애칭을 딸에게 붙이기 좀 불편하니 그냥 다른 애칭을 붙인 거겠지.

마법 수업을 받는 내내 집중하려고 애썼지만 수업이 끝나자마자 어쩔 수 없이 머릿속으로 그나마 기억에 남아 있는 집안사람들을 총동원해 보았다. 역시 신관은 한 명도 없었다. 우리 가문의 피에는 신력이 흐르지 않는구나. 그렇다는 건 나는 성검사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마검사는 될 수 있다는 거니까.

***

실리는 내가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하는 말에 탐탁잖은 기색이었지만 늘 그렇듯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그녀의 기사단에 있는 여성에게서 검을 배울 수 있게 되었는데 이름은 소피아였고 마검사였다. 나는 마검사가 되고 싶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실리는 내 마음을 눈치챈 것 같았고 그녀는 나를 위해 일부러 자신의 부관이자 마검사인 소피아 지 히옌을 나의 검술 선생으로 배정해 주었다.

소피아는 늘씬한 몸매에 까무잡잡한 피부, 녹색 눈동자, 그리고 공격적인 검술을 가진 기사였다. 몇 주 그녀에게 검술을 배우면서 나는 검술의 기초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말이 꽤 험한 편이었는데 평민이었다가 마검사가 되어 작위를 받아 간신히 남작이 된 케이스였기 때문인 듯했다. 그녀는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제자를 어려워하는 스승은 쓸모가 없다며 나를 마구잡이로 굴렸다. 나는 매일 이를 갈면서 검술 수업을 받았다.

가끔 실리는 검술 수업에 참여해 주었다. 내가 의외였던 것은 아주 기초적인 것들을 실리는 매우 성실한 자세로 이행했다는 점이었다. 검을 휘두르는 기초적인 것을 그녀가 나랑 같이 할 때는 내가 다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소피아는 내 양어깨를 딱 잡고 실리를 보게 했다.

“정확히 보세요, 전하.”

소피아가 말했다.

“저게 정확한 자세예요. 전하의 휘청거리는 자세와는 격이 달라요, 격이. 저렇게 하셔야 하는 거예요.”

꼭 말을 이따위로 하지.

나는 코끝을 찡그리면서도 실리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새하얀 셔츠, 검은 가죽 바지, 내가 가진 것보다 조금 큰 목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정갈했다.

소피아가 내 선생이었지만 나는 실리를 보며 검술을 배웠다. 나는 실리처럼 검을 휘두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소피아의 공격적인 검보다 실리의 아름다운 검이 마음에 들었다. 실리의 검은 고요하고 우아했다. 그녀의 검술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피비린내 나는 길.

그녀의 검에서는 그런 비린내 따위는 전혀 날 거 같지 않은데.

정작 실리는 내 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가끔 같이 검술 수업에 참여했을 뿐 내 검이 이렇다는 둥 저렇다는 둥, 그런 참견은 한마디도 해 주는 법이 없었다. 잘했다는 말도 이렇게 고치라는 말도 없어서 나는 속으로 애가 탔다. 왜 그녀는 내 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을까. 그녀의 눈에 너무나 못 미치기 때문에? 물론 그렇겠지만 그래도 시작하는 어린애치고는 잘한다든가, 더 노력해야 한다든가, 뭐 그런 게 있을 거 아니야.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검을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건지 실리에게 한마디 얻어 내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실리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지 9주째에 접어들기 시작했을 무렵, 식사를 하는데 한 시녀가 내 수프 그릇 밑에 살짝 보이도록 쪽지 하나를 밀어 넣고 갔다. 아무도 모르게 한 행동이라서 나도 자연스럽게 그 쪽지를 소맷자락에 넣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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