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깜
삼촌은 이든이 아니다. 그 정통성은 내가 가지고 있다. 신성한 피, 존귀한 이름, 신의 축복. 모두 나의 것이다. 대부분의 것을 잊기는 했지만 정통성에 대해서만큼은 잊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왜 대단한지 몇 번이고 가르쳐 주셨다. 정통성. 그것이 내 존재의 핵심임을.
본래대로라면 나는 왕좌에서 반짝이는 왕관이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내 잘못으로 왕좌에서 굴러떨어졌고 이제 상점에 나온 왕관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왕관이다. 나를 결코 값싸게 팔진 않겠어.
주먹을 굳게 쥐었다.
아버지, 힘을.
어머니, 저를 지켜 주세요.
“과분하신 말씀, 황공합니다.”
여자가 말했다. 이 여자가 나의 발판. 나는 이 여자를 밟고 올라서겠다. 조금도 웃을 마음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웃어야 했다. 억지로 웃어 보았다. 한 번 또 한 번. 조금씩 웃음이 자연스러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여자가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제법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대할 수 있었다.
“잘 부탁할게, 하스트레드 경. 우리는 한 배를 탄 거니까.”
어찌 되었든 지금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지푸라기는 이 여자.
놓치지 않으리라.
♡ 두 번째 앞장. 모든 걸 잃어버린 열한 살 ♡
“와, 저는 그렇게 야망에 넘치는 눈을 가진 열한 살은 처음 봤네요.”
어우, 징그러워.
크라이스가 소름이 끼친다는 듯이 손을 부르르 떨었다. 왕세자, 아니 이제는 왕세자로 복권할 가능성이 거의 없으니 이든이라고 부르자. 이든이 내 성에 머문 지 며칠이 지났을 무렵 사람들의 평가는 반으로 나뉘었다. 대체로는 사려 깊다, 조용하다, 열심히 공부한다 등의 좋은 평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크라이스 같은 평을 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가정 교사들은 대호평이야. 빠른 속도로 학습 습관을 익히고 있고 공부에 대한 열의도 굉장하다고.”
내 말에 소피아가 말을 이었다.
“저도 괜찮던데요. 차분한 성격에 열정적이고. 사람들한테도 친절해요.”
“야망이 그렇게 강하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생긴 건 이쁘장해도 꼴은 비루먹은 노새가 따로 없는데. 그리고 친절한 것도 당연해. 며칠 전까지 노예 취급이었는데 지금 주군의 손님이라고 해서 거만하게 굴었다가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면 그땐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크라이스가 이죽거렸다. 백작가 차남인 크라이스는 아무래도 왕세자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아아, 하고 깨달았다. 백작은 현재 왕의 측근이다. 그는 최근에 궁내 장관직에 임명되었다. 왕이 본궁의 책임자로 백작을 지목했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왕과 가까우면서 마음도 편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차남인 크라이스로서는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사안인 것이 그는 사랑받는 아들이었다. 백작 작위는 당연히 장남인 형에게 돌아가겠으나 백작이 작위를 하나 더 받는다면 그 몫은 크라이스의 것이었다. 혹시 봉토라도 받는다면 그 영지는 두고두고 크라이스의 자손들에게 대물림될 것이니 그로서는 예민한 사안일 수밖에 없다.
“원래 네가 재수 없긴 한데.”
소피아가 불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더 재수 없다는 말이 숨어 있는 한마디에 크라이스는 흥, 코웃음만 쳤다.
“운 좋게 마력을 타고나서 작위까지 한 번에 받으신 남작 각하께서 이 미천한 기사 나부랭이의 고뇌를 어찌 아시리.”
“또 발작하는 걸 보니 결혼하고 싶은가 보네. 그냥 결혼해, 좀.”
“작위 없는 귀족 차남의 아들로 태어난 아이가 얼마나 비참한지 넌 상상도 못 해서 하는 소리야.”
“기사 하면 되지.”
“재능이 없으면? 그리고 기사 작위는 누가 그냥 준대? 나는 그래도 아버지가 백작이기나 했지. 내 아들은 제 아버지가 기사인데 무슨 수로 기사 작위를 받아.”
비참함을 대물림하기 싫어서 크라이스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했다. 잘생긴 편인데도 그는 모든 청혼을 거절했다. 크라이스의 뜻이 하도 강경해서 그의 아버지인 백작조차 크라이스의 결혼을 명령하지 못했다. 결혼을 억지로 시켰다가는 크라이스가 아버지와 절연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 크라이스, 네가 가장 귀족다워.”
소피아는 태생이 평민이라서 그런가 자유분방했다. 귀족의 에티켓을 갑갑해했고 드레스 차림도 견디기 어려워했다. 나는 에티켓에도 능하고 드레스도 불편해하지 않지만 결국 신흥 귀족이었다. 아버지가 작위를 받기 전에는 우리 집안도 평민이었다. 평민치고는 조금 유명하고 대우를 받는 데다가 상류 사회와 교류도 활발한 가문이긴 했지만 그래 봤자 푸른 피는 아니었다.
크라이스는 오랜 공신 가문 출신답게 우아하고 완벽한 귀족 남자였다. 사실 나는 그의 형보다 크라이스가 더 귀족답다고 생각한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간에.
가장 귀족답다는 말에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던 크라이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쓴웃음이었다. 그는 잠시 웃으며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주군.”
크라이스로서는 드물게 낮고 진지한 목소리였다.
“응.”
“그 아이는 차후에 화가 될 겁니다.”
그 아이.
크라이스는 일부러 이든을 깎아내렸다. 왕세자라는 걸 알면서 그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듯한 말을 하고 있다. 크라이스의 상황과 입장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해 줘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나와 이든의 약속을 모른다. 내가 이든의 복권을 돕는 대신 그가 나의 상속권을 지지하기로 한 것은 그와 나만의 비밀이었다.
“지금은 자신이 누군지 기억을 못 한다고 치죠. 그래도 언젠가는 기억해 낼지도 모릅니다. 그럼 그때는 분명히 피바람이 불 거예요. 그 본인이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주변에서 절대 그렇게 안 놔둘 겁니다.”
야망에 넘치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평한 크라이스조차 이든이 자신이 누군지 기억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당연했다. 이든은 식사 예절도 부족했고 행동거지도 우아하지 못했다. 귀족의 아이라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몸에 익히는 에티켓 중 무엇 하나 이든은 가지고 있는 게 없었다.
에티켓은 훈련이다. 그것은 충분히 반복되어 습관으로 고착되어야 한다. 이든의 삶은 그 습관을 파괴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든은 왕세자다웠다. 그는 정치 감각을 타고났고 나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주군, 결단을.”
크라이스의 말에 소피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불쌍한 애를 심지어 죽이자는 거야? 그 아이가 정당한 후계자인 건 맞잖아. 이미 왕권을 돌려받을 수는 없다고 해도 제자리로는 돌아가야지.”
소피아가 불쌍한 애, 라고 말하는 것에 크라이스가 경기를 일으켰다.
“불쌍한 애라고?! 소피, 정신 차려! 진짜 불쌍한 건 그런 애가 갑자기 나타나서 인생이 휘둘리고 목숨을 잃게 되고 파멸에 이르게 될 수많은 사람이야. 걔 때문에 죽을 목숨이 한둘일 거 같아?!”
“그럴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해서 지금 내내 빼앗기기만 했던 아이를 죽이는 게 옳은 결정이라고? 그게 도덕적이라고?”
“누가 도덕적이래? 옳대?! 단지 그게 가장 합리적이고 많은 사람들이 덜 다치는 길이라는 거야. 화를 자초할 필요는 없잖아!”
소피아와 크라이스가 서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내가 슬슬 그들을 말려 보려는 찰나에.
“그만.”
기사단의 부단장, 리온이 적절하게 그들을 제지했다. 싸늘한 목소리에 소피아와 크라이스가 서로를 노려보면서 불만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주군께 너희들이 가타부타 할 수 있는 존재인지 오늘 처음 알았군그래.”
막 방에 들어서던 리온이 비난을 쏟아 내자 소피아와 크라이스가 둘 다 눈을 내리깔았다. 선을 넘었다는 걸 인식한 그들에게 화를 내야 할지 용서를 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화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원래 화가 잘 나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화를 잘 내지 않는 편이라 화를 내야 하는 때에는 억지로 화를 끌어 올리는 편에 속했다. 그래서 늘 이런 처세가 좀 어려웠다.
슬쩍 리온을 보자 그는 화가 난 듯 소피아와 크라이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타고나길 화라는 감정이 부족한 편이라면 리온은 냉정하기 때문에 화를 잘 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화를 한 번 내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이쯤에서 일어나는 게 좋지 않을까. 리온은 화를 내면 반드시 나한테도 화를 낼 테니까.
‘기어오르게 두지 마십시오!’로 시작되는, 군기와 기강에 대한 잔소리는 평생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아, 슬슬 보러 갈 때네.”
도망쳐야겠다.
리온의 화가 내게로 방향을 틀기 전에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피아와 크라이스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들이 마치 ‘우리를 버리고 가실 거예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물론, 그럴 생각이었다. 적이라면 싸워서 죽이든 이기든 하면 되지만 상대가 리온이면 도망 외에는 방법이 없는걸.
“어디 가십니까?”
내가 방을 나서기 전 리온이 물었다. 어디 가는지 궁금한 거 같기도 하고 도망치는 거 안다는 듯한 얼굴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어쨌거나 이 자리만 떠나면 내 볼일은 끝나는 거니까.
“약속이 있어.”
나는 어디를 가는지 말하지 않았다.
이든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호수였다. 호수에서 익사를 했다고 알려진 그는 알고 보면 밤 수영 중에 납치당했던 것 같다. 어쨌거나 그는 여전히 호수를 좋아하고 수영을 좋아했다. 최근 몇 년간 그는 여유롭게 수영할 수 있는 신세가 아니었고 그래서 요즘 그는 시간이 나면 호수에 둥둥 떠다니곤 했다.
“이상한 일이야.”
내가 건네 준 타월을 받아 몸을 닦는 이든을 흘끗 보았다. 열한 살치고는 키도 작고 몸도 왜소했지만 말투만은 어른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몸이 지나치게 작은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이든이라는 이름을 이었던 이들, 즉 선왕들은 모두 기골이 장대한 기사들이었다.
크면 좀 나아지려나.
내가 생각하는 사이 그가 말을 이었다.
“호수에서 수영을 하다 이 모든 일을 겪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호수와 수영이 좋아.”