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배의 꽃-9화 (9/94)

<☆9>깜

내가 사람을 죽인 건 열세 살 때였고 원형 경기장에서였다. 상대는 노예 검투사였는데 그는 매우 ‘운이 좋게도’ 사자가 아닌 왕립 학교에서 제일가는 검사를 대상으로 이기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아니, 그는 그렇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사자가 아닌 열세 살짜리 여자아이에게 이기면 자유인이 된다는 그 사실을 그는 아마 꿈처럼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나보다는 사자가 더 그를 자유로 만들어 줄 가능성이 크다는 걸.

“여기서 뭐 해?”

의외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이든이 서 있었다. 한밤중의 호숫가.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한밤중에 호숫가에 나왔다가 납치를 당해 수년을 떠돌고 노예 취급을 당하고 자신이 돌아갈 곳조차 잃어버렸던 사람 아닌가. 그런데 또 이 밤중에 호숫가에 있다니.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던 것 같다. 이든은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나오는 걸 봤어.”

“…….”

“물어볼 게 있어서.”

들고 있던 곰방대를 내려놓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든이 왕세자라는 건 알지만 솔직히 지금은 왕세자 대우를 해 줄 기분이 아니었다. 사라지면 좋겠는데.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생각하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가늘어진 내 눈을 본 그는 그래도 어깨 한 번 움츠리지 않고 당당하게 턱끝을 들었다.

왕으로 타고났는데.

한때 로프넬 대공이라고 불렸던 지금의 왕을 떠올리며 조금 아쉬워졌다. 이든은 그보다 훨씬 왕의 재목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 따위가 누구는 왕에 어울리고 누구는 왕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 주제는 못 되지만 그래도 내 싸늘한 시선을 받으면서 움츠리지 않을 수 있다는 건 타고난 기백이 있다는 뜻이다.

안됐어.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났는데 운이 지지리도 없군.

“여자가 연초를 태우는 건 처음 봤어.”

이든의 말에 웃음이 났다. 여자라.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게 여자란 그저 리스크의 상징이었다. 여자로 태어나서 좋았던 게 아무것도 없다. 남자로 태어났다면 편하게 가졌을 모든 걸 어렵게 가지게 만든 원흉이었을 뿐.

“맛있어?”

“태워 보시겠습니까?”

내가 곰방대를 내주자 이든이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열한 살이면 곰방대를 입에 물긴 좀 어린 나이긴 하다. 아이에겐 아까운 사치품이지. 하지만 현재의 왕이 아직 로프넬 대공이던 시절 그는 곰방대를 마치 물처럼 입에 물고 있었다. 그는 나의 왕립 학교 선배였다.

그러고 보니 이 분도 결국 왕립 학교에 가시겠군.

귀족이라고 다 왕립 학교에 다니는 것은 아니겠으나 작위 계승자 등은 의무적으로 다녀야 한다. 법적인 의무는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더 강력하게 정해진 무형의 법칙이었다. 왕립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는 이유로 작위 계승권을 빼앗긴 사례도, 드물지만 있었을 정도였다.

뭐, 이분이 왕립 학교에 가실 때쯤엔 나와는 ‘한때 알았던 사이’ 정도에서 그치게 되겠지만.

내가 이렇게 긴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이든은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물어보고자 하는 게 조금 껄끄러운 질문인가 싶어서 약간 눈썹을 들어 올려 보였다.

“물어보실 게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성검사라고, 들었어.”

“아아.”

“그건 아주 어려운 거지?”

굳이 대답을 하자면.

“드물다, 에 가깝지요.”

성검사는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니까.

“그럼 타고나야 하는 거야?”

“그것이 첫째 조건입니다.”

거기가 시작이다. 성검사가 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있다. 타고날 것, 단련할 것, 그리고 환경이 충족될 것.

“나도 성검사가 되고 싶어.”

이든의 말에 나는 그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는 참 아름다웠다. 나는 요정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요정도 이 아이처럼 어여쁠까 싶었다. 이 아름다운 아이의 손에 들리는 검은 어딘가 애처롭고 어울리지 않아서 별로 보고 싶지 않아졌다. 성검사의 검이든 마검사의 검이든 검사의 검이든 그 검은 모두 피에 젖기 마련이고 피비린내는 이 아이와 조화되지 않았다.

당신의 어린 인생이 힘들었다는 건 나도 알지. 하지만 역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

“무리입니다.”

“왜?”

어지간히 성검사가 되고 싶었던 듯 이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타고나시지 못했으니까요.”

“나도 마력이 있잖아. 마력 선생이 그랬어, 내 마력이 보기 드문 형질의 것이고 아주 강하다고!”

“맞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이 정도로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아마 오랜 학대 때문에 몸의 컨디션이 제 상태가 아니라서 그랬던 모양이다. 의식주가 해결이 되자 그의 마력은 몇 꺼풀 벗겨 낸 것처럼 제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강하고 선명한 힘이었다. 하지만.

“성검사는 신력과 마력을 동시에 가진 자들을 말합니다. 신력만 가진다면 검사가 될 수 없지요. 마력만 가진다면 신성한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 힘을 동시에 가진 육체로 태어나는 것, 이것이 성검사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건, 그건 그렇게 태어나야만 하는 거잖아, 내가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거잖아….”

이든이 분한 목소리로 말해서 나는 웃음이 났다. 누군가는 이든이 가지고 있는 저 마력을 가지고 싶어서 매일같이 원통해할 것이다. 그가 가진 정통성이 매 순간 탐이 났을 사람도 있다. 현재의 왕이 그렇다. 정통성도 강대한 마력도 가진 사람이 신력 하나 못 가졌다고 분해하다니.

“예.”

내 담백한 대답에 그는 화가 난 듯 나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나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아무 말도 않자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풍성한 속눈썹의 끝이 우아하게 말려 올라간 걸 보면서 나는 그가 가진 아름다움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의 모친이었던 앤 왕비는 그 미모로 인한 에피소드가 산처럼 많은 분이었는데 그녀는 왕비었기에 나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지금 그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새삼 그녀의 미모가 얼마나 경탄할 만한 것이었을지 짐작이 된다.

“그럼… 는 …를 …돼?”

이든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어서,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다.

“예?”

“그럼, 나는 뭐를 해야 되냐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고개를 쳐들었다. 푸른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타고난 자존심 때문에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분하고 슬픈 건 어쩔 수 없는 듯했다. 나는 그의 감정이 요동치는 모습의 연유를 알지 못해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되물었다.

“무엇을, 이라는 말씀은…?”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냐고!”

♡  두 번째 뒷장. 좋은 사람  ♡

내가 빽 소리를 질렀을 때 여자는 나를 내려다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안다. 그녀는 내 이 질문에 대답을 해 줘야 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걸. 그녀는 나를 가둔 사람의 딸이고 나와는 계약 관계일 뿐이며 우리는 언제든 서로를 배신할 수 있다. 나도 알아. 하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고 물어볼 사람이라고는 이 여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나도 성검사 같은 게 되고 싶었다. 아니, 이 여자가 되고 싶었다. 이 여자처럼 웃고 싶었다. 이 여자는 늘 웃었다. 곤란한 순간에도 웃고, 당황스러운 순간에도 웃고, 아마 화가 나는 순간에도 웃을 것 같았다. 어딘가 서늘한 바람이 몸을 감도는 것처럼 느껴지는 여자. 하지만 머리카락은 불타는 빨강. 눈동자는 타오르는 금색. 피부는 창백하리만큼 희고 키는 그냥 보통 여자들의 키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보다 훨씬 크고 체격도 우람한 이들을 줄줄이 끌고 다녔다. 성 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존경과 두려움을 가지고 대했다.

[  “세실리아 지 사리안을 모르십니까? 어디서 오신 분이신지 원, 신기하시네요.”  ]

사람들은 내가 그녀에 대해 물을 때마다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고 곧 뿌듯해하며 그녀에 대해 알려 주었다. 세실리아 지 사리안. 통칭 실리. 올해 스물여섯. 대륙에 셋밖에 없는 성검사 중 한 명이고 스무 살이라는 나이에 하스트레드 기사단의 단주가 된, 사리안 가문의 유일무이한 후계자. 기사단의 단주가 되었을 때는 여러 불안에 찬 의견들이 나왔으나 그녀는 그 모든 이야기를 종식시켰다.

나와는 달라. 왕세자였는데도 불구하고 삼촌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다 모든 걸 잃게 된 나와는 다른 사람.

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보는 자신은 얼마나 철없고 모자랄까 생각하면 배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나를 경멸하고 있지 않을까, 라는 걱정을 불식시키는 사람. 나를 경멸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심어 주는 상대. 어쩌면 나를 가엾게 여길지도 모르고 동정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경멸은 아니야.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니야. 필요하다면 그녀의 등을 찔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에게 미움받는 게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매일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추잡해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당신에게 의존하지 않고 당신의 등도 찌르지 않고 홀로 독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성검사라는 게 되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피비린내 나는 길입니다. 걷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내 어깨를 어색하게 도닥거렸다. 이래도 되는지 조금 고민하는 듯한 손짓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위로하고 싶은 듯했고 나를 위로할 다른 방법을 찾지도 못한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내 어깨를 두어 번 도닥거리고 손을 거두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돌아가셨는데.”

피비린내 나는 길을 걷지 말라는 말에 웃음이 났다. 피비린내? 그게 무슨 대수라고.

“자식 된 도리로 길을 가릴 순 없지.”

그녀는 입을 다물고 애매하게 웃었다. 할 말이 있는데 관두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어린애 특유의 치기 어린 소리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울컥하는 마음이 가라앉은 건 그녀의 눈빛 때문이다. 그녀의 눈은 늘 나를 도닥이고 있었다. 걱정하는 듯한 눈. 그 눈은 뭔가를 속삭이는 듯 다정했고 내 신경질을 잠재우는 효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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