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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꽃-8화 (8/94)

<☆8>깜

씁쓸해하는 어조가 참 열한 살의 것 같지 않았다. 위로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인지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실 이런 위로에 재주가 없다. 그래서 위로 대신 사실을 말해 주었다.

“원래 마력 보유자들은 대체로 물을 좋아합니다. 가장 다루기 쉬운 에너지 형태라서 수영을 하면서 다들 물을 다루는 걸 시작으로 마력을 익히고….”

“마력?”

이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마력? 그의 얼굴이 묻고 있었다.

“전하, 저도 마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력 보유자를 바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마력이 없는 척하고 싶었나. 내가 숨길 필요 없다고 말하는데 그의 눈이 더 커졌다.

“내가,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모르셨습니까?”

“내가?”

믿을 수 없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가 놀라서 나도 같이 놀랐다. 왜 모르지? 마력이라는 건 타고나는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지고 있는 게 마력이다. 소피아 같은 평민이라면 주변에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마력 보유 여부를 늦게 알 수 있지만 귀족만 되어도 이야기가 다르다. 귀족 가문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신관을 불러 아이의 마력 보유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마력을 보유한 아이가 태어난다는 건 가문에 대단한 재원을 하나 확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독자적으로 작위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며 가문에 대해 많이 공헌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왕세자인데 마력 보유 여부를 본인이 몰랐다고?

후천 발현인가.

더 꼬이네….

마력은 선천적인 것이다. 타고나는 순간부터 발현된다. 그러나 드물게 후천적으로 발현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선택된 자들이라고 불린다. 창조주에게 사랑받는다고도 표현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보통의 마력 보유자들과는 다른 엄청난 규모의 마력을 보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후천 발현… 지금 몇 명 있지?

대마법사 두 명이 후천 발현인데 한 분은 작년에 돌아가셨고 한 분은 현재 은둔하시어 어디 계신지 살아 계시기는 한지 알 수도 없다. 후천 발현자는 이토록 드문데 사라졌던 왕세자가 심지어 후천 발현자란 말이지. 정통성에 이젠 마력까지 플러스된 이 아이를 반왕파가 얼마나 탐낼 것인가.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럼 나도 마력을 쓸 수 있다는 건가?”

이든이 내게 물었다. 눈이 기대로 일렁이고 있었다.

“마력은 그저 힘에 불과해서 그걸 사용하시려면 기술이 필요합니다. 질문에 답을 드리자면, 쓰실 수 있습니다. 배우신다면요.”

“배우겠다!”

이든이 나에게 매달렸다. 그의 몸을 가리고 있던 타월이 떨어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얼굴이 내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배울 수 있겠느냐고 묻는 그 얼굴은 목숨을 구하는 것처럼 간절했다.

“마력을 운용하는 건 생각보다 별거 아니고.”

“상관없어!”

“배우는 건 꽤 고통스럽습니다.”

고통스럽다고 말하면서 나의 성장 시기를 한 번 돌아보았다. 고통스러웠나? 그렇다기보단 굳이 말하자면 피곤했던 것 같다. 배울 건 너무 많고 시간은 너무 없었다.

“괜찮아!”

이든이 소리쳤다.

이든이 나를 끌어안은 채 제발, 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자존심이 강하다. 왕세자라는 걸 드러낸 이후 둘만 있을 때 그는 한 번도 내게 왕세자가 아닌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사실 나는 이 아이가 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그의 푸른 눈에는 종종 경계심이 날을 세우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그저 나를 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그의 유일한 수단이니까.

“…….”

그가 나에게 상속권을 지지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그의 거래를 받아들인 것은 상속권을 가지기 위함이 아니었다. 문득 아버지가 떠올라서였다. 아버지는 혹시 내 상속권 방어를 위해 그를 구하여 마구간에 처박아 둔 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어쩌면 나를 위한 선물로, 유산으로서 그를 준비해 둔 건 아니었을까. 이것은 아버지의 유지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거부할 수 없었다.

“사리안…. 제발.”

그러니 이 일은 내가 거부해도 될 일이다. 애초에 그를 가르치는 건 나의 몫도 아니고.

“마법사를 찾아보지요. 하스트레드는 습지에 면해 있어 마법사들이 꽤 많이 살고 있습니다. 아마 전하의 가정 교사가 될 만한 이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입단속을 좀 해야겠지만 그건 이든에게 가정 교사를 제공하겠다고 한 이상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그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니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내 말에 이든은 작게 숨을 쉬었다. 마치 우는 것 같은 숨의 토로. 문득 이 왕세자, 아니 이제는 대공이 될 이 아이의 요즘 심정을 한 번 상상해 봤다. 언젠가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부모는 이미 죽었고 자신이 돌아갈 곳은 없으며 그나마 유일한 수단은 자신을 가둔 남자의 딸에게 기대는 것뿐.

그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일까.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나는 그런 입장에 놓인 적이 없으니까.

***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지만 겨울을 대비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지난 몇 번의 겨울 동안 하스트레드에서는 아사자나 동사자가 발생하지 않았었습니다.”

로스토프가 말했다. 그는 나와 내 기사들의 눈치를 흘끗 보더니 어깨를 움츠리며 덧붙였다.

“축복받았었던 거죠. 몇 년간은 큰 추위가 오지 않았었으니까요.”

아버지가 영주일 때는 아사자도 동사자도 없었다는 말이다. 로스토프는 대놓고 아버지와 나를 비교하는 듯이 굴다가 내 기사들의 사나운 시선을 받고는 어쩔 수 없이 변명을 읊조렸다.

“이번 겨울은?”

그러나 이미 기분이 상한 리온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는 얼굴로 ‘그래서 이번 겨울은 어떻다는 건데.’라는 얼굴에 로스토프가 난처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아마도 추울 것으로….”라고 중얼거렸다. 크라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겨울이니 당연히 춥겠죠, 신관님. 신전이 예상하기엔 얼마나 추울 거 같습니까?”

“그게….”

로스토프가 우물쭈물했다. 크라이스의 말은 신전이 예상하기에 겨울이 얼마나 추운 것으로 예상하느냐는 건지, 아니면 내가 아버지에 비해 능력이 어떻다고 예상하고 있냐는 건지 알 수 없는 미묘한 비아냥이었다.

“신관님.”

소피아의 눈매가 야멸치게 올라갔다. 아아, 별로 조짐이 안….

“혓바닥이 짧으신가 본데 제가 길게 만들어 드려요?”

“소피!”

내가 고함을 지르자 소피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소피아는 나를 따른다. 그녀의 충성심은 아주 드높다. 고마운 일인데 가끔은 그 하늘을 찌를 듯한 충성심이 문제를 일으킨다.

혀에 다소의 수정을 가해 주겠다는 협박에 로스토프의 눈이 커졌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신력을 확인받아 신관이 된 로스토프로서는 아마 이런 불량배 같은 협박은 태어나서 처음 듣는 종류의 것일 테다.

“뭐라고요?”

로스토프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갈색 눈이 모욕으로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소피아가 몸을 일으키자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마검사인 소피아를 상대로 기백 싸움을 한다는 건 무리라고 느낀 듯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항의하는 시선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아가씨!”

내가 웃어 버리자 로스토프가 버럭 화를 냈다. 웃으면 안 된다는 건 아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로시.”

오랜만에 로스토프의 애칭을 부르자 그의 얼굴이 더 샐쭉해졌다. 내가 자신을 달래려 든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턱을 괴고 진심으로 궁금한 걸 물었다.

“너는 왜 내가 여기서 제일 유하고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예…?”

로스토프가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한 듯 눈을 두꺼비처럼 끔뻑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무섭고 나는 그래도 덜 무서워?”

“아가씨.”

“내가 너의 주인이 될 자인데 내가 제일 무서워야 하지 않을까?”

“…….”

“그리고 실제로 여기서 내가 제일 무서워야 돼. 왜냐하면 내가 제일 사람을 많이 죽였거든.”

내가 싱긋 웃자 로스토프의 눈에 두려움이 짙게 배어 나왔다.

로스토프는 어릴 적 나의 마법 선생이었다. 신관이었던 그에게 나는 물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어릴 적의 나를 보았던 수많은 자들이 이런 착각을 한다. 내가 어리다고, 아직도 내가 여섯 살짜리 계집아이라고. 아가씨, 라고 부르면서 자기들 뜻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오해들을 해 댄다.

로스토프가 그런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굳이 바로잡지 않은 것은 별로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부분 하스트레드에 머물지 않았다. 나는 왕의 검이었고 왕이 원하는 곳 어디든 가서 그의 적을 처단했다. 그 왕이 누군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현재의 왕이든 선왕이든 내게는 그저 명령 이행, 아니지 정확히는 계약 이행만이 중요했다. 하스트레드 기사단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로스랜 왕국과 장기 계약 중이었으니까. 결국 내게 중요한 건 하스트레드 기사단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필요하다면 나는 어릴 적 나를 가르쳤던 마법 선생의 목을 자르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해했어, 로시?”

“…이해, 했습니다, 아가씨.”

“각하. 각하라고 불러야지, 로시. 나는 공작이 될 이니까.”

턱을 괸 채 웃으며 말해 주자 로스토프의 눈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그는 덜덜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각, 각하.”

나는 이렇게 또 유년 시절의 한 사람을 떠나보낸다.

사람을 처음 죽였을 때의 기분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 나는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놀랐다기보다는 내가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에 놀랐다. 사람을 죽이는 순간은 아주 천천히 지나가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한순간이었다. 목숨은 덧없었다. 생명의 빛이 꺼져 가는 눈을 보는 건 기분이 매우 더러웠지만 더 불쾌했던 것은 그 더러운 기분을 결코 티 내서는 안 되는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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